기력이 없어도 독백은 쓰고싶어


이전 시점: 일단은 이쪽
https://app.simplenote.com/p/CY0D7c


#리베리(=에르킨) 16살 즈음의 시점입니다
#파판14 스포... 이 정도면 없는 편 아닐까요?
#욕설, 유혈, 심한 괴롭힘 소재 주의해주세요.


---


 퍽. 내 뒤통수로 돌멩이가 날아왔다. 뜨끈한 피가 뒷목을 적시고 등 뒤에서 낄낄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나한테 돌을 날린 군인들이다.

 "병신 새끼. 안 피하고 그대로 맞는 것 좀 봐."
 "안 피하는 게 아니라 못 피하는 거 아니냐? 야만족 새끼가 그럼 그렇지."

 '죽일까?' 살인 충동이 습관적으로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1분 안에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불타는 감정의 맛을 꽤 오랫동안 음미하다가 군인들한테서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아니다, 나 혼자만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노역장에 혹사당하는 노역꾼들이 아주 많았다. 내가 보복을 했다가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불똥이 튀면 안 된다. 이걸 두고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느냐고.
 무시하자, 무시. 짜증나는 군인들을 무시하며 포대기들이나 마저 들처업기로 했다. 그러자 무리 중 몇 명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야. 쌩까냐?"
 "⋯⋯."
 "귀가 안 달려서 소리도 못 들어? 이거 완전 덜떨어진 놈이네?"
 "실실 쳐웃고 있는 것 좀 봐. 대가리 쳐맞아서 맛 간 거 아니냐."

 왜 나한테 지랄이실까요들. 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 사실 유난히 나만 건들려 하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안그래도 보기 드물고 이질적으로 생긴 아우라족인 데다가 여기에 입소했을 때부터 몸이 거의 반송장인 상태였어서 그럴 거다. 여기 끌려온 사람들이 어디 한 군데 성치 않은 거야 흔한 일이라지만 나만큼 심각한 부상을 달고 있는 건 또 드물다는 말을 들었다. 요컨대, 괴롭히기 만만해보여서 찍혔다는 거다. 지긋지긋한 갈레말인들.

 비속어를 속으로 삼키며 저들의 말에 나긋나긋하게 대꾸해준다. 적당히 맞다보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저한테 볼일이 있으실까요?"
 "이 새끼가. 다 들리면서 안 듣는 척 했네? 어? 우리가 만만해 보였나보다?"
 "짐승놈이라 그런지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야만족인지 짐승인지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다.

 "멍청한 개새끼는 상하 관계를 똑바로 가르쳐줘야지."

 군인 무리 중 한 명이 칼자루로 내 배를 툭툭 찔렀다. 하필이면 얼마 전에 다쳤던 부위라 원하지 않아도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아마 알고서 일부러 상처를 때리고 있는 거겠지? 나쁜 놈들이라고 속으로 욕하면서도 그들의 욕구에 맞춰 아프고 약한 척을 해주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식민지 징용병들은 저마다 무거운 짐을 서너씩 들쳐업은 채 멀찍이 내 옆을 지나간다. 그들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마 저들은 나한테 눈길도 주지 않으려 할 거다. 괜히 군인들과 눈이 마주쳤다가 자신이 휘말려들면 당장의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 테니까. 이런 상황이니 도움을 기대하는 건 옳지 않고, 적극적으로 괴롭힘을 없애기 위해 움직이기도 애매하다. 그저 이유 없는 괴롭힘이 멈출 때까지 내가 참을 수밖에⋯⋯.

 "눈 깔아."

 개머리판이 내 정수리를 친 것과 노역장 문이 열린 건 거의 동시였다. 노역장 이곳저곳에서 작은 소란이 일고, 나를 괴롭히느라 정신이 팔려 손님이 온 것도 모르고 있던 군인들이 뒤늦게 손님한테 반응했다.

 "헉! 제, 제노스님!"
 "제노스님께서 무슨 일로 이 곳에!"

 급하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경례를 하는 군인들 사이로 모습을 보인 건 덩치만 큰 갑옷을 입은 노란 머리 애송이, 제노스였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꼬맹이한테 다 큰 성인 장정들이 쩔쩔매는 게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노스를 노려보며 경계하는 가운데, 제노스는 근처의 군인들한테 눈길도 주지 않는 채 느긋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내가 여기에 오면 안 되기라도 하나?"
 "아닙니다! 이 제국의 모든 대지가 제노스님을 위한 것입니다!"
 "헌데 내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있는 듯 하군."

 제노스는 나를 보고 있다.
 망할.

 "몸이 다 낫거든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나?"

 미칠 듯이 물어뜯고 싶었다. 저 자식이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반박하고 물고 늘어져 토론이라는 이름의 싸움을 대판 벌이고 싶다. 아니, 사실, 그 전에 저 자식의 대가리를 한 대만 후릴 수 있으면 원이 없을 것 같다! 시간과 장소라는 걸 가릴 줄 아는 내가 힘겹게 분을 삭이느라 가만히 서있기만 하려니 간도 큰 말단 한 명이 제노스의 질문 아닌 질문에 대답했다.

 "하, 하지만 제노스님. 이 자는⋯⋯."

 멍청한 군인의 용기는 제노스의 눈빛 한 번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아마 내가 징용병이자 죄수인 입장이니 이 시간에는 노역을 하고 있어야 한다, 뭐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겠지?

 "⋯⋯ 그러고보니⋯ 이 자들한테 맞고 있더군."
 "⋯⋯."
 "겨우 잔챙이한테 당할 실력은 아닐텐데⋯⋯ 그 사이 솜씨가 녹슬기라도 했나?"

 제노스가 옆에 있던 군인의 허리춤에서 칼을 빼내 나한테 던졌다.

 "확인해보마. 검을 들어라."

 여전히 저 새끼는 싸가지가 없다.

 "제노스님, 제노스님과 검을 맞대기에는 저런 미천한 야만족은⋯⋯"
 "내가 싸우겠다고 누가 말했지? 싸우는 건 너다."
 "예?"
 "굳이 말로 해야 알겠나? 저 자가 나와 검을 맞대기에 충분한 자인지 자격을 확인하겠다는 거다⋯⋯. 네놈을 다섯 합... 아니... 세 합 만에 목을 벨 수 있는지 봐야겠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말을 더듬는 군인의 모습이 이제는 애처롭게까지 느껴진다. 저런. 그러니까 마음을 곱게 먹지 그랬어.

 얼결에 복수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물론 제노스는 나를 괴롭힌 놈한테 복수할 기회를 마련해주겠다는 기특한 생각 따위 전혀 갖지 않았을 거다. 초장에는 나도 살짝 의심을 하긴 했는데⋯ 보기만 해도 짜증이 솟는 저 낯짝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노스는 정말로 내가 부상 때문에 싸울 수 없는 상태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거다. 내 뿔을 걸 수 있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나는 저 꼬맹이가 마련해준 기회 따위 죽어도 받고 싶지 않다.

 "제노스님. 저를 향한 의심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 곧 제노스님께서 감사하게도 마련해주신 대련을 수행해야 하는 바, 아직은 부족한 몸이 이번 전투로 인해 제노스님과의 일합에서 본 실력을 다 내지 못 할까 심히도 저어됩니다."
 "⋯⋯."
 "그러니 부디 넓은 아량을 베푸시어 명령을 거두어주시고 제노스님과의 대련에 온 신경을 쏟을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실망할 일 없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제노스도 나름 황족이라니까 알겠지. 방금 한 말은 '응 안 해' 라는 뜻이다. 내 말 뜻을 알아들었는지 제노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존댓말을 하지?"

 ⋯⋯ 못 알아들었냐?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왜 나한테 존댓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 제가 어찌 하늘과도 같은 갈레말 제국의 황자님께 무례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 안 드는군."

 어쩌라고. 내가 반말하면 여기서 바로 온몸에 숨구멍 나는 거 모르냐?

 "뭐, 됐다. 나도 이런 곳에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한 시라도 빨리 검을 맞대고 싶은 마음은 우리 둘 다 같은 듯 하니⋯⋯."
 "⋯⋯."
 "⋯ 따라와라. 이번에는 더 좋은 장소를 마련해두었다."

 갑옷 부위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제노스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제노스의 뒤를 급하게 따라갔다. 아무리 눈치 파악이 느린 나라도 노역장의 분위기가 이전과 달라진 게 느껴진 탓에 선뜻 움직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 때문에 미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복잡한 일은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 나는 노역장에 끌려가지 않게 되었다. 텅텅 비어 나 혼자 남은 감옥 안에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아무래도, 나, 제노스의 깔로 인식된 것 같지.

 "진짜 시발 다 죽여버려⋯⋯."

 제노스랑 엮이면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이번에 생긴 습관적인 살인 충동은 오랫동안 품 속에 가지고 있었다.
Report ab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