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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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백은 파이널판타지14의 크리티컬한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파판14 기반캐의 과거사를 다루는 독백이므로 리베주가 미처 인식하지 못 한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포함됐을 수 있습니다.
#욕설, 부상, 유혈, 사망 묘사를 포함합니다.
에르킨은 억울하다. 이렇게 허접한 애송이한테 패배할 에르킨이 아니었다.
갈레말 제국의 황자, 제노스 예 갈부스한테 그가 패배한 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제국군은 다수였으나 에르킨은 혼자였다. 아무리 제노스를 실력으로 압도한다 한들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거의 성공할 뻔했던 암살 시도는 실패했고, 에르킨은 사지가 묶인 채로 포획되었다. 그 상태로 몇 개의 낮이 지나갔다.
"......"
파호드 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존자가 남아 있을까. 차라리 마을에 남아 그들과 함께 끝까지 싸웠어야 했다는 후회는 굶주림과 더불어 깊어져 갔다. 답답함에 머리를 찧으면 뿔의 쓰라린 고통과 이마에서 흐르는 선혈이 남는다. 에르킨은 그것들과 며칠을 동거했다.
아픔과 함께 달리던 수송 차량이 부드럽게 멈춰선다. 얼마 안 가 컨테이너 문을 열며 나타난 제국군 병사가 에르킨의 몸뚱이를 들쳐멘다. 도축당한 고깃덩이마냥 호송되는 에르킨의 꼴은 여느 식민지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에르킨은 본인이 감옥이나 지하실 따위에 갇힐 거라 예상했건만, 병사가 그를 던져놓은 곳은 누가 봐도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이었다. 마을의 천막 서너 개를 합친 것보다 훨씬 넓은 데다가 햇빛이 잘 들어오기까지 하니 적어도 자신같은 평민이 머물 법한 공간은 아니지 않나. 경계심에 눈동자를 굴리고 있으려니 갑옷 철판끼리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제노스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얌전하군."
거리를 둔 채 멈춰선 제노스가 말했다.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던 짐승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열세 살 애송이가 지껄이는 도발이 우습다. 에르킨은 잘 돌아가지 않는 혀를 놀린다.
"마비독을 그렇게나 처발라놓고 쌩쌩하길 바랐냐. 네 대가리를 잘 못 쓰겠어?"
발음은 어눌하고 속도도 느리다. 근육을 못 움직이게 만드는 독을 성으로 오는 며칠 간 계속 맞은 탓이다. 덕분에 자신의 부족을 침략한 적국의 핵심 인물이 눈 앞에 있음에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처지이지 않나. 독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달려들었을 거다. 눈에 힘을 부릅 주고 노려보는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제노스는 그런 에르킨을 말없이 내려다본다. 불현듯 허리춤의 검집을 빼낸다.
"뭘......!"
그리고는 검을 검집채로 에르킨한테 던진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르킨의 눈앞으로 검집이 미끄러져 당도한다.
"들어라. 다시 한 번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
"아니면, 그렇게 땅바닥을 기는 상태로 죽고 싶나? 그렇게 하고 싶다면 내가 직접 죽여주지."
"... 하......"
웃음이 나온다.
"하하, 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 상황이 짜증나기 그지 없다. 실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꼬맹이가 자신을 얕보질 않나, 황자라는 자리가 존귀하기라도 한 양 명령과 하대를 해대질 않나. 그리고 거기에 맞춰야지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신의 처지도 화가 난다. 그러나 이건 기회가 될 수 있다. 저것이 자신을 얕잡아볼 때야말로 반격을 성공시킬 수 있는 찬스다. 그렇다면 거리끼지 않고 써먹어줘야 하는 법.
에르킨은 칼자루를 입에 물었다. 늑대가 사냥감의 목숨을 끊듯 머리를 털자 검집이 떨어져 나갔고, 그 상태 그대로 목만 돌려 팔목 밧줄 쪽에 칼날을 비집어 넣었다. 마비된 사지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살갗에서 피가 흐른다. 하지만 괘념치 않는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발목의 밧줄도 잘라낸다. 바르작거리며 몸뚱아리를 겨우 일으키자니 오른손에 들린 칼이 사정없이 떨린다. 거친 숨을 내쉰다.
"......"
"그래. 그 눈이다."
에르킨의 눈은 타오르는 듯했다.
"그 눈이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귀를 찢을 듯한 파열음이 울리고, 맞댄 두 검날에서 붉은 불티가 튀었다. 삐걱이는 대치 상태가 이어진다.
"이런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군. 뭐라고 명명해야 할지 아리송할 정도다... 희열, 쾌감? 아니면 해방감...?"
"......"
"확실한 건, 네놈은 나와 동류다. 맞댄 검을 통해 느껴지지 않나?"
에르킨이 힘을 주어 제노스의 칼을 밀쳐냈다. 두어 걸음 물러난 제노스를 향해 칼을 힘껏 휘둘렀다.
"뭐래 씨발!!"
어서 저 입을 다물려야 한다, 그 일념 하에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한 합. 공방이 무사히 이루어진다. 두 합. 검을 내리치던 와중 에르킨의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태세가 무너지고 제노스가 들어올렸던 칼은 의도한 궤적 그대로를 따른다. 에르킨의 상체가 크게 베인다.
"큭......!"
"하지만 이래서야 죽이는 보람이 없군."
어깨를 감싼 채 주저앉은 그대로 숨을 몰아쉰다. 이토록 짧은 공방이었음에도 지나치게 힘이 많이 들어갔다. 분하다는 감정을 가득 담아 자신한테 다가오는 제노스를 올려다봤다.
당장이라도 저 녀석의 목을 따버려야 하는데.
제노스는 에르킨의 목을 내리치지 않았다. 검 끝으로 턱을 들어올려 자신의 눈을 마주보게 했다.
공교롭게도 제노스의 눈동자는 에르킨과 같은 푸른색이다.
"사흘이다. 사흘 뒤, 나를 다시 찾아와라."
제노스는 에르킨을 죽이기 위해 데려왔다.
"그동안 몸을 충분히 회복시켜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를 베어버릴 것이다."
"......"
"너무 쉽게 죽어버리면 시시할 테니."
혹사당한 몸뚱이는 얄궂게도 때이른 수면을 급하게 청한다. 억지로 부릅 뜬 눈이 서서히 감기고, 피를 많이 잃은 몸뚱아리가 앞으로 쓰러진다.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도 에르킨은 제노스의 얼굴을 눈에 새기고 있었다.
한 번 정한 사냥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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