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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을 나오니 로봇청소기가 다시 빨빨대는 중이었다. 제노는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뒷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목선과 쇄골과 가슴팍이 전부 울긋불긋했다. 제가 새긴 울혈들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재민은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너 구경하지 마. 제노가 밉지 않게 흘겼다. 얼른 옷 입어 제노야 감기 걸려. 재민은 짐짓 점잖은 체 딴소릴 했다.
말살패 下
정각 아홉 시. 집을 나섰다. 밤바람이 거셌다. 마냥 걷기엔 쌀쌀한 날이었다. 둘은 택시를 타고 승합차를 주차해둔 골목까지 이동했다. 오늘 춥네. 재민이 중얼거리며 승합차의 시동을 걸었다. 제노는 야상 점퍼를 이불처럼 덮은 채 조수석에 파묻혔다. 졸리면 잠깐 눈 붙여. 재민이 말했다. 나 안 졸려. 너 운전하는데 내가 어떻게 자. 제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골목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잠들었다. 재민은 제 후드집업도 벗어 덮어줬다.
뒤척거리는 제노를 이따금 내려다보며 재민은 남해고속도로를 탔다. 이번의 영업장은 몇 해 전에도 머물렀던 마산의 회원구였다. 마산 창원 진해가 합쳐져 통합창원시로 출범한 지 오래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마산이니 진해니 구지명을 불렀다. 회원구의 회원동, 비좁은 단독주택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마산역 삼거리에 진입하는데 총책한테서 전화가 왔다. 피곤한 목소리였다. 나나야 어디냐. 재민은 볼륨을 낮춰 대답했다. 저 마산역 디지털프라자요 곧 도착합니다. 소곤거렸다고 생각했건만 귀신같이 제노가 눈을 떴다. 퉁퉁 부은 얼굴. 카시트에 눌린 왼쪽 뺨이 달아올라 있었다. 때마침 빨간불이었다. 통화를 종료하며 재민은 몸을 빼어 키스했다. 제노는 저항 없이 재민의 뒷목에 팔을 둘렀다. 아직까지 치약내를 풍기는 달디단 혀. 말랑한 이제노의 말랑한 혀. 재민은 그 혀를 양껏 물고 빨았다. 아, 재민, 재미나. 제노가 앓았다. 잠결이라 발음이 뭉개졌다. 재민이 웃으며 제노의 뺨을 쓸었다.
이내 출발 신호가 떴다. 앞유리의 틀을 따라 초록빛이 번지자 제노는 자연스레 어깨를 밀어냈다. 알아듣고 재민이 자세를 바로했다. 일렬의 무리에 섞여 차가 출발했다. 창밖의 마산시내가 잔상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나 얼마나 잤어? 깨우지.”
헝클어진 머리를 더듬으며 제노가 물었다.
“왜 깨워 자는 애를.”
“심심하잖아.”
“너 자는 거 보니까 안 심심하던데.”
“재민아 설마 나 입 벌리고 잤어?”
“어.”
“악.”
“악은 무슨 악. 애인끼리.”
“못생겼었어?”
“칭찬 듣고 싶어서 물어? 잘생겼어.”
예일안과의원. 현대오일뱅크. 마산우체국. 굵직한 건물들과 함께 대화가 이어졌다. 제노는 아무래도 민망한 표정이었다. 잘생겼다고. 제노야. 거울보고 객관적으로 살아. 석전교를 지나 직진하며 재민이 덧붙였다. 띵. 띵. 문자 수신음이 연달아 울렸다. 재민은 휴대폰을 제노에게 토스했다. 제노가 폴더를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재민아 미닛메이드 사오래. 그리고 할 말 있대. (미닛메이드. 제노가 좋아하고 도박꾼들이 좋아하는 음료수였다. 재민은 제노가 좋아하니까 좋아했다.)
◆
하우스 내부는 만원이었다. 좁은 간격을 두고 놓인 테이블들과 꽁지방으로 향하는 문 앞엔 벌써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다. 미처 제거하지 못한 향내가 났다. 동네 점집을 개조한 탓이었다. 옥색 촛대나 연등 같은 장식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출근요. 재민이 외치며 굴러다니는 연등을 걷어차 구석으로 모았다. 안녕하세요. 제노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 왔냐. 총책이 확인했다.
“출근길에 단속 없었지.”
재민은 막내 다찌를 붙들어 물었다. 네 음주단속 있다길래 그 길은 피했슴다. 덩치 큰 막내의 똘똘한 답이 돌아왔다. 요즘 재민은 도박꾼들을 실어 나르는 업무에서 거의 손을 뗀 상태였다. 가끔 단골인 주부들의 출근길만 맡아 운전했다. 짬밥이 꽤 찼으니 웬만한 운전은 막내한테 넘기라는 총책의 지시대로였다.
제노야 네 테이블 저기. 총책이 출입구 근처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제노는 찬장에서 패를 꺼내 익숙하게 착석했다. 주스 갖다 줘? 재민이 물었다. 응 나 알로에 마실래. 제노가 뺨을 긁적였다. 아직 붓기가 덜 빠진 얼굴이라 곱절은 앳돼 보였다. 재민은 대용량 미닛메이드의 뚜껑을 땄다. 먼지 묻은 종이컵을 닦고 주스를 따랐다.
제노의 테이블에 미닛메이드를 세팅한 후 주방으로 복귀하던 때였다. 총책이 손을 들어 호출했다. 그러더니 먼저 하우스를 빠져나갔다. 재민은 간격을 두고 주변을 살피다 껌을 씹으며 따라나섰다. 드넓은 마당 한편, 뒤뜰로 향하는 샛길이 보였다. 총책은 샛길 끝자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읽을 수 없는 낯으로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재민은 조용히 다가가 목례했다.
“어 나나야.”
총책이 담배를 지져 껐다.
“시킬 일 있으세요.”
“오늘 호구 하나 앉았어. 테이블 7번. 수술은 박 선생님 안방에서 섭외한 기사들이 며칠에 걸쳐 진행할 거고. 근데 전직 조폭새끼라 버릇이 험하기로 유명해 밑천은 두둑하다만. 뭣하면 주먹이 나간단다.”
허. 재민은 고개를 꺾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별일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 총책이 물어 대접했던 호구들은 대개 얌전한 영감들이으니까. 중소기업 이사진, 주부, 회사원, 교수, 의사. 직업부터 사이즈 나왔다. 당연한 일이다. 단기적으로 영업하는 하우스의 특성상 호구의 성깔이 온순한 편이 무조건 이득이었다. 본주인이 있던 건물을 뜯어고쳐 만든 장소에서 소란을 피워 봤자 골치일 뿐이다. 조폭 출신, 뭣하면 주먹이 나가니 어쩌니. 이런 호구를 앉혀 수술하는 건 처음이었다. 재민은 몸을 돌려 껌을 뱉었다.
“일단은 예의주시해라 어떻게 튈지 모르니까. 박카스값 칼같이 받지 말고. 살살 기분 맞춰.”
총책이 헛기침했다.
“부잔가봐요?”
재민은 던지듯 물었다.
“제대로 털면 우리 서울에다 안방 차릴 수 있을 정도야.”
말도 안 되는 아찔한 답이 돌아왔다. 아 씨발. 단번에 정신이 확 들었다.
냄새가 구린데요 누님. 그런 돈자루가 뭣 하러 소형 하우스엘 굴러왔겠습니까. 재민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굳이 발설하지는 않았다. 총책은 바보가 아니었다. 제가 불안을 맡았다면 총책도 맡았을 것이다. 모험을 감수하고 큰 땅 만지자는 소리였다. 재민은 조금 침묵하다 중얼거렸다. 여차하면 전 제노만 챙깁니다. 총책이 당장 뒤통수를 후렸다. 재수 옴붙는 말을 삼가랬다. 성공할 거야. 별 일 없을 거고. 총책의 되뇜은 꼭 저 스스로에게 외는 주문 같았다.
하우스 내부로 돌아오자마자 재민은 7번 테이블을 살폈다. 착석한 인원은 넷. 4포였다. 척 보기에도 선수의 탈인 세 명과 호구 하나가 섞여 들쭉날쭉 앉아있었다. 선수들은 구성이 특이했다. 원피스를 입은 중년 여자, 금발 파마머리 남자, 바싹 마르고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남자애. 박 선생님인지 뭔지는 몰라도 웬 꼬장이 본방을 희한하게 굴리는 모양이었다. 박카스야, 요구르트! 누군가 주문했다. 재민은 요구르트를 세팅하고 만 원을 챙기며 7번 테이블을 이어 주시했다. 이번의 호구는 덩치가 컸다. 포마드로 넘긴 앞머리, 회색 낯빛, 사투리 억양, 금목걸이. 단풍잎 무늬 와이셔츠와 파란 벨벳 바지의 조합이 화려했다. 전형적인 관상이었다.
“저기 나나야.”
주의를 설계석에 빼앗긴 사이 제노가 재민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뭐 필요해? 재민은 금세 자세를 바꿨다. 여기 선생님이 커피 사신대. 제노가 턱짓했다. 제노의 테이블에도 이미 손님이 여럿이었다. 회사원으로 짐작되는 트렌치코트의 남자와 똥머릴 묶은 여자와 검버섯이 핀 노인. 노인이 만 원권 네 장을 내밀었다. 재민은 익숙하게 믹스커피를 타갔다. 제노의 컵에는 커피 대신 알로에 미닛메이드를 채웠다. 제노가 손을 진득하게 잡았다가 놨다.
재민은 굴러다니는 의자를 잡아 앉았다. 제노의 테이블과 7번의 호구 설계석을 동시에 읽기 위함이었다.
두 테이블 모두 바둑이 판이었다. 제노는 조심스레 판돈을 조절했다. 초장에 박스를 갈거나 세 번의 턴 내내 스테이하는 주목적인 플레이를 삼갔다. A24로 베이스, 승부를 둘 법한 패였으나 맞은편 트렌치코트가 기뻐하는 기색을 띄자 땁 없이 다이했다. 2349로 9탑, 질 줄 알면서 레이즈한 후 써드를 먹은 똥머리 여자에게 판돈을 몰아줬다. 고객들의 기분을 맞춰가며 대충대충 치는 척할 뿐이지 실은 전부 이제노의 손안이었다. 재민은 발끝을 모아 앉은 제노를 한참 바라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제노가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어 웃었다.
반면 호구 설계석은 공기가 험악했다. 금발 파마머리가 대놓고 돈질을 해댔기 때문이다. 바둑이는 승부가 빠르게 갈리는 게임이다. 카드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총 세 번. 금발 파마는 아침에 땁이나 투카를 외치고서 저녁까지 스테이하며 판돈을 펑펑 올렸다. 그러나 정작 저는 족보가 구린 투베이스, 판돈은 파마 옆의 바싹 마른 남자애가 독차지했다. 남자애는 어린 듯 보였지만 어딘지 타짜의 냄새가 났다. 눈알이 짐승의 것이었다. 묵묵히 하프를 밀다가 저녁에 땁을 돌려 높은 메이드를 만들기 일쑤였다. 판은 점점 과열됐다. 중년 여자, 하프로 일관하더니 난데없이 다이. 금발 파마는 346 베이스로 털렸다. 호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세를 겨우 쫓아가다 A23 베이스로 털렸다. 승리는 마른 남자애가 잡았다. 2479 9탑이었다. 열 받을 터였다. 호구는 짐짓 멀쩡한 체 기침했다. 저렇게 희롱해도 되나. 재민은 턱을 괬다. 금발 파마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생각 없어 뵈는 동그란 눈이었다.
“좀 쉬죠. 대가리에 산소 넣어야 되겠는데요.”
까무잡잡한 남자애가 선언했다. 설계석은 일단 정지됐다. 여자 선수는 팔짱을 끼고 화장실엘 갔다. 재민은 주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제노가 따라 들어왔다. 테이블이 얼추 정리된 모양이었다. 재민은 팔을 벌렸다. 약속한 수순처럼 제노가 폭삭 안겼다. 담배 냄새와 샴푸 냄새가 섞여 풍겼다.
“재민아 7번 있잖아.”
“응.”
“수술이야?”
응석을 부리듯 이마를 비비적대며 제노가 물었다. 정신없이 제 테이블의 패를 돌리는 와중에도 용케 눈치챈 거였다.
“어 수술이래.”
“수술치곤……. 아저씨 침착하더라.”
“침착해야지 까딱하단 지갑이 뚫리는데.”
재민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근데 재민아 아까처럼 네가 계속 옆에서 감시해주면 안 돼? 그 아저씨 테이블 엎을까봐 무서워.”
“무서워?”
“당연하지 어떻게 안 무서워.”
“알았어 일 나면 바로 나한테 와. 너 업고 튀게.”
고마워. 그러더니 제노가 먼저 뺨을 감싸쥐고 키스했다. 혀끼리 부딪히자 알로에 맛이 났다. 재민은 제노의 뒷목에 팔을 걸쳐 끌어당겼다. 잇몸을 훑고 입천장을 간질였다. 간헐적으로 움칠대며 제노가 허리를 뺐다. 벌써 앞섶이 부풀어 있었다. 재민은 베어 무는 것처럼 제노의 아랫입술을 삼켜 빨았다. 아, 아. 제노가 애끓는 소릴 흘렸다. 누구한테든 영원히 양보하기 싫은 성질이었다. 싫었지만. 이제노를 지키고 먹여 살리고 사랑하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뚝뚝 떨어지는 아쉬움을 거둔 채 재민이 입술을 뗐다.
“너 때문에 집중 못 하겠어.”
입가를 훔치며 제노가 투정했다. 어 미안해. 근데 나도 꼴려. 재민은 타이르듯 끌어안았다.
◆
휴식이 끝나고서도 설계석은 아슬아슬한 양상을 띄웠다. 재민은 제노의 부탁대로 종종 음료나 식사를 서빙하며 홀을 지켰다. 제노는 게임 중, 총책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원로한 손님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오롯이 호구한테 신경을 쏟는 인간은 박카스맨 나재민 뿐이었다. 재민은 미동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느 지점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 척, 평온을 연기하며 설계석의 게임을 읽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왼다더니 기특한 꼴이었다.
호구는 야금야금 털렸다. 여럿이서 짜 맞추고 판돈을 쑥쑥 올리는, 소위 짱구베팅을 해대니 털릴 수밖에 없었다. 재민은 남몰래 혀를 씹었다. 게임 돌아가는 꼴이 가관이었다. 이전까지는 금발 파마의 돈장난이 재밌었다면 이젠 바싹 마르고 까무잡잡한 남자애의 원맨쇼가 볼만했다. 전 쭉 스테이, 올인합니다. A48 베이스로 맹맹한 패를 쥔 채 재산을 붓는 깡은 한국 하우스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 호기를 감당 못 해 후달렸는지 뭔지 호구가 다이를 읊었다. 허나 이상스레 태연한 낯이었다. 재민은 수술치곤 호구가 침착하더라는 제노의 평을 되새겼다. 메슥거렸다.
속수무책으로 긁히던 호구는 막바지가 되어 밑천의 절반쯤을 복구했다. 선수네들이 봐준 건지 운이 오른 건지는 불명확했다. 복구해서 다행이지요, 내일 또 뵙겠심더. 주먹질도 고함도 없이 실실대며 호구가 일어섰다. 조도 낮은 조명 아래 벨벳 바지가 펄럭였다. 들어가세요. 선수들은 호구의 귀가를 저지하지 않았다. 설계대로 먹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금발 파마머리가 돈을 셌다. 그럼 저희끼리 칠까요. 마른 남자애가 제안했다. 선수 넷 중에서 가장 어리고 가장 경력자 같았다.
“선생님은 여서 일하십니까. 인상이 원하신데.”
별안간 호구의 걸음이 멈췄다. 제노의 테이블 앞이었다.
재민은 표정을 굳혔다. 거의 본능이었다.
“네. 저는……. 그냥 소소하게 실화로 쳐요. 많이 잃으신 분들하고 잠깐 어울려 드리는 거예요.”
제노가 종이컵 밑단을 만지작대며 대답했다. 호구는 구미가 당긴단 듯 엉덩이를 빼어 테이블에 앉았다. 새끼가 왜 개수작을 걸지. 재민은 삼 초간 머리를 굴리다 결국 성금성큼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저도 좀 앉을게요. 입으로는 여유롭게 말하면서 눈으로는 출입구 근처의 막내 다찌한테 신호를 보냈다. 나 대신 박카스 일 맡아달란 뜻이었다. 영민한 막내는 서둘러 부엌으로 기어들어갔다. 제노가 재민을 올려다봤다. 괜히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인원이 셋뿐인 이상한 바둑이가 시작됐다. 판돈은 시시하다 못해 치사했으나 왠지 공기가 뜨끈했다. 재민은 최대한 바지처럼 빠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제노를 위한 판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는 말이다. 제노는 겨우 만 원 이만 원이 걸렸음에도 신중하게 베팅했다. 하프요, 콜, 저 죽을게요. 7번 테이블의 선수 집단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묘했다. 선수라기보단 정말 백지꾼에 가까운 느낌. 재민은 굳이 모험하지 않았다. 다이할 타이밍이 왔다 싶으면 곧장 죽었다. 기세를 몰아주려는 의도였다.
제노가 패를 돌렸다. 재민은 하트3, 다이아5, 클로버8, 클로버10으로 358 베이스를 만들었다. 베팅. 판돈이 터무니없이 적었으나 아무도 그를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목적은 돈놀이가 아니었다. 아침 턴에 제노는 쓰리카를 돌렸다. 호구는 투카였다. 재민은 땁을 썼다. 하트 킹이 떴다. 쓸모없었다. 점심까지 버틸까 생각하다 제노의 하프와 호구의 콜을 듣고 다이했다. 점심, 제노는 스테이 호구는 땁이었다. 이어 호구가 다이했다. 설계석에 앉았을 때완 달리 호구는 차분한 눈알을 뜨고 게임을 술술 굴렸다. 둘의 족보를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두 분은 이리 새파란데 어째 게임을 다 하시능교.”
대뜸 민망한 질문이었다. 호구가 훌훌거렸다. 마땅한 대답이 없어 재민은 쯧 혀를 찼다. 아버지가 타짜셔서요. 지금은 러시아에 계세요. 제노는 거짓말로 넘겼다. 재민은 제노의 진짜 아버지, 지금 저들 앞의 포마드처럼 한 때 호구였던 남자를 되짚다 상념에 빠질 뻔 했다. 제노는 담담했다.
다음 게임이 전개됐다. 호구가 패를 돌렸다. 재민의 손안엔 클로버A, 하트10, 클로버 잭, 하트 킹이 잡혔다. A와 10으로 투베이스였다. 개패도 이런 개패가 없었다. 하나마나한 베팅이 끝난 후 재민은 속는 셈치고 쓰리카를 지졌다. 다이아2, 클로버3, 하트6이 굴러 들어왔다. A236이니 메이드 6탑이었다. 비빌 만한 역전이었다. 재민은 발부리를 움츠렸다. 호구는 스테이했고 제노는 투카를 썼다. 베팅이 이어졌다. 호구가 하프랬다. 재민은 콜했다. 제노도 콜. 다들 스틱인가 봐. 제노가 의도적으로 혼잣말했다. 저는 노 메이드란 뜻인 것 같았다. 쉬지 않고 점심 턴. 호구가 손을 비비며 스테이했다. 재민은 일단 스테이했다. 제노는 땁으로 한 장을 바꿨다. 이러면 눈치싸움이었다. 마지막 턴까지 다이가 없었다. 테이블의 판돈은 십만원이 채 안 됐다. 저녁, 호구가 스테이를 외쳤다. 알 듯 말 듯했다. 재민은 하트6을 버렸다. 가져온 건, 스페이드5였다. 스페이드5. A235 메이드해서 세컨드가 떴다. 퍼펙트 다음으로 강력한 패였다. 재민은 멈칫했다. 누군가 고약한 덫을 설계한 것처럼 서서히 승률이 올라가고 있었다. 스테이요. 제노가 읊었다.
“선생님.”
“…….”
“선수지요?”
문득 호구가 이마를 긁으며 물었다. 재민을 노린 질문이었건만 거짓말도 필요없었다. 빗나갔으니까. 재민은 일갈했다. 아니요. 저는 하우스 운영만 다듬습니다. 말단이에요.
“내가 선생님 닮은 선수를 압니다. 눈이 판박이인데.”
“…….”
“그 친구 경찰에 협조하라니까 고마 의리 운운해가꼬 잠수를 탔다 아입니꺼.”
아버지 얘기다. 재민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제노가 턱을 숙였다.
“아깝게시리, 큰 돈 만질 수 있었는데. 나처럼 실리를 따져 살어야지요.”
패가 열렸다.
제노는 족보가 어중간한 베이스였고, 호구는 퍼펙트 메이드였다. A234. 아침부터 쭉 스테이하더니 진작 패를 완성한 거였다. 허. 재민은 한숨을 떨궜다. 완성은 개뿔 수술이었겠지. 독극적인 기술을 쓴 거겠지.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다고 씨발놈 냄새가 나더라니. 지긋지긋했다. 재민이 성의 없이 제 패를 깠다. 동시에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섰다. 영차. 제노가 업혔다. 일 나면 바로 나한테 와. 너 업고 튀게. 재민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르는 모양새였다.
“모가지 신세졌네요. 감사합니다.”
재민은 경멸을 숨기지 않고 인사했다.
“나 씨 생각이 나서 봐 주는 깁니더. 아비 고맙게 여기시소.”
호구가 싱글벙글 말했다. 아니 호구가 아니었다. 개인 단위로 전국의 하우스를 돌아다니며 역호구 설계를 노리는 고인물 타짜였다. 게다가 실리를 운운했으니 수분 내로 단속이 뜰 터였다.
살다 살다 아버지의 덕을 보는 날이 있다고 생각하며 재민은 제노를 고쳐 업었다. 나나, 자리 지켜. 상황을 파악하려는지 건너 테이블에서 총책이 명령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사랑하고 증오하는 한국소나무분재연구소를 뒤로한 채 재민은 성큼성큼 튀었다. 재민, 아, 악. 천, 천 히. 반동이 튕겨 충격이 큰지 등 위의 제노가 켁켁거렸다. 둘은 연등이 달린 점집 하우스를 빠져나오고 정원을 빠져나오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할인마트 근처에 주차해뒀던 승합차로 올라탔다. 멀리서 착각 같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제노가 엉금엉금 조수석으로 옮겨갔다. 재민은 차를 출발시켰다. 마산을 벗어나며 휴대폰을 밟아 부쉈다. 숨을 참고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
김해시 외곽에 접어들고서야 재민은 차를 세웠다. 꿈인가봐. 제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멍하기로는 재민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식구들은 잡혔을까 튀었을까. 호구에게 속은 선수들은. 부산의 본거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오피스텔은 안전한가. 앞으로는 어떻게. 뭘 하면서. 언제까지. 재민은 불현듯 그리고 새삼스레 깨달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제가 계속 도박판에만 머물렀단 사실을. 도박이 없는 통상의 사회를 경험한 시간이 제로인 것이다.
“재민아.”
제노가 불렀다.
“어, 어.”
재민은 엄지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답했다.
“나 사랑해?”
“사랑해.”
“진짜?”
“너 불안하지.”
“…….”
“이리 와 이제노.”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제노가 와락 운전석으로 달려들었다.
재민은 익숙한 불안의 얼굴들을 알고 있다. 질릴 만큼 봐왔다. 하우스를 전전하며 재산을 탕진하는 이들의 얼굴. 물욕의 벼랑에 바짝 매달린 얼굴. 다시 말해 제가 저지른 유희를 감당하지 못하는 무책임의 얼굴들. 그러나 제노는 아니었다. 제노는 무언가를 저지른 적도 없고 유희한 적도 없는데 불안해하는 중이었다. 안쓰러웠다. 재민은 제노를 부둥켜안았다. 기다렸단 듯 제노가 입술을 부딪쳤다. 모종의 점화였다. 다음 순간 둘은 윗입술을 깨물어가며 키스했다. 재민은 제노의 옷을 쉽게 벗겼다. 히터를 켜고 맨살을 매만지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재민아 재민아……. 제노가 낑낑거렸다. 카시트를 젖힌 후 재민은 제노를 눕혀 올라탔다. 눈밑의 점부터 아랫배까지 정성스레 핥으며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쪽, 쪽. 부푼 제노의 성기를 깊숙이 삼켰다. 제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재민의 머리칼을 쥐었다. 어, 마음대로 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참지 마. 재민은 제 손을 제노의 손 위에 얹었다. 맘껏 움직이란 의미였는데 제노가 외려 손을 마주잡았다. 그것만으로 만족한 기색이었다. 하여튼 착해 빠져서 큰일이었다. 재민은 저 알아서 입을 오므렸다. 제노의 성기를 빨고 훑었다.
“아, 어떡해. 재민아 이거…….”
“…….”
“진짜 이거 너무. 너무, 흐으응…….”
오 분을 채우기나 했을까. 절정이 빨랐다. 제노는 제어하지 못하고 재민의 입안에 사정했다. 재민은 물티슈를 찾아 액을 뱉었다. 기진맥진한 제노의 허벅지와 아랫배와 옆구리에 몇 차례 입을 맞췄다. 나두 해줄래. 제노가 재민의 바지춤을 잡았다. 괜찮아 집 가서 하자. 씻고 자고 밥 먹고 하자. 재민은 부드럽게 물러났다. 제노는 수긍했다. 대신 키스가 좀 더 이어졌다.
재민이 라디오를 켰다. 제노는 전라 상태로 야상을 걸쳐 입었다. 아 이제 유혹을 색다르게 하네. 섹시하긴 한데 감기 걸리겠어. 재민이 중얼거리며 야상 점퍼의 지퍼를 올려줬다. 이건 유혹 아니야 재민아. 유혹은 아까 실패했잖아. 네가 집 가서 하자고 거절해서……. 제노는 조곤조곤 받아쳤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미안해. 재민이 얼렀다. 라디오의 노랫소리가 끼어들었다. 둘은 비좁은 운전석에 뭉쳐 앉았다.
“재민아.”
“응.”
“…….”
“…….”
“내기할래?”
“무슨 내기.”
“이긴 사람이 진 사람 소원 들어주는 거.”
제노가 야상 주머니에서 트럼프 카드를 꺼냈다. 연습용 패였다. 목카드인지 아닌지도 알아볼 수 없고 대부분은 굽이굽이 꺾여 있었다.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상황인데 도박을 걸다니 아리송했다. 그러나 재민은 순순히 패를 건네받아 섞었다. 스테키나 격일 같은 진짜배기 기술은 모른다. 정직하게 셔플했다. 바둑이를 할 셈인지 제노가 넉 장을 가져갔다. 재민은 제 패도 넉 장 뽑았다. A56으로 베이스였다. 베팅이 없으니 진행이 빨랐다. 아침, 재민은 땁했다. 잭이 걸렸고 계속 베이스였다. 제노는 투카였다. 점심, 재민은 투카를 돌렸다. A457로 메이드, 7탑이 됐다. 제노는 스테이했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메이드야?”
재민이 말끄러미 물었다.
“퍼펙트.”
제노가 패를 열었다. A234. 아까의 타짜와 마찬가지인 패였다. 이길 수 없는 무적의 족보다. 타짜와 다른 점이라면 제노는 기술을 쓰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제노가 카드들을 긁어모아 뒷좌석으로 던졌다. 나비 떼가 퍼지듯 카드들이 휘날렸다. 재민은 제노의 손을 끌어와 마디마디에 키스했다. 살갗은 지저분했다. 벌써 굳은살이 박인 곳도 있었고 생채기가 덜 아문 곳도 있었다. 패를 쥐는 일이 직업이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속이 쓰렸다.
“소원이 뭐야.”
재민이 말했다.
“들어줄 거야?”
“별 따다 주는 건 제외. 지구에서 가능하면 전부.”
“정말?”
“어 정말.”
제노는 젖은 눈을 하고 있었다. 기저가 불확실한 울음을 삼키는 눈. 물기가 가득했으나 체념한 기운은 아니었다. 재민아 내 소원은. 제노가 입을 뗐다. 너랑 같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더 좋은 일들을 하고 더 많이 먹고 더 오래 자고 죽을 만큼 둘이 살다 그러다 죽는 거.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닮은 말들이 평이하게 쏟아졌다.
재민은 손수 입혔던 제노의 야상 점퍼를 다시 벗겼다. 빈틈없이 안았다. 제노의 맨살은 너무 부드러워서 꼭 싸락눈 같았다. 녹을 듯한 사랑을 사랑하는 일. 찰나처럼 애가 탔다. 재민은 굳이 털어놓지 않았다 제노가 다이밖엔 방법이 없는 말살패를 뽑았어도 소원이든 뭐든 다 들어줬을 거라고. 어 사실 별 따달라 했어도 뚝뚝 따줬을 거다. 재민은 마른 어깨에 뺨을 묻었다. 침묵하던 제노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재민아 근데. 무드 박살내서 미안해 나 배고파. 휴게소 우동 먹고 싶어.
이런 귀여운 이제노야.
승합차가 출발했다. 김해시를 벗어나려 고속도로로 향하며 재민은 차창을 조금 내렸다. 창문 밖 시내가 깨어나고 있었다. 인제대역 건너편의 컨벤션센터가 햇빛에 덧씌워져 주홍색 윤곽을 드러냈다. 어느덧 일출이었다. 초면의 제노를 데리고 강변북로를 지나던 일이 떠올랐다. 고작 한 해 전의 일인데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때의 제노와 제가 어떤 대화를 했었는지 이제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저주받은 집안을 험담하고. 성모병원의 정체구간을 욕하고. 문득 제노가 몸을 떨었다. 야상만 한 장 걸쳤으니 추운 모양이었다. 재민은 얼른 차창을 올렸다. 옷 입어 제노야. 충고하자 제노가 꾸물꾸물 속옷을 찾아 다리를 끼웠다.
도로는 한산했다. 재민은 동김해 IC의 표지판을 흘긋거리며 핸들을 꺾었다. 껍데기들과 잔해들은 잔뜩 흩뜨린 채로 뒤에 뒀다. 탈피한 이제노와 탈피한 나재민만을 챙겼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더 좋은 일들을 하고 더 많이 먹고 더 오래 자고 죽을 만큼 둘이 살기 위해. 제노가 라디오 채널을 바꿨다. 교통정보가 흘러나왔다. 카드패처럼 영영 미지인 나날들을 뒤집어야 했다. 재민은 속력을 높였다.
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