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창부수 (성년의생)
별 내용 없고 일부터 백까지 사랑 타령 밖에 안 합니다. 본편 복습 안 하셔도 되고 이 설정만 기억하시면 돼요. 이민형의 아버지에게 열쇠 먹인 이동혁. 이민형의 살인. 이동혁의 아버지가 하우스 도박장 운영하고 장기 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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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치기는 눈 코 뜰 새 없이 회전된다. 빠른 속도에 정신 놓다 보면 수중에 남아나는 것이 없다. 피와 영혼 팔아도 원상복구 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마작은 다르지. 느리고 느려서 누군갈 교육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동 갑니다. 주사위 굴려요. 남 갑니다. 짝수 나오면 풀어줘요. 서 갑니다. 짝수 나왔네요. 북 갑니다. 마음이 바꼈어요 홀수로.
규칙도 상벌도 엉망인 진행이었다. 그 교육법을 배우려면 게임 한 판의 몇천 배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장장 열아홉 좆고딩이 스물아홉 성인으로 변모하는 십 년의 세월. 서른을 목전에 둔 이동혁은 작패를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의미 없는 손동작이었다. 그리고 개수대 쪽으로 눈짓했다. 곧 작판에 묶인 이에게 물세례가 퍼부어졌다. 상황 인식 된 모양인지 억눌린 발악이 입에 발린 테이프 너머로 쏟아냈다. 인정사정없이 살점 뗄 듯 그것을 떼어냈다. 입구멍이 뚫리자 그새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개새끼야. 건달 주제에 주는 밥이나 처먹을 것이지. 사람 대우 해줬더니 어딜 네가. 내가 봐주고 있던 것만 털면 못해도 징역이야. 평생 안에서 썩게 해줘?
입구멍 또 열면 찢어집니다. 직원 하나가 그 입술 새로 칼등을 물렸다. 이동혁은 그 앞에서 공손하게 조아렸다. 검사님. 못 본 새 신수가 더 훤해진 거 같아요. 예 예. 그러시겠죠. 제 골수 빨아먹고 부장 직함 다셨으니 그럴 만하죠. 그런데 은혜 갚는 건 잊으셨나 봐요. 저희 아버지도 덕분에 고충이 많으시거든요. 죄목이 참 많으세요. 고래 화학이랑 뒤에서 손잡고 당 대표랑 작당해서 그 씹새끼 떡하니 공천시키고 제 영종 신도시에 간척지 사업까지 재 뿌렸는데 빡이 쳐요 안 쳐요. 남의 나와바리에 뭐 하는 짓이에요. 내가 그동안 충성했잖아요. 의리가 없는데 자존심도 없고 정까지 없으면 어떡해요. 검사가 건달보다 양아치면 대한민국은 어떡하냐고. 이런 좆같은 기성세대. 나같이 젊은 애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 징역이라니 무서워 죽겠다. 나한테 왜 법을 써. 법보다 무서운 게 뭐게요. 부장님이 대학만 나왔지 지능은 둔해서 현실 파악 못 하나 본데요. 집으로 멀쩡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막 호락호락한 그런 인간 아닙니다. 헛물도 한두 번 켜지 그랬냐. 맛있는 음식도 첫입이 제일 먹을 만한 거야. 왜 자꾸 되씹으려고 하지. 난 원래 마음 약해서 모진 말 못 하는데 미치것다. 다시 동서남북 갑니다.
이동혁은 좁은 마장방 안을 빙빙 돌며 읊었다. 뇌가 터질 것 같았다. 날려 먹은 것만 해도 건물 몇 채는 세웠다. 되찾아오려면 적지 않은 수고와 인력을 들여야 했다.
이 검사님! 이 검사님!
짜증으로 몸서리쳐지던 와중에 밖까지 소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검사. 낯익은 호칭에 이동혁은 뒤돌아 응시했다. 익숙한 인물이 등장하자 이목이 쏠렸다. 칼 문 부장의 입도 퍼덕댄다. 구세주인가 싶었겠지.
“이동혁 나와.”
하지만 이민형은 다짜고짜 앞으로 나섰다. 판에 묶인 피투성이 몸뚱이의 입에서 칼 꺼낸다. 그 칼로 줄 끊는다. 교육 시간 망치는 짓이었다. 부장은 동아줄 잡은 듯 자유로워진 입으로 외쳤다. 이 검사 같은 사람이 여긴 어떻게 알고 어? 그리고 이민형은 그 몸을 곧바로 바닥으로 밀쳤다. 각 잡고 있던 직원한테서 빠따 빼앗아 부장 검사 몸뚱이에 후려쳤다. 잠시 셔츠 소매 걷어붙이곤 본격적이었다. 또 잠시 시계 풀어 던지곤 또 또 내리쳤다. 답지 않게 도통 자제를 모르는 몸짓이었다.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이민형은 물었다. 새철학 병원 뇌연구 센터장 사건 왜 걷어가셨어요. 왜 그거 불기소?
부장은 멈춰진 폭력에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세상 정의로워 털어도 먼지 안 나올 것 같은 너는 응큼하다고. 애비가 감빵 들락날락한 범죄자 양아치라더니 피 못 속인다고. 쏙 빼닮았다고. 이민형은 크게 한숨 쉬었다. 질린다는 듯 손으로 머리 흩트렸다. 그리고 마작 테이블에서 패 몇 개 쥔다. 부장 옆에 쪼그려 앉아 그 입에 마구 쑤신 건 순간이었다. 단정한 얼굴이 양아치처럼 변해갔다. 절경이었다. 차장님 어떡할까요. 직원의 조용한 목소리에 이동혁은 마작패 툭툭 건드리며 말한다. 짝 안 맞겠어요. 새 패 가져오세요.
“애비 닮아? 아닌데요.”
이민형은 소리쳤다. 제가 누굴 닮았는지 아세요. 고등학교 시험 문제에도 나와요 사자성어. 유유상종. 근묵자흑. 부창부수라 제가 이래요. 사랑하면 닮는댔어.
그래서 그 목구멍에 버거운 패를 더 깊게 쑤셨나. 이민형은 구둣코로 부장의 거품 까뒤집은 입을 뭉갰다. 뱉어. 내가 먹인 거 다시 뱉어. 뱉어 뱉어 뱉어 뱉으라고. 기어코 말끝에 달뜬 숨이 터진다. 그리고 칼같이 요구한다. 이동혁. 수술실로 올려보내. 패값 돌려받아.
“우리 자기. 나이스.”
이동혁이 끄덕이며 박수 쳤다. 이 검사님 나이스. 눈치 보던 직원들이 뒤따라 박수 쳤다. 그러니 단단히 이르는 목소리였다. 여러분은 나이스라고 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이 검사님 나이스 아니십니다. 그렇다고 우리 형이 나이스가 아닌 건 아닌 거죠.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이 검사님 나이스 맞으십니다.
끌려가던 부장을 보던 나이스 이 검사는 문득 물었다. 근데 우리 부장이 왜 여깄어? 제 사업 말아먹을 뻔했거든요. 이민형은 그 말에 치 떨더니 허공에 구둣발로 차댔다.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핏그림자에 애먼 발길질이 겹쳐졌다. 뒤에 서 있던 직원 하나는 중얼댔다. 이 검사님 의외시네. 저런 분이신지 몰랐네.
그러니까 이것이 저녁때의 일이다. 예민해진 이민형은 조수석에 앉았다. 천천히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까만 옆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말했다. 대부도 가서 조개구이 먹고 싶어. 손으로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낸다. 내일 출근은요. 어차피 어두워서 보이는 것도 없을걸요. 괜찮아 볼 풍경도 없고. 그래서 이동혁은 군말 없이 시화 쪽으로 방향 틀었다.
허허벌판인듯 우주진공인듯 망망대해인듯 공허한 한복판. 까만 밤 속에 불 하나 켜진 포차. 목장갑 낀 이동혁은 집게로 조개를 정렬했다. 냉장고에서 소주 내오는 이민형을 보며 물었다. 술 마셔요? 넌 안 돼. 음주운전은 법에 걸려. 검사다운 대답이 돌아온다. 사장님. 여기 소주 하나 추가했어요. 외치는 이동혁의 셔츠 소매가 팔뚝 바짝 말려 올라간다. 이민형은 자작하며 말했다. 이동혁 오늘은 셔츠 입었네. 잘 어울린다. 다 컸어.
“벌써 취했어요? 안 하던 말을 다 하고.”
그것뿐이면 몰라. 이민형은 농익은 추억 팔이 한다. 네가 그런 말을 했더랬지. 옛날 옛적 싸웠던 케케묵은 기억도 꺼내온다. 이제 와서 추궁하고 쪼아댄다. 사건을 왜곡시킨 적도 많다.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며 덧붙이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동혁은 논리정연하게 정확한 제 기억을 탈탈 털어 말하지. 말하지 않는다. 그럴 것 같지만 뚫어져라 바라만 본다. 그럼 이민형은 멋쩍은 눈빛으로 순순히 실토한다. 내가 뻥 좀 쳤어. 이동혁이 다 안다는 듯 굴었다. 나 때문에 화난 적 많다면서요. 사실은 제가 더 형 때문에 그런 적 더 많아요. 그럼 이민형은 또 순순히 대답한다. 알아. 잘 알아.
법보다 위험한 건 이민형이었다. 취기가 끝까지 올랐다. 귀갓길에 핸들 쥔 이동혁에게 계속 이마를 부볐다. 엘레베이터에 오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맞춰오기도 했다. 이동혁은 고개 돌려막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기다려봐요 아 좀. 와 진짜 끈질기네. 그렇게 이동혁은 현관 앞까지 몰아세워졌다. 진득하게 혀로 엉겨 붙는 걸 받아주었다. 문에 기댄 채 도어락을 더듬었다. 패스워드가 몇 번이나 엇나갔다. 겨우 풀어내자마자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부둥켜안았다. 시동만 걸던 키스에 본격적으로 불을 당겼다.
뒤로 넘어간 몸 위로 이동혁이 올라탔다. 이민형은 그 셔츠 단추를 풀려 애썼다. 손이 제멋대로 빗겨나갔다. 그 대신 이동혁은 이민형의 손을 겹쳐 잡아 제 혁대를 풀게 만들었다. 더 꽉 잡아 제 바지 안으로 넣었다. 꿈지럭거리는 손이 느껴졌다. 이민형은 취했는데 또랑또랑하고 반듯하게 눈 빛내지. 술 안 마신 저만 또 눈 풀렸지. 티끌 하나 없는 성자처럼 바라보길래 이동혁은 일부러 종용했다. 제대로 해봐요. 세게 잡아요. 그럼 물어온다. 빨아줄까.
그래서 이민형의 얇은 입술을 엄지 끝으로 문지르다 끌어 앉혔다. 벌어진 두 다리가 이동혁의 등 뒤로 넘어갔다. 껌딱지처럼 붙은 몸과 몸. 그것보다 더 틈 없이 혀가 맞닿았다. 뒤늦게 이동혁은 속삭였다. 안돼요. 빨기는 뭘. 그리고 몇 번 더 짧게 뺨에 쪽쪽대며 허리짓 했다. 묵직해진 밑을 이민형의 가랑이 사이로 비볐다. 이민형은 차가운 바닥을 짚었다. 감각에 흔들렸다. 마찰 되는 감각이 선명했다. 더 느끼고 싶어 힘주었다. 단단했던 눈빛은 무너지고 제 바지 지퍼를 잡으며 졸라댔다. 나 벗을래. 벗을래. 이동혁은 쇼파에 앉아 이민형을 제 앞에 엎어 놓고 속옷까지 통째로 벗겼다. 이민형은 까만 허벅지 위로 올라앉아 이동혁의 머리통 꽉 부여안고 말했다. 들어와. 빨리 들어와.
이 형 미쳤나봐. 이민형의 셔츠 사이로 넣었던 등덜미께의 손을 뺐다. 마디마다 불거진 손가락을 움직였다. 짧은 신음과 함께 이마 떨구는 이민형의 귓가에 숨을 불어 넣었다. 이 짓도 한두 해가 아니지. 누가 보면 징그러울 정도로 파고든 시간을 헤아릴 수도 없다. 긴장하며 떨던 이민형도 이제는 온데간데없다. 그래서 처음 했을 때보다 더 공들이고 더 노력했다. 더 살뜰하게 모셨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랬다. 청개구리처럼 그랬다. 이민형은 이동혁의 허리짓에 박자 맞추며 두 팔로 이동혁의 목을 감싸 안았다. 기분 좋아 웃었다. 곧 찡그리며 침을 삼켰다. 급기야는 흐느끼듯 이동혁의 귓전을 때렸다. 어때요 느껴져? 이거 맞아? 어 어 그걸 말로 해야 아니. 알아서 좀 해봐.
이동혁은 그 말에 박다 말고 웃음 터졌다. 숨까지 헐떡이며 산통 깼다. 이민형은 민망해서 성질냈다. 하지만 곧 그것도 이동혁의 돌발스런 태세 변경에 망가졌다. 쇼파로 아예 처박혔다. 컸던 동작은 잘게 변했다. 이민형은 몸부림치며 무의미한 말을 반복했다. 뭐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동혁은 이민형의 입가에 귀를 더 바짝댔다. 엄마 젖 찾는 애마냥 시끄럽게 신음 질러댔다. 몸을 못 가누고 헐떡이며 이동혁의 머리채를 쥐어뜯듯 붙잡고선 입 다물지 못했다. 아 이 형 앤가요. 애처럼 구시네요. 어 어 나 손 묶어줘. 아니네 완전 어른 다 됐네. 이동혁은 제 넥타이를 붙잡는 이민형의 손을 맞잡아 끌었다. 어디가 좋냐고. 어떻게 좋냐고. 이제 그딴 질문은 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러기만 했다. 형. 형 왜 이렇게 닳았어요. 왜 이렇게 됐어.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놨어요. 어떤 새끼야.
그걸 말로 해야 아니. 이민형이 또 그렇게 대답하면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가열되는 행위를 못 버텨 스파크 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멈추곤 누가 먼저일세라 할 것 없이 또 키스했다. 형 나도 갈 것 같아. 놔봐요. 좀 놔봐. 이동혁이 거친 숨 달고 말하면 이민형은 더 힘을 주고 까만 몸을 꽉 끌어안았다. 놔봐 진짜. 급기야 목소리가 험악해져도 정신 빠져 못 들은 체했다. 아 씨팔. 이동혁의 외마디 욕엔 난감함이 절여있었다. 사정 끝에 동작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몰아 쉬듯 뱉는 숨은 제 것인지 이민형의 것인지 모르겠다. 맞붙은 채 들썩이는 가슴팍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여운에 저릿한 호흡을 고르다가 겨우 눈꺼풀을 올렸다. 이민형의 추하게 벌어진 입과 턱을 쓸었다. 반짝반짝하던 눈알의 총기는 바랜듯 탁해져 있었다. 뒤늦게야 넋 차린 듯 도리질 치다 몇 번 눈을 감았다 떴다. 둘은 작게 속닥댔다. 욕실 갈까요. 방으로 가자.
이런 날이면 이민형은 또 옛이야기를 한다. 침대에 걸터앉은 이동혁을 뒤에서 안은 채 남 이야기처럼 말한다. 역시나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내가 아버지를 죽였어.”
“잘했어.”
칭찬만 십 년째다. 질리지도 않는다. 아버지를 살육한 건 이민형 일생일대의 업적. 그리고 훈장. 그것을 잘 알기에 이동혁은 또 어르고 얼러준다. 잘했어. 똑똑해. 장하다. 밖에는 결코 까발릴 수 없는 이 짓. 자신 아니면 누가 또 칭찬해줄까.
벼랑 끝에서 칼 들고 저 자신을 구한 것은 오로지 이민형. 스스로가 만든 저 자신을 위한 역사. 조금만 더 참으면 도망칠 수도 있었어. 조금만 더 참으면 모든 시절을 잊을 수 있었어. 하지만 은혜는 두 배로 복수는 백 배로. 어떤 멍청한 새끼가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고 말해? 억압받으며 살아왔던 제 과거를 잊게 하는 건 결국 돌파구 찾은 현재의 자기 자신이었다. 날 엉망으로 만든 것들은 다 죽어. 숨도 쉬지 마. 광기를 깨워라 광기를 죽여라.
그리고 복수심을 깨운 이는 이동혁. 칼로 찍어 박았을 때 처절한 광경을 청소한 이도 이동혁. 이동혁은 단지 물꼬 트고 길 닦았을 뿐이다. 이민형은 말한다. 실행은 내가 해. 그것이 한순간의 충동이어도 내가 해. 허물어진 벽처럼 제 인생의 망가진 부분을 아예 개박살내는 순간. 발악이 휘몰아치던 순간. 새 세상이 열렸고 느꼈다. 진정되지 않는 숨 속에서 느꼈다. 없네. 날 갈취하고 괴롭게 만들 던 것이 죽었네. 그 파멸이 설령 제게 더 큰 파멸로 몰아친대도 그것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통쾌해서 이동혁을 안으며 느꼈다. 내일 없이 산다는 게 이거구나. 버티지 않고 저지른다는 게 이거구나.
이동혁은 불그죽죽해진 이불을 빨았었다. 이민형은 그 땀 맺힌 콧등을 혀로 빨았었다. 방 안의 식어버린 육신에겐 뽑아 먹을 만한 장기가 그다지 없었다. 심장은 멈춘 지 오래였다. 모두 엉망진창 됐는데 어떡해. 이민형의 애비 새끼가 돈 갚을 기미 없으면 뺑소니를 치든 집에 불을 지르든 목숨값 받아내려고 했지. 그런데 아들 새끼가 직접 칼을 빼 들었으니 생명 보험금 딱지는 내밀 수도 없었다. 이동혁은 그 몫까지 뽕 뽑을 듯 이민형의 목에 코 박았다.
‘대부도 낙지 맛있어?’
‘글쎄요. 먹는 맛이 아니라 잡는 맛이라.’
토막 난 낙지 마냥 신경만 살아있는 듯 부드드 떠는 이민형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곧 이동혁이 불렀던 직원이 들이닥쳤다. 숨통 끊겼네요. 수술실 데려가긴 글렀는데요. 이동혁은 그래도 큰 가방에 사체를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그 짐덩어리를 싣고 해안 도로를 달렸다. 이민형은 제 옆의 큰 가방에 몸이 낑긴 채로 무수한 송전탑을 바라봤다. 저 너머 공단에서 내뿜는 연기 자락도 보았다. 그리고 바로 눈앞의 나이키 스포츠 양말. 이동혁은 조수석 시트에 푹 파묻혔다. 폰 두드리다 문득 말했다. 불편하죠. 조금만 참아요. 밀물 차기 전에 가야 해서.
갯벌이 트였다. 밤낚시 하던 야영 무리가 있는 곳을 조금 지나자 인적과 가로등 하나 없는 길가였다. 빨간 노끈이 이곳저곳 뻘 위로 경계선 치고 있었다. 사유지였다. 명의는 이동혁의 아버지였다. 곧 시멘트가 부어지고 철근을 박기로 했었다. 몇 년 뒤 허허벌판 공항 도시에 카지노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시기 맞춰 풀빌라를 건축할 예정이었다. 말이 풀빌라지. 뫼셔야 고객분들. 미친 짓 하면 그곳에 전부 은폐할 목적이었다. 이동혁은 순진한 이민형에게 그것을 굳이 말하진 않았다. 그냥 기념 차 알렸다. 형이 제 첫 손님이에요.
구멍이 송송난 바닷돌을 밟아 내려갔다. 직원이 꽉 차 있는 트렁크에서 삽을 꺼냈다. 이민형은 바위에 엉덩이 걸친 채 멀리서 삽질하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깊이 팠다. 때마다 들어차는 바닷물도 어찌할 수 없을만큼 파묻었다.
아버지. 낙지의 먹이라도 되세요. 쓸모없이 살았던 세월을 그렇게 갚으세요. 이승에 두고 간 빚이 어디 제게만 있으시겠어요. 그 짐마저 모두 내 등에 지우시겠지만 그러셔야만 해요. 제 생을 위해. 제가 아버지란 족쇄와 망령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제 생을 위해.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전 잘 살아야만 해요. 이해찬이랑. 이동혁이랑. 그 이름이 무엇이든 내 자기랑.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한다. 이런 날이면 이민형은 과거를 들쑤시곤 해. 침대 위의 서로가 너무 은밀해서. 마치 한 뱃속에서 태어나 같은 생시를 누리는 듯 밀착돼서. 그래서 제 치부를 쏟아내곤 해.
이동혁은 귀찮은 게 많은 성정이다. 제 할 일 필요 이상으로 관심 갖지 않는다. 그런데 애매한 것은 또 싫어한다. 그래서 한번 시작하면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다. 맡은 일이 뒤탈 없고 완벽해질 때까지 가혹하게 쥐어짰다. 아침에 잘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밤새고 뜨뜻한 밥을 먹고 쉴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공들여야 할 것엔 날 갈아 넣고 끝을 봐야 했다.
그래서 연애도 어설프지 말아야 했다. 지구가 두 쪽 나도 온몸이 찢어져라 확인해야했다. 첫 승리 때 딱 한 번 큰돈 만졌던 맛을 잃지 못해 연이어 계속되는 쪽박에도 목 내놓고 전부를 거는 멍청이들 마냥 이동혁은 이민형을 향해 몸을 굴렸다. 연구원 혹은 관찰자처럼 탐색하려 들었다.
이민형은 그런 이동혁의 눈빛이 재수 없었다. 결코 편안하지가 않았다. 느끼하거나 흉흉한 것과는 달랐다.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해 한두 개쯤은 들키고 싶지 않은 걸 가슴에 품기 마련인데 이동혁은 예리하고 눈치 빨랐다. 모든 걸 쉽게 들춰낼 것 같았다. 으레 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불만족스럽고 찝찝한 얼굴로 저를 내려 보는 이동혁의 눈. 곧 반바퀴 구르며 옆으로 안착한다. 천장을 바라본다. 이민형은 그것이 신경 쓰여 벌떡 일어나 팬티 하나 주워 입었다. 거울 앞에서 호흡기도 들었다. 추하게 콧구멍 한쪽에 끼워 딸각였다.
몇 달 전 남동공단 화학 공장에 들락날락이며 생긴 병이었다. 우리 검사님 자중 좀 하시래도 기어코 현장까지 갔더랬지. 공장에선 온갖 약 냄새가 났었다. 이민형은 어둠 속에 차 안에서 외로이 쏟아지는 업무를 처리했었다. 새벽이 깊어질 때서야 썬팅 된 차창을 누군가가 똑똑댔다. 쫄아서 헤드라이트를 번쩍 키고 차창을 손톱만큼 내렸다. 저기요 공무원씨. 이동혁은 이십사시간 편의점에서 사 들고 온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흔들었다.
계란이랑 케찹이랑 머스타드가 같이 있어. 예 알아요 알아. 살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어요. 이동혁은 그 말에 샌드위치를 해체해 싹싹 소스 분리 시켰었다. 이민형은 자꾸 한 입 먹을 때마다 헥헥 댔다. 비염도 아닌 것이 축농증도 아닌 것이 코를 갑갑하게 메워왔다. 그리고 문득 말했다. 가야겠다. 샌드위치를 내려두고 서류를 뒤로 넘겼다. 왜요. 하도 고집부려서 내가 직접 온 건데요. 이민형은 시동은 걸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요기 있으면 너 코 이상해져.
이민형은 그 뒤로 꼬박꼬박 콧구멍에 쑤셔 넣는다. 또 병원 안 갔죠. 답답하다는 듯한 질문이 들려온다. 거울 속으로 돌아누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역시나 저 불만족스러운 얼굴. 곧은 이민형의 시선은 아래로 떨궈진다. 기어코 물었다. 왜 그렇게 목마른 표정을 해? 내가 언제요. 지금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잖어.
사실 이민형은 옛날 옛적에도 물었더랬다. 처음에는 눈치 봤다. 별로였어? 몇 해 먹었을 때는 억지 부렸다. 별로면 하지 마. 이동혁은 그때만은 탄산 다 빠진 목소리로 늘어져서 중얼댔다. 그렇다고 절대 김샌 목소리는 아니었다. 우리 민형이 또 투정 부리네. 아빠가 우유 줄까? 이민형은 그 쌍스럽고 돼먹지 못한 포르노적 말에 이동혁의 등짝을 두들겨 팼다. 이동혁은 까르르르 목청껏 웃어제끼며 순진하게 구는 이민형을 감싸 안았다. 못 볼 꼴 다 보며 살았는데 순진은 무슨.
그때 발령 처음으로 큰 건을 맡고 있었다. 아동 학대로 점철된 극악무도의 사건이었다. 뉴스가 떠들썩했다. 이민형은 증인석에 앉을 고등학생을 앞에 두고 조심스러운 나날을 반복하고 있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하루하루였다. 그 무렵 이민형은 제 위로 올라탄 이동혁과 눈을 마주치면서도 엉겁결에 불렀다. 형. 재현이형.
“이딴 식으로 나오네.”
말라붙은 싸늘한 분위기였다. 실수라고 솔직히 말해도 더 꼬일 것 같았다.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어 고개만 꺼덕였다. 이동혁은 되레 더 당황해서 달랬다. 뒤로 정재현과 만나는 것도 알면서. 가끔씩 점심 약속 잡고 이것저것 먹고 오는 것도 알면서. 그걸 제 카드로 긁어 폰에 결제 알림이 뜨는 것도 뻔히 알면서. 다 알면서 저열한 속내를 긁어가며 지랄할 수가 없었다.
이민형은 아직도 정재현에게 제 지난날의 뒷편을 꺼내지 않는다. 스티커를 더 달라며 떼쓰고 싶었던 그 소망. 가끔씩 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무언가 하나라도 더 얹어주려 하던 정재현을 향한 감사 그리고 원망. 형의 이름이 나왔던 것은 내내 누르고 살았던 어떤 감정의 찌꺼기였을 뿐이었다고 저속하고 끈적하게 구는 이동혁 앞에 드러낼 수 없었다. 이민형은 머저리 등신처럼 자신을 안고 달래주는 이동혁을 보며 물었다. 동혁이 너는 내 아빠지? 끄덕여도 또 확인했다. 동혁이 너는 내 아빠지. 이동혁은 제가 던졌던 작고 드러운 농담질이 이민형에겐 큰 파장으로 닿은 것을 깨달았다. 그 호칭. 그 관계. 그 핏줄. 그 끈끈한 정의를 우리는 다시 재정립해야 해. 그래서 또 한 번 장난스레 말했다. 내 새끼. 아빠 이름을 막 부르고 버릇이 없네. 잘못 키웠네.
근데 왜 때렸어요? 부장 새끼 처맞는데 내 뼈가 다 아팠어요. 이동혁은 물었다. 아직까지 패 먹이던 간악한 표정이 생생했다. 부창부수. 허투루 살 비비며 살진 않았는지 그간 이동혁에게 배운 것도 참 많은 이민형. 넋 나가 녹초 된 몸 이끌고 겨우 핸드폰을 잡았다. 왜 그렇게 사람을 쥐어팼냐니까요. 그 새끼가 형 괴롭혔어? 이동혁은 이민형의 땀에 젖은 등 위로 짓눌러 올라타며 집요하게 캐물었다. 이민형은 망설이다 말했다. 내가 우겨서 맡았던 사건이 있는데 부장이 뺏어갔어. 무혐의 떴더라. 근데 그럼 안 되거든.
“내가 누나를 만났었거든.”
민형아 잠깐만. 손 놔요 놔요. 내 말 좀 들어줘. 누나가 왜 이동혁 돈을 받아요? 나도 내 인생 살려고 그랬어. 불과 한 달 전에 누나가 일터까지 찾아왔었다. 행색이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누가 봐도 평범하고 튀지 않는 차림새였다. 이민형은 뿌리치면서도 속으로는 안도했다. 그 마음에 부응하듯 누나는 말했다. 덕분에 잘살고 있어. 정말이야. 가을에 결혼도 해. 시부모님이 나 딸같이 예뻐해주셔.
그런데 왜 나한테 왔어요? 내가 아끼는 동생이 죽었대. 어쩌라고요. 우리가 쩜오에서 만난 사이거든. 가지가지 하네 정말. 미안해 근데 너 꼭…….
누나는 말을 잇지 않았다. 이동혁을 닮았구나. 방금 묘하게 말투가 그랬어. 하마터면 그 이름을 꺼낼 뻔했다. 하지만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애원한다. 민형아.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진짜 좋은 애였어. 나랑 가게 낸다고 열심히 돈 모으고 손 떼기 딱 그 직전이었는데 같이 가게 알아보러 다니고 근데 걔가 자살했다는데 걔는 진짜 그럴 애가 아니거든 죽기 전날만 해도 나랑 같이 병원도 가주고 아 누나가 사실은 지금 뱃속에 애기가 생겼어 두 달 됐어 아니 아무튼 아니 그러니까 거기 애들이 자살이 아니라고 그날 새철학 병원 의사들이 왔었는데 그중 하나가 그렇게 걜 가만 안 두더래 걔가 숨을 못 쉬더래 걔가 원래 천식이 있었어 그래서 죽겠다고 토를 하고 그랬는데 그 새끼들이 의산데 사람을 어? 걔가 그 뒤로 못 일어났는데 같이 있던 의사들은 말리지도 않았고 지금 그 의사는 경찰이 그냥 돌려보내고 근데 그 의사 장인이 무슨 그 병원 이사장인데 무슨 되게 무서운 사람들 보내서……….
이민형은 횡설수설한 말마디를 끊고 벤치에 누나를 앉혔다. 진정해요. 애한테 안 좋아요. 결국 쪼그려 앉아 쏟아질 듯한 몸을 꽉 안아 두드렸다. 민형아. 나 이거 우리 자기한테도 말 못 해. 내 출신 들킬까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내가 염치없는 거 아는데 너는. 너는 나랑 다르게 똑똑하니까. 검사면 훌륭한 거잖아. 막 나쁜 사람들 때려잡을 수 있잖아 어? 누나는 사실 임신한 뒤로 네 생각 매일 해. 더 많이 해. 우리 애도 너처럼 잘 자랐으면 좋겠어서.
찾아올 때마다 이런 식이었다. 겉모습만 말짱했다. 속은 썩어 문드러져 편한 소린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이민형은 속으로 진실을 삼킨다. 누가 잘 자라. 내가 잘 자라? 잘 자라긴요. 누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이동혁은 그 사연에 얼이 빠져 힐난한다.
“형이 왜 그 년 걱정을 해.”
“너는 왜 누나한테 돈 줬어. 돈 많다고 돈 막 쓸래.”
어 그럴 건데? 또 형 찾아올까봐 그랬죠. 그 미친년이 사람 됐는 줄 알아? 사람은 고쳐 써먹는 거 아니에요. 검사질 하는데 도움 안 되는 파리 새끼 꼬이게 하지 마요. 나는 나중에 형 나이 들면 부장 자리에도 앉혀줄 수 있지만 그 년은 죽을 때까지 과거 팔면서 형 골수 빨아먹을 년이야. 됐어요. 같은 주제로 같은 싸움 반복하는 거 지긋지긋해.
이동혁은 몇 년 전에도 비슷한 말 했었다. 이민형이 검사되면 뒷바라지해줄 거라고. 쓸모없는 것들 동정하지도 말라고. 그리 외치더니 뒤에서는 누나를 대학까지 몰래 보내놨더라. 이동혁은 그때 말했었다. 그 년 공부하는 형 신경 쓰이게 했는데 어쩌라고.
“아무튼 그래서 부장님 때렸어.”
그 새낀 때 되면 알아서 처분할 거예요.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물증 캘 때까지만 구슬렸다가. 사는 거 존나 드럽고 잔인해. 성미 안 맞고 존나 스트레스 받아. 이동혁은 눈 감은 채 남 앞에선 결코 드러내지 않는 속마음을 꺼낸다. 차라리 그편이 애 같은 얼굴에 더 잘 어울렸다. 이민형은 말했다. 그럼 부장이랑 했던 거래들 나한테 넘겨라. 내가 도와줄게. 그러라고 네 아버지도 나 네 옆에 두는 거잖어. 검사 덕 보라고. 일종의 위로였다. 그런데 이동혁의 반응은 이따위였다. 미쳤어요? 미쳤네 진짜. 기름 붓지 말고 씻기나 해요. 동네 구멍가게 장사인 줄 알아. 자칫하단 형 좆 돼요. 옷 벗을 수도 있어.
“내가 무능력해서 그래?”
“또 또 헛소리한다.”
형한테 안 맞는 일이에요. 형이 돈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있는데. 하던대로 선량한 시민이나 도와주면서나 살아요. 누군가한텐 형이 신이니까. 뭣 같은 일에 얽혀서 팔자 꼬지 말고.
이민형은 퉁퉁한 낯을 한다. 곧바로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찌그러져 앉아 옆에 쌓아둔 서류 한 장을 곧장 꺼냈다. 당연히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런데도 괜히 가방을 갖고 와선 마구 뒤져댔다. 그러다가 못 참겠다는 듯 억지 썼다. 가방 내놔. 새로 사준다며. 얘는 못 써먹겠어. 이동혁은 그 투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맡겨 놨나. 어이없네 저 어리광.
이민형은 제 수준으로 못 사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바닥도 쳐보고 좋은 것도 만져보고 결핍도 있었고 누려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잠자리에선 쓸데없는 자존심 따윈 내세우지 않았다. 같이 쇼핑을 가자고 말하곤 했다. 꼭 첩질의 베갯머리 송사처럼 무언가를 기대하는 목소리였다. 싫은데요? 괜히 튕겨오면 해줄 걸 알면서도 등에 늘어 붙어 졸라댔다. 아 왜. 아 왜 동혁아. 이동혁은 그런 형이 좀 웃겼다. 매번 품절로 디스플레이도 빼버린 상품을 굳이 묻던 이민형. 재고가 없다는 소식에 아쉬워하던 이민형. 어쩔 수 없이 구두나 깔짝대며 불퉁하게 신어보던 이민형. 탐욕스럽긴커녕 백원이 모자라 먹고 싶은 사탕을 못 사는 어린아이 같던 이민형. 솔직히 말해 봐. 사실은 새 물건엔 관심 없지. 정말 갖고 싶었으면 품절 되기 전에 예약 걸어달라고 했을 거 아냐. 하지만 이동혁은 속내를 숨기고 말하곤 했다. 이번 주에 출국하니까 찾아볼게요. 인기 많대 없을걸? 만들어서라도 가져올 거니까 잡생각 하지 말고 다른 거나 골라요. 그리고 형은 솔직히 내가 어디까지 어떻게 해줄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은 거잖아요.
지금 또 또 이러지. 이민형은 계속 눈에 뵈지도 않은 서류만 보며 지껄인다. 그건 가죽이 진짜 마음에 들어. 생긴 것도 그냥 네모가 아니야. 버튼이 딱 내가 원하는 곳에 달렸어. 촌스럽지 않고. 박음질은 천 년이 지나도 멀쩡할 것 같거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있어. 네가 사준 셔츠랑 잘 어울릴 거야.
다른 것은 모르겠고 마지막 문장이 그냥 화룡점정이네. 이동혁은 아무 대꾸 없었다. 그냥 밑에 떨어진 바지 주머니에서 키 하나 꺼내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은 이민형이 뭐냐는 듯 바라보았다.
“형이 원하는 거 차 안에 있어요.”
“무슨 차?”
“가방에 제일 잘 어울리는 포장지.”
“……….”
“커플링은 싫다면서요.”
“돈이 썩어났네.”
“그래서 싫어?”
“아니.”
“출근용으로 맞췄어요. 공직자가 외제차 끌면 눈치 보인다며. 선배들은 그랜저에 아반떼 끈다며. 형 껀 이번에 풀체인지한 제네시스야. 씹압살이다 진짜. 이제 다들 형만 본다. 부러워 뒤진다.”
“제네시스라니 어뜩하냐. 이건 백퍼 감찰감이네. 그리고 커플카? 너한테 제네시스 안 어울려.”
“네. 상관없어요.”
“……….”
“근데 새 거 사면 신고식 하잖아요.”
“오후에 재판 있으니까 저녁때 와. 나도 차에서 해보고 싶었어.”
“드라이빙하잔 말이었는데요.”
“……….”
“……….”
“나도거든.”
“형은 왜 이렇게 웃겨?”
“………….”
“나 형 좋아.”
이런 애정 표현에 약했다. 제가 했던 억지스런 어리광이 철없고 민망했다. 스트레스 받는다는 이동혁에게 더 스트레스를 가중시킨 짓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차키는 가방에 냉큼 챙기지.
세월.
가만히 숨만 쉬어도 흐르는 그것. 만물에게 공평한 그것. 그 별 게 아닌 것이 ‘이동혁’ 과 ‘이민형’. 아니 ‘이동혁과 이민형’에게만 왜 이토록 특별한데? 얼마나 대단하기에 유난들 떠는데? 그리 폄하 하기엔 너무나도 확실한 답이 존재했다. 밑바닥 볼 만치 봤기 때문이리라.
이만치 함께 시간을 보냈으면 질릴 만도 하겠지.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갈 것 없어 우물 파는 심정일 만도 하겠지. 흥미가 가뭄처럼 마를 만도 하겠지. 하지만 이동혁은 이민형의 밑바닥을 봤다. 철야로 퀭해진 눈가. 자고 일어나면 끼어있는 마른 눈곱. 조깅 후 풍기는 땀냄새. 뺨에 붙은 줄도 모른 채 달고 있는 밥풀. 그리고 이민형의 살인. 칼 쥔 채 주체 못 하던 공포와 그 이면의 환희마저 목도했다. 은폐했다. 칭찬했다.
그뿐이야. 허구한 날 싸웠다. 티격태격이 아니라 진절머리나게 싸웠다. 싸울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사는 방식이 달랐으니 당연했다. 그런데도 그 방식을 서로가 가장 많이 알기 때문에 붙어먹었다. 그러니까 그 밑바닥. 싸우면 으레 밑바닥은 까발려지기 마련이었다. 둘은 못 볼 꼴 다 드러내고 핏대 세웠다. 마음 풀고 화해하며 자존심 내려두기도 했다. 그렇게 남은 가늠 못 하는 서로의 모습을 들춰대며 길들여갔다.
싸움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이동혁이었다. 이민형이 분노할 때 드러내는 날카로운 표정. 선한 사람치곤 치졸하고 야비해지는 순간. 그 모든 것을 파헤치고 익혔기에 이민형의 당연하고 익숙한 매 순간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재밌었다. 우월감도 느꼈다. 네들이 뭘 알아. 네들이 형을 알아? 형이 이 검사가 되기까지의 처절한 십 년의 과정. 그걸 다 읊자면 세월 다 씹어 먹어도 부족했다. 겜블링하는 늙은 노친네들 잘 나가던 왕년 얘기하듯 구구절절 할 말 많았다.
육 년? 십 년? 육백 년? 암만 시간을 비벼봐라. 둘은 함께 천년을 지낸 듯 감정의 폭도 스펙트럼도 차원이 달랐다. 막연한 두려움. 까끌까끌한 기분. 팽팽한 긴장감. 때리고 꼬집고 싶은 미움. 너무 달라붙고 따라와서 떼어놓고 싶은 귀찮음. 어리광부릴 수 있는 편안함. 사흘 내리 안 씻고 피곤에 찌들어도 삼키고 싶은 욕정. 내가 어떻게 되든 네가 알아서 해주겠거니 싶은 믿음.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뿌듯함. 조심하진 않아도 숨기진 않은 솔직함. 그 반짝이진 않아도 마모시키지 않아 순수하디 순수한 감정의 결정체. 둘이 밟아온 감정의 역사. 역사가 축적되다 못해 즙이 난무하게 쏟아졌다.
세월이 무슨 김장 소스인가. 바른다고 배추 포기에 다 스며들게. 감정의 역사가 있어야 세월 세월 세월 세월 타령도 할 수 있기 마련이다. 미래를 기대하고 현재를 즐길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이동혁과 이민형은 둘이 함께 만든 밑바닥의 세월을 충실히 먹고 자랐다. 그러니 그래. 어디 한 번 세상 모든 관계가 이곳에 비벼봐라. 부러워서 망하라고 저주를 내리고 염불을 외워봐라. 이 끈적끈적한 관계가 멸망해도 잔상과 흔적은 뚜렷이 남아 이동혁과 이민형을 괴롭힐 테니 그리워 죽게 할 테니 이만큼 자극적인 게 없었다며 평생을 목타게 만들 테니.
동혁아. 너 때문에 다 망했어.
그런데도 이민형은 불현듯 이동혁을 원망하곤 하지. 약수터 가쟀더니 귀찮다며 미적거려서. 데이트 때 이동혁이 고른 영화가 재미없어서. 멜론 비밀번호 까먹어서 문자 날렸더니 한 시간 만에 답장을 해와서. 사유도 갖가지였다. 파리똥만큼 사소하고 쪼잔했다. 이민형은 더 이상 칭찬 스티커 한 개 더 받자고 애쓰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전전긍긍하지도 않았다. 이동혁 앞에선 그런 것 하나 소용없었다. 그리고 이동혁은 그 말도 안 되는 짜증엔 그냥 예 예 예 대답하며 살았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했다. 이민형이 진심으로. 그것도 결코 사소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원망한다면 예 예 예 따위는 못 할 거라고. 아닌데요 아닌데요 아닌데요 제 탓일 리 없어요 제 탓 아니라고 해주세요 제 탓이면 저 죽어요 근데 죽기 싫으니까 제가 더 잘할게요. 그냥 이런 말이나 지껄일 거라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처럼 이민형에게 용서를 구걸할 거라고.
이동혁은 관계가 끝나면 이민형에게 밥을 해 먹인다. 집밥 집밥 집밥. 반찬 한 가지만 해도 다듬어야 할 재료. 불필요한 설거지거리. 불쾌한 잡내. 귀찮은 노동과 낭비되는 시간. 이인 가구치곤 비효율적인 짓. 그런데 한평생 뜨신 밥 처먹고 자랐어도 그놈의 집밥에 목매는 징그러운 새끼들이 있다더라. 이동혁은 그걸 알면서도 한다. 귀찮아도 한다. 기억 뜯어 먹고 살아가는 동물이 인간이라잖아. 인간 이민형이 죽기 전에 괜찮은 삶이었다고 추억을 되새김질했으면 좋겠어서 한다.
늘 그렇듯이 형의 결핍은 자신이 풀어야 할 숙제. 아빠라는 한 마디에도 달리는 그림자를 따라잡듯 발밑에 엉겨 붙은 지난날을 추적하는 이민형을 위하여. 이민형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하여.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을 마구 쏟아내기 위하여. 이민형 위에서 불만족스럽게 긁어가며 퍼붓느라 다 갈라진 목소리로 콧노래 부른다. 쌀 씻는다.
날 왜 사랑해? 그 뒤에서 이민형은 뻔뻔하게 물었다. 이동혁은 그냥 웃는다. 이유는 선명하다. 이동혁은 자생하는 것을 좋아한다. 꿋꿋해서 오히려 제 손길로 영양분 주고 가지치기해주고 싶어도 번번이 거절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한다. 원하는 만큼 해주지 못해서 시비 걸게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싸움 한 번을 해도 돌아서면 잊게 만드는 것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이민형의 생명력을 좋아한다. 느끼할까봐 앞에서는 못하는 말이다.
“날 왜 사랑해?”
“쏘 쎅씨. 쏘 핸썸.”
그래서 더 느끼한 말로 공갈친다. 세상에 영원한 사랑은 없다지만 죽을 때까지 끊을 수 없는 관심은 있다. 이동혁은 첫 순간부터 깨달았다. 그리고 살면서 또 깨달았다. 이만한 생명력을 두 번 다신 찾아낼 수 없을 거라고.
애비 묻고 왔답니다.
이동혁은 아직도 그 날을 잊지 못했다. 이민형의 과거를 진흙 속에 유기하고 돌아왔던 그 새벽. 제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눈 한 번 꿈뻑하지 않았던 형. 하기야 고개 빳빳이 쳐들지 못할 게 어딨어. 이렇게 장한 짓만 골라 했는데.
아버지는 이민형에게 물었다. 빚이 얼마나 남았는진 알고? 이민형은 꼿꼿하게 맹세했다. 제가 갚아야 한다면 해결할게요. 애석한 소리였다. 뭣도 없는 널 어떻게 믿고?
믿으세요. 전 준비됐어요. 이민형은 깨져있는 화분 조각을 집었다. 삼키려는 걸 황급히 말렸다. 누구한테 배웠는지는 몰라도 응용 한 번 무서웠다. 이동혁의 아버지는 허공에 골프채 휘두르며 말했다. 눈빛 한 번 성깔 있네. 마음에 드네.
그래도 사는 데 너무 진 빼지마. 도축장 가봤냐? 소 돼지들 다 발악하고 있어. 넌 지금 딱 그 눈빛이야. 편해져라. 휘어지는 갈대처럼.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흐르듯이. 이쯤 되면 살기 위해 사는 것도 관둘 때 되지 않았니. 아들아.
이동혁의 아버지는 이민형더러 아들이라 불렀다. 애비 묻고 왔으니 애비 하나 더 들여야지. 이 애비는 똑똑한 노력파를 좋아해요. 그야말로 당신에게 가성비 죽이는 인재가 되란 뜻이었다.
아들이요? 아들끼리 떡 치는 집이 세상에 어딨어요. 전 근친 야동 같은 거 딱 질색이거든요. 이동혁은 아버지의 뒤를 따르며 종알댔다. 아버지는 방문을 잠그고 곧바로 이동혁의 뺨을 후려쳤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닌텐도로 등도 쳤다.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더럽게 아파서 쇼파로 처박힐 수밖에 없었다. 오냐오냐 길렀더니. 소리 죽여. 누가 죽여오랬어? 써먹고 죽여야 할 거 아니야. 그것도 모자라서 어디 거지 같은 새끼를 데려왔어. 저 새끼 감시할 거야.
‘맘에 든다면서요. 아 아빠아.’
공사치는 새끼 한 둘이야? 너도 적당히 놀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뵈는 건 없어서. 저렇게 순진하게 극단적인 새끼는 나중에 꼭 사고 쳐요. 어디서 한 마디를 안 지고 바락바락 대들어 대들기는. 지 애비 닮을 거면 좀 멍청하게 닮던가. 그 격노하는 면전에 이동혁은 대꾸하고 싶었다. 안 닮았는데요. 형한테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형은 형을 닮았어요.
그 후 이민형은 하고 있던 알바를 관두었다. 대학에 합격하고 봄이 돼서야 용돈을 벌었다. 철골이 드러났지만 공사가 중단된 창고를 지켰다. 이동혁의 아버지가 새롭게 물어준 자리였다. 거저 얻는 게 성미에 안 맞으면 일하는 만큼 얻어가래서 또 성실하게 굴었다. 벽이 없는 복도 계단 앞에 철제 책상 달랑 하나 놓고 시험공부와 과제를 했다. 허물어진 공간과 여백은 이민형에 어울리는 옷이었다.
이민형은 그곳에서 상추와 케일을 키웠다. 기승인 미세 먼지. 지게차와 로다차가 왔다 갔다 하는 먼지 구덩이. 그 속에서 싹틔우고 자라나는 모든 과정이 생산적이라고 여겼다. 겨울이 오자 입김 불며 드럼통 화로에 구운 고구마도 까먹었다. 그러다 보면 손님들이 찾아왔다. 위층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짜장면 배달이 오면 법인 카드로 계산해서 위까지 들고 올라갔다. 거구들 틈 사이에 끼어 면발을 쭉쭉 먹다가 그 바닥의 온갖 얘기를 주워들었다. 행운 가구 소식 들었냐? 인천항에서 매물 잡은 거 싹 다 털렸단다. 쇼파 찢으니까 히로뽕이 아주 그냥. 고 검사가 행운한테 손 털어서 그렇다잖어. 그 집 첫째 맛 가서 고 검사 족쳤다대. 첫째면 그 바깥아들이요? 그렇지 남자가 큰일 하는데 씨가 중요하지 배가 중요하냐 안 그러냐. 아니 근데 야. 야 너.
‘저요?’
그래 너. 고춧가루 좀 갖고 와 너는 인마. 애가 왜 이렇게 센스가 없냐. 험악한 닦달에 동그란 눈만 굴리던 이민형은 잽싸게 젓가락을 내려두었다. 탕비실로 들어가 빨간 가루 양념통을 챙겼다. 추석 특집으로 해주던 조폭 영화에서나 오갈 법한 대화가 끊임없이 흘렀다. 아니 그럼 그 집 사업은 첫째가 가지 치겠네. 둘째는 눈깔 병신 됐담서요. 봉사 맞죠. 그때 가십을 뚫고 말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누가 봉사가 돼요?’
‘차장님 오셨어요.’
이민형은 문밖으로 넙죽 인사하는 무리를 보았다. 만년 차장. 추리닝 입은 이동혁이 하품하며 상석에 구겨 앉았다. 행운 가구 작은 아들이요. 눈이 아작났다 아닙니까.
그런데 왜 우리한테 컨택 안 한대. 여기 널린 게 눈깔인데. 없는 게 없어요 아주 다 팔아 씨발 진짜.
우리 차장님 출장 다녀오시느라 힘드신가 보다. 고생하셨어요. 팀장은 예민해 보이는 이동혁의 어깨를 주무르며 야부리 털었다. 이민형은 사무실 구석에서 열심히 오이를 잘랐다. 암 것도 모르고 깍둑썰기를 하는 바람에 팀장에게 대가리를 맞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얇게 슬라이드 쳐서 그릇에 넣었다. 이민형은 그때부터 팀장이 싫었다.
이동혁은 팀장의 무릎 베고 누워 오이팩을 받았다. 손으로는 무신사 쇼핑 하다 이민형 좀 데려오라고 시켰다. 팀장은 어쩌면 좋냐며 대갈빡이 빠개질정도로 아연실색 되어 이민형을 갈궜다. 야 인마. 오이를 씨발. 너 이 씨발 그렇게 자르면 어떡하냐. 울 차장님 피부 개꿀이란 말이야. 너 때문에 푸석해지시면 넌 네 살점으로 팩 할 줄 알어 새끼야.
하지만 이동혁은 오이 슬라이드 떨구며 이민형에게 물었다. 이 모자 이쁘죠? 이민형은 공손하게 존댓말로 대답했다.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자신의 상사격인 팀장도 이동혁에게 존댓말을 쓰니 저도 존댓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이동혁은 핸드폰을 이민형의 얼굴 옆에 갖다 댄 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맞네 잘 어울리네. 그렇게 대꾸하며 장바구니에 넣었다.
이동혁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 쇼파에서 이민형을 껴안으며 물었더랬다. 왜 극존칭을 써요. 조선시대 부부 같아요. 이민형은 대답했다. 회사잖아. 내가 널 편하게 대하면 너만 직원들한테 만만해 보일 거야.
‘형은 정말 쉽게 사는 법 모르는구나.’
‘꼭 알아야 돼?’
이동혁은 고개를 저었다. 형은 몰라도 돼. 모르면 모른 채로 살아. 상추에 물 주고 빛 쬐주고 정성 들이면 쑥쑥 크듯이 제 자신을 그렇게 돌봐온 형. 혼자 크는 형. 그래. 그렇게 스스로에게 하루에 한 번씩 빠짐없이 물을 주고 싶다면 줘. 쓸데없는 고생인 듯 내가 비를 뿌릴게. 빛도 쬐줘봐. 그때는 내가 태양의 온도를 올릴게. 형은 그냥 하던 걸 해. 내가 그걸 더 완벽하게 만들어줄게. 실패의 오차범위를 줄이게 해줄게.
그런데 그 속을 알 리 없는 이민형은 순진한 눈빛으로 지껄였다. 근데 이동혁. 동혁아. 네 밑에 걔 있잖아. 오이 못 자른다고 내 머리통을 빡 때렸어. 진짜요? 응. 나 지금 나쁜 말 한 거야? 아니요. 저 지금 천사가 빵빠레 부르는 줄 알았잖아요. 제가 또 우리 빵빠레 기 살려줘야죠.
이민형을 처음 만나기 전 막연히 바란 적도 있었다. 빚쟁이의 아들이 패배감에 쩔어 있길. 잔뜩 위축되고 무기력하길. 의지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불행과 자기연민에 찌들어있길. 그래야만 다루기 쉬우니까. 원래 그런 것들은 타인에게 쉽게 휘둘리는 법이니까. 하지만 처음 본 이민형은 제 방의 벽처럼 무너져있긴커녕 마치 누군가의 손길을 꾸준히 탄 듯했다. 잘 가꾸어진 듯했다. 한 조각 한 조각 깎아내고 빚어낸 듯했다. 그런 자만의 한없이 곧은 눈빛.
재수 없었다. 휘두르지 못할 것 같아서? 아니었다. 그런 것쯤은 공만 들이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사는 방식이 다를 것 같아서 재수 없었다. 같은 궤도에서 돌고 돌다 만나는 행성과 우주 먼지가 아니라 우주 비행사가 되어 백 년이 걸려도 무수한 노력과 역경과 고난을 거쳐 직접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사이 같았다.
그 점이 고까워 앞에서 불량한 말도 해봤다. 좆고딩. 좆고딩. 이 좆고딩의 철없고 채신머리없는 짓. 더 야비하고 더 몸서리치게 굴었다. 당근 던져주는 척 선의도 베풀어봤다. 하지만 이 형 재밌네. 온몸으로 께름칙한 티를 내면서도 등만 돌리면 문제집을 푼다. 또 푼다. 풀고 또 또 푼다. 한 번쯤은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노력해봤자 소용없어요. 대학? 작년에 못 갔듯이 올해도 못 갈 거야. 내년도 그럴 거야. 형한테는 형이 모은 등록금을 들고 우리 집에 찾아온 애비가 있어요. 비굴하고 추잡했죠.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성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채야 해요. 심지어 정의롭지도 못해요. 뿌린 대로 거두는 것 따윈 없어요. 의지와 꿈을 가져도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요. 수학 문제 백날 풀어봐야 형의 좆같은 인생은 정답 없고 해결되지 않아요. 하지만 이민형은 또 또 풀고 풀며 제 미래를 염원해. 소망해. 갈망해.
오해였었지. 착각이었지. 누군가의 손길을 꾸준히? 그딴 거 없었다. 한 조각 한 조각 빚어내? 그딴 거 없었다. 성실이니 노력이니 희망고문 같은 언어에 주입 당한 인조인간의 눈빛인 줄 알았어. 사이비 신념 가진 신도 마냥 포교하는 눈빛인 줄 알았어. 하지만 잘 못 안 거야. 그저 너무 단단해서 끼어들 틈 없는 눈빛. 살고 싶은 욕망으로 뒤범벅된 눈빛. 날 것의 눈빛.
날것 중의 진짜 날것은 벽에 부딪혀도 그 벽을 두드린다. 과거를 벗어 내고 앞길을 도모하려 발버둥 친다. 제 스스로 숨을 놓지 않는다. 성실은 이민형의 무기였다. 남들의 지배 따위에 농락당하지 않는 비책이었다. 그렇게 알량한 대가리 안 굴리고 지 할 일 하며 살아가는 건 이민형의 생이었다. 어지간한 생명력으론 따라갈 수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동혁은 이민형의 생명력을 사랑했다. 물 주지 않아도 깊이 박고 뻗어가는 뿌리. 불행의 씨앗 따위가 감히 버틸 수 없는 불모지. 그런 이민형을 사랑했다.
날것은 똥밭에 던져놔도 알아서 산다. 어떻게든 산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산다. 생즉사 사즉생. 그렇게 사는 것들에겐 지름길 깔리기 마련이다. 그게 이민형의 인생이었다. 이동혁은 이민형이 아닌 이민형의 생까지 사랑했다. 이민형이 달갑게 보내지 못한 스무 해조차 품었다. 제가 보지 못한 그 하루하루를 전부 갈망했다. 복수로 말살시킨 이민형의 과거를 추모했다.
그렇기에 감히 이민형의 사는 방식에 토 달지 않았다. 좌지우지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빛나게 해주려 애쓰지 않았다. 이민형이 방향을 정하면 지름길이나 깔아주려 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궁금한 게 있었다. 형은 왜 날 사랑해? 이동혁도 묻는다. 이민형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너의 불로소득을 사랑해.”
그리고 현금도 금도 땅도 사랑해. 농담처럼 깍깍대며 웃는다. 이동혁도 따라 웃는다. 그 말 믿지 않는다. 근데 이민형은 진심이다. 물론 이동혁을 사랑하는 백 가지 이유 중 겨우 한 가지 말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이동혁은 생각한다. 상관없어. 형이 그럼 어때. 줄 게 없으면 사랑하지 말아야죠. 가진 게 사랑뿐이면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것과 같아요. 사랑은 돈과 시간으로 증명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형 널. 우리 형 널 사랑한다고. 지긋지긋해질까봐 자주 꺼내본 적 없는 말이지만 내 눈빛과 내 몸짓과 날 이루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외치고 있으니 이런 날 즐겨도 좋고 이용해도 좋아.
망가지고 싶으면 망가져.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 또 누군가를 조지고 싶어? 그냥 해. 모든 죄는 형을 비껴가. 순진하게 안 살아도 돼. 그래도 순진한 겉모습은 내가 보장할 수 있어. 그 겉과 속의 간격을 내가 조작하고 메꿀 테니.
이동혁은 사실 안다. 도마에 칼질하고 후라이팬 달구며 만족의 끝을 봤다는 걸 안다. 그 표정을 누가 봐. 뒤로 넘어갈 듯 습하게 울고 앓으며 웃는. 자의적으론 절대 나올 수 없는. 제 손길 타야만 튀어나오는 형의 그 표정을 누가 봐.
그렇기에 언제나 입술 새로 튀어나온 이민형의 혀를 빨았다고. 애 품듯 안았다고. 형은 형이라며 추켜세우듯 달랬다고. 새벽녘 조명 하나 켜고 등을 안은 채로 나긋나긋 이민형이 잔혹하게 피 뒤집어쓰고 알 깼던 그 날을 기리고 기리고 또 기리면서 정말 잘했다며 칭찬을 곱씹고 또 곱씹고 아니 아니 아니 그 정도 서로에게 비벼대고 볼장 다 봤으면 그만둘 때도 되지 않냐고 하고 싶은 욕구가 남았냐고들 하겠지만 밑바닥이란 원래 그런 법.
이민형 앞에선 대가리 굴릴 필요 없다. 그냥 굴고 싶은 대로 굴어도 부끄러워질 만한 속내나 비밀 따윈 전혀 없어서. 이검사의 남자치곤 추하고 더러운 일만 골라 해도 매일 매일이 온전하게 자기 자신 그대로 있을 수 있게 만들어서. 불만족스러워도 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러운 연애가 삶의 일부였다.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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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에 대한 감상으로 시작했던 성년의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