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칼젤 오피스
우치나가 애리, 28살에 아버지 회사에서 상무 직급 단 여자.
아버지의 공도 크지만, 상무 자리에 오를 수 있던 이유는 애리가 회사에 큰 몫을 했기 때문일 거다.
유지민은 그 회사 대리. 근데 어떻게 상무랑 연애할 수 있냐고?
애리 직급이 낮았을 때, 그리고 지민은 인턴이었을 때 일본으로 출장 갔다가 서로 눈 맞게 된 거지. 처음에 애리 봤을 때 되게 선 안 넘을 것처럼 생겼다 싶었는데... 아니더라. 은근 플러팅 많이 하는 애리 때문에 먼저 넘어간 쪽은 지민이지. 아무튼 걔네 사귄 지 벌써 2년은 됐다.
회사에서 상무님 이미지?
쿨하면서도 기준에 안 맞다 싶으면 까다로운 걸로 유명하대. 얼마나 까다롭냐면... 프로젝트가 마음에 안 든다? 그럼 발표 다 듣지도 않고
"일주일 정도면 충분하죠?”
한 마디 하고 바로 회의장 나가는 여자...
다들 엄숙한 분위기에 지민만 픽 웃어. 옆에 있는 주임이 인상 찌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 상황이 웃기세요. 대리님? ㅠㅠ 우리 프로젝트 망했어요. 어떡해, 일주일 안에 새로 만들 수 있겠어요?’ 이런다. 응? 망했지.
우치나가 애리 마음은 잡아도... 상무님 마음은 나도 못 잡는다고...
발표 도중에 나가는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하지만 오늘은 진짜 마음에 안 들어 했던 거 같다. 애리랑 2년 동안 사귀면서 아직도 모르겠어... 착잡한 마음으로 탕비실 와서 커피 타고 있는데 주임이 와서 궁시렁댔다. 아직도 상무님 마음을 모르겠다고. 대충 눈웃음 지으며 넘어가려 했는데, 지가 오래 준비했던 프로젝트라 그런지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래... 털어놓을 곳 없을 테니까 지민은 대충 들어줬다.
대리님은 상무님 소문 알고 계세요?
소문? 내 여친 이미지가 어떻길래 그러지. 잠깐 듣고 가려고 했는데 궁금해서 옆자리에 앉으니까 주변에서 말하던 소문을 이야기해줬다.
처음에 상무님 봤을 때 되게 세련되고 멋있어 보였거든요?
매일 정장에 화장도 쎈 화장에 회의할 때만 나타나니 우리 같은 사람들 아니면 상무님 얼굴 제대로 보는 사람도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잠깐 마주쳐도 쿨하게 인사받아 주는 모습밖에 안 보여주고... 근데 신입들 사이에서 되게 핫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상무님 별명이 핫걸이었나? 핫걸은 무슨, 프로젝트 관련으로 연락 넣었을 때 며칠 만에 답장 온 줄 알아요? 3일 걸렸어요. 3일. 아니 폰 놓고 다니냐고... 애플워치까지 꼭꼭 잘하고 다니는 거 봤거든요. 너무 뒷담화인가? 그래도 가끔 일 잘하면 커피 사주긴 하는데, 그것도 일 잘해야만 나오는 거잖아요.
그 정장 내가 사준 건데. 화장도 가끔 하기 귀찮다고 아침에 찡찡대는 거 등 토닥여줘야 잘하던데. 애플워치도 내가 사준 거고... 애플워치 배경 화면도 같이 바다 갔을 때 찍은 건데, 일코짤이라나 뭐라나 손잡은 사진 배경으로 해 놓은 거 귀여워서 어이구 잘했다고 칭찬을 몇 번이나 해 줬는데. 커피는... 사회성 좀 길러보라고 시킨 거긴 한데... 아무튼, 남 눈에 그렇게 보이는 애리가 웃겨서 주임이 하는 소리에 지민은 몇 번이나 웃을 뻔한 거 참느라 죽을 뻔했다.
오늘 준비한 프로젝트 말아먹고 살짝 애리한테 삐지긴 했다. 그래도 평소 같으면 우리... 저녁에 외식할까? 하며 애리가 먼저 톡 했을 텐데 오늘은 아무런 톡도 안 보내는 거 보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아니,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들었냐고... 애꿎은 톡 화면만 바라보다 퇴근 시간이 와서 마무리 정리를 했다. 아, 그냥 오늘 혼자 갈까? 보니까 애리 퇴근하려면 한 시간 정도 남은 거 같고... 그 시간에 먼저 집 가서 요리해 놓고 쉬고 싶어서 애리한테 짧게 톡 보냈다.
오늘 혼자 갈게
[왜?]
그냥 먼저 가서 쉬려고 버스 타고 갈게
[내 차 있잖아 같이 가]
[기다려]
연락 늦는 사람이 대체 누구냐고... 지민 연락엔 이렇게나 칼답인데. 애리한테 삐졌어도 이건 좀 기특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한 시간을 어떻게 기다려? 축 처진 상태로 찡찡대는 톡을 보냈다.
나 기다리는 거 못해
심심하다고ㅡㅡ
짜증나 애리
[잠시만]
중요한 사람이라도 왔나? 그래도 기다리라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 10분 지났나? 갑자기 애리한테 전화가 왔다.
”어디서 기다리고 있어?“
이러네... 지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아는 것 같은 그 말투가 신기했다. 1층 로비에 있지. 삐진 거 티 내고 싶어서 목소리 조금 깔고 말하니까 살짝 놀랐는지 말이 없으면서도 다급하게 엘리베이터 잡는 소리는 잘도 들렸다. 엘리베이터 같이 타자, 1층 눌렀어. 센스 봐라? 삐진 거 다 풀렸지만 아직도 삐진 척 응ㅡㅡ 하곤 끊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려오는 걸 기다리다 1층에 멈춘 문이 열렸다. 열리자마자 지민이 앞에 있을 걸 안 건지 애리가 힝구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더라. 보고 싶었어. 응. 단답하니까 사태가 심각한 걸 이제야 알았는지 삐져서 돌아서 있는 지민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차에 타자마자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아니면 지민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서인지 상무님의 일과를 운전하면서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아침에 회사 가자마자 너 보고 싶어서 쫌 힘들었어. 아니... 다른 층에 있는 게 이렇게나 힘들면 나 상무하지 말걸... 그치 않아? 같은 부서에 있을 땐 되게 좋았는데. 아, 그리고 점심에 네가 싸준 도시락 먹었는데... 아니 소시지 귀엽더라? 어어, 그 문어 소시지. ㅋㅋㅋㅋ 어릴 때 먹던 모양이랑 똑같이 되어있어서 감동. 내 사진첩 보고 따라 한 거지? 역시 센스 만점 내 여친이네. 아 그리고 회의는..."
잘 말하다가 회의에서 말이 뚝 멈추고 애리는 지민의 눈치를 봤다.
“왜? 계속 이야기해도 되는데?”
눈치 보던 표정 풀고 조심스럽게 말하는데... 솔직히 깨물고 싶어서 죽을 뻔. 남들 눈에는 차가워 보인다고? 무슨... 지민 앞에선 눈치 보는 쿼카일 뿐이다.
"그... 프로젝트는... 조금 안 맞는 거 같아서 그랬어. 일주일 안에 해오라는 건...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열심히 할 거 같아서 그랬고... 미안."
그래 그럴 수 있지. 삐진 거 다 풀고 괜찮다고 네가 더 직급 높은데 왜 쭈구리가 됐냐 말하니 그제야 피식피식 웃었다. 지민 삐지면 풀어주기 무섭다고 하면서 삐지지 말고 앞으로 내가 더 잘하겠다고 꼭 다정한 말까지 붙여대는 애리 보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상무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집 도착하자마자 오늘은 본인이 요리해 주겠다며 얼른 씻으라고 지민을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평소엔 시켜 먹는 게 제일 맛있지~ 혹은 지민이 한 요리가 제일 좋지~ 하던 애리였는데 먼저 요리해 준다고 하니 요리하는 모습 보고 싶어서 후딱 씻고 나오니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렸다. 백종원... 유튜브? 김치볶음밥 한다더니만 백종원 유튜브까지 찾아봐야겠냐고... 하여간 아무 노력 안 해도 다 잘할 거 같은 사람이 벽에 폰 세워두고 유튜브 보며 따라 요리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몰래 뒤에서 찍고 있었는데 찰칵 소리가 너무 커서 들켜버렸다. 들켜서 놀라야 하는 사람은 지민인데 애리가 기겁을 하더니만 급하게 유튜브를 끄는 모습이 너무 웃겼다.
백종원의 힘은 대단했다. 뭐 이래야 하나... 그래도 애리가 만든 거니까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맛은 당연히 맛있었다. 눈치 보면서 맛있어...? 라고 물어보길래 맛있다고 역시 애리는 뭐든 잘한다고 칭찬하니까 엄청 들떠서 더 맛있게 먹더라. 밥 다 먹고 애리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는데, 애리한테 편한 옷이라고 해도... 가격대가 조금 있는 옷이지만 애리는 이 티셔츠 두 개 있어서 나중에 본가 가면 똑같은 거 지민에게 주겠다고 했다. 애리야 그거, 가격이. 아니다... 양손에 몇천만 원 반지 끼고 있는 애한테 뭐라 해도 어떻게든 지민에게 티셔츠 쥐여줄 거 같았다.
거실에 앉아서 드라마나 보려고 넷플릭스를 켰다. 옆에서 꼬물거리다 손잡아달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모습도 너무 귀여운 애리. 지민에게 우치나가 애리란 이런 사람이다. 아무리 회사에서 차갑다는 소리 들려도 지민 앞에선 이렇게나 쩔쩔매고 귀여운 애리. 회사에선 그 누구보다 선 지키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하는 애리지만 집에서는 회사의 회 자도 꺼내기 싫어서 말하지 말라고, 회사가 너무너무 싫다고 찡찡대는 애리.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함께하는 일상이 너무나도 행복하다.
역시, 상무님 애리보다 나만 아는 우치나가 애리여서 좋아.
보너스
어쩌다 보니 애리랑 싸웠다. 평소에 싸워도 지민이 먼저 사과하거나 애리가 먼저 풀어주는 날들이 많았었는데 오늘은 꽤 크게 싸웠기에 서로 말하기도 싫은 상태였다. 회사 관련으로 싸운 문제라 그런지 더 답답해서 애리랑 너무 안 맞는다고 말하니 허, 하고 어이없어하더니만 나도 너랑 안 맞는 거 같거든? 이러며 되받아쳐서 열 올랐다. 근데 애리한테 더 화나는 이유는 어제 대판 싸워서 오늘 출근 같이 안 할 줄 알고 버스 타려고 일찍 나가려 하니 왜 벌써 나가? 하며 붙잡더라.
“혼자 출근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지민 말 듣지도 않고 준비도 다 안 했으면서 아니, 같이 가야지. 하면서 차 키 가지고 먼저 나가더라. 이게 카풀도 아니고 뭐야... 차 안에서 서먹한 공기만 아득거리길래 더 힘들었다.
요새 프로젝트 문제로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다 싶었다. 우리 부서에서는 열심히 이 갈고 만든 건데 애리한테는 또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 소리 들었다. 특히 지민이 발표하고 있던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혼났다. 아니 공사 구분 잘하던 애가 왜 이리 뒤끝이 강한지 얼마나 갈궜냐면 PPT 글자 색이 별로란다. 전이랑 똑같은 색상인데요? 아무튼 싫다며 끝까지 고집부리길래 지민도 한숨을 땅 꺼지라 쉬니 왜 내 앞에서 한숨 쉬냐며 잔소리가 늘어졌다. 결국 지민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면서 고개 숙이니 마음이 조금 약해졌는지 헛기침 몇 번 하더니만 다시... 해오세요. 하고 또 나가더라... 하아, 힘들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으니까 직원들이 와서 상무님이 대리님 안 좋아하는 거 같다며 험담을 늘어놨다. 응, 지금은 안 좋아하나 보네...
너무해도 진짜 너무했다 우애리. 어제 애리랑 안 맞는다고 말한 거 때문인지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카톡으로 회사 직원들 앞에서 너무한 거 아니야? 라고 보냈는데 안 읽씹하는 거 같다. 내 톡 알림만 켜 놓은 거 내가 다 아는데. 애플워치도 그래서 차고 다니는 거 다 아는데... 서러워서 점심시간에 남들 밥 먹으러 나갈 때 화장실 가서 훌쩍훌쩍 울었다. 평소에 다정하던 애리는 어디 갔냐고. 싸웠어도 회사에서 이런 적은 없었으면서... 찬물로 세수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앞에 멈춰있길래 고개를 들었다. 왜 여기서 울고 있어. 애리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애리를 스쳐 지나가니 팔을 붙잡고 왜 운 건데, 응? 하며 쳐다봤다. 되도록 회사에서 아는 척 안 하겠다며. 다시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히 말하곤 애리의 곁을 떠났다.
아까는 지민이 톡을 여러 개 쌓았던 거 같은데, 이번엔 애리한테서 톡이 엄청나게 오고 있다. 지금 뭐 해? 밥 안 먹었지...? 아까 화장실에 있던 거 어떻게 알았냐면 자기 부서 직원한테... 계속 진동이 울리길래 폰 전원을 꺼버렸다. 퇴근할 때 다시 켜면 되겠지.
퇴근할 때 폰을 켜보니 부재중 전화가 10통이나 와있었다. 제발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톡에도 답장하지 않고 혼자 퇴근할 생각이었다. 근데, 상무님이 직접 지민의 자리까지 찾아온 거다. 당연히... 주변 직원들이 놀랐지. 그래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기까지 왜 왔어. 오면 안 되는 거 알잖아... 같이 퇴근해야지. 혼자 갈 생각하지 말고 같이 가자, 응? 하며 억지로 손잡고 주차장까지 지민을 인도했다.
차에 타자마자 안절부절못한 목소리로 오늘 회의에서 그랬던 건 미안해... 내 감정이 나와버렸어.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할게. 그리고 내일 직원들에게 다 사과할 거고... 오늘 나 때문에 힘들었지. 그래서 운 거지? 미안, 진짜 미안해. 이러면서 사과하더라. 그래도 공사 구분 잘하던 애가 이렇게까지 화내니까 또 눈물이 핑 돌아서 울려고 하니 차에 있던 휴지를 죽죽 뽑아 주면서 울지 말고... 응? 미안 너무 미안해하면서 거의 무릎 꿇을 것처럼 말하길래 조금 풀어주니 꼬깃꼬깃 지민 옷깃 잡으면서 상처 안 주겠다고 말했다. 아 알겠어... 평소 카리스마 있던 상무님 애리는 어디 갔대?! 하니까 다시 피식 웃더니만 지금은 없고, 네 여자친구인 우치나가 애리는 있어. 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