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나의것


*소재주의




때가 되었다.

입안을 굴러다니던 핏덩이를 뱉어낸다. 퉤... 이 조막만한 머리를 몇 번을 얻어맞았던가. 분당 십 회 정도? 이제 머리 쓰는 일로는 가망없다.

아니

사실 원래도 가망은 없었다.

명재현의 신체포기각서 위로 적힌 마른 잉크가 앞으로 세 달 남았음을 알린다. 3달짜리 파노라마 인생. 명재현의 마지막 남은 수단 하나는 뭘까? 명재현의 3달짜리 파노라마 인생이 잠깐 멈췄다가 이내 다시 흘러간다. 때가 되었으므로.

먼지 묻은 바지를 훌훌 털고 길을 걸었다. 바지는 괜찮은데 반팔이 흰색이라 티가 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이마가 까이는 바람에 피가 줄줄 나고 있었는데 대충 손으로 슥슥 닦고 말았다. 시야가 훤한 걸 보니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서둘러 들어간 국밥집 안에서 익숙한 얼굴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먹어먹어. 익숙한 폼으로 국물이 뽀얀 국밥 위로 부추를 정신없이 얹었다.  

“재현이 형.”

30분 넘게 나를 기다렸을 눈앞의 어린 남자가 나를 부른다.

“지금 대가리에서 피나는데.”
“어쩐지 나 국밥이 대자로 보이더라.”

한동민이 파리해진 얼굴로 군말없이 휴지를 왕창 뽑아 건넨다. 계속 그렇게 살아서 뭐가 남냐. 야야 너 자꾸 은근슬쩍 혼잣말인 척 말 까라. 그리곤 명재현이 곧바로 살갑게 외친다. 이모오 저 여기 깍두기 좀 더용. 셀프인데. 아잉. 윙크도 잊지 않는다. 우웩.

“형 할 말 있다.“
”뭔데요.“

리필된 깍두기를 정확히 반으로 나눈다. 이거 니꺼. 이건 내꺼. 됐어요. 오늘은 진짜 먹을 기분 아니네. 그러던가. 개이득. 다 내 거. 명재현이 콧노래를 부른다. 

“나 그거 세 달 남았대.”
“뭐가요?”
“재작년에 신체포기각서 쓴 거.”

명재현이 깍두기 국물을 야무지게 남은 국밥 그릇에 부었다. 그러면서 그 풍경이 절경과 다름 없다며 한껏 아가리를 놀렸다. 마주 앉은 한동민이 한참 고장난 듯 입을 뻐끔거린다. 

“.....농담?”
“진담.”

한동민이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놨다. 그러곤 명재현을 빤히 쳐다본다. 명재현이 머쓱하게 제 뒷머리를 만지작거린다. 나 이제 머리 많이 길었지? 자를 때가 된 것 같아.







복수는나의것








매주 목요일 낮 12시. 명재현이 어디 있든 간에 한태산은 정확히 그 시간에 명재현을 찾아왔다.

본명은 한태산이 아니라 한동민이다. 명재현은 단 둘이 있을 경우에는 늘 태산아 말고 그냥 동민아 그랬다. 근데 너 왜 가명을 써? 깡패짓 하고 살아서? 아뇨. 걍 이름이 너무 순해보인다 그래서... 와 개웃겨 미친. 그럼 니가 혼자 쎄 보이는 이름 지은거야? 아뇨 저희 사장님이. 그 양반 작명센스 진짜.

명재현 몸뚱아리 어디에 GPS라도 심어놓은 건지 한동민은 개새끼마냥 어떻게든 냄새 맡고 명재현이 가는 곳을 찾아왔다. 딱히 숨어서 미행하려는 기색도 없었다. 마주치면 꼭 인사한다. 형 어디가. 그러면 명재현은 그 놈 번듯한 허우대를 좀 꼬라보다가 답한다. 너...랑 점심 먹으러. 내가 형이랑 그런 약속을 했었나. 방금 생각해낸거야. 띨빵한 새끼. 우리의 첫 인사는 매주 그런 식이었다. 겉보기식 인사치레 같은 건 필요없었다. 재현이 형....

당신 어쩌다 이렇게까지 빚쟁이 거지새끼가 됐더라?

“우웅 아 여기 진짜 맛있당.”

명재현이 멋쩍게 국밥을 한두숟갈 퍼먹는다. 한동민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동민 왜 안 먹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내가 밥맛 떨어지는 얘기해서 그래?"

"니 배 가르는 것도 아닌데 뭘.."

"알았어 미안해."

"야 미안하다니까."

"알았다고 못 들은 걸로 해 걍 헛소리야 됐지?"

새끼 형 무안하게...

한동민은 명재현의 똥꼬쇼를 쳐다보기만 하다가 이내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어색한 기류는 금세 깨졌다. 이거 사먹을 돈은 있으세요? 왜. 다 쳐먹고 너한테 돈 내달라고 할까봐? 명재현이 하하 웃는다. 저 인간은 하여튼간 일단 웃고보는 게 버릇이다. 영 좋지 않은 버릇 같다고 한동민은 늘 그 부분을 지적했다. 명재현 역시 늘 그 지적을 재차 지적했다. 그럼 우냐? 기분 잡치게. 

명재현은 진짜 호구.

라고 한동민이 재작년 말쯤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형은 진짜 호구야.
그래 나는 진짜 호구 맞아.

이건 진짜 갱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제 그를 품을 수 있는 건 실로 종교 혹은 천국 혹은 지옥밖에 없을지어다.

시작은 5천이었다. 시작은 그랬지.

“어쩌다 그 나이에 2억이나 빚을 지셨대? 토토라도 했나?”

명재현이 입을 꾹 다문다. 뒷짐을 지고 선 한동민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유 제가 돈이 좀 필요했네요~”
“뭣하느라? 꼬라지는 영 사치 부리는 타입 같진 않은데.”
“남한테 썼어요 다.”
“아~ 꽃뱀이구만!”
“뭐... 이쁘긴 드럽게 이뻤죠.”
“너무 상념하진 마셔잉? 꽃뱀한테 잘못 걸려서 인생 훅 가는 놈들 여기 형씨 말고도 허벌나게 많어.“

턱수염이 덥수룩하고 손목에는 금색 메탈시계를 차고 있던 덩치좋은 남자가 낄낄 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 곳에서 일을 시작한 지 막 3주째 되던 날이었다. 장마가 끝나고 하늘이 맑게 갰던 어느날 투박한 계약서 위로 모나미 볼펜이 데구르르 굴러간다.

문득 명재현이 코 박고 국밥을 먹다 혼자 낄낄 웃기 시작했다. 동민이 너는 사람 조심하면서 살아. 난 알아서 잘 해요. 그래 부럽네.

식당 밖을 나온 명재현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 모서리가 구겨진 담배를 꺼냈다. 아.. 저 가고 나서 피면 안 돼요? 머리 아파서. 입에 담배를 채 물기도 전에 한동민이 그랬다. 어? 어어 미안. 명재현이 금세 다시 담배를 구겨 넣는다.

“걔는 찾아봤어요?”
“누구?”
“형 통수쳤다던 꽃뱀.”
“아니.“

걔를 왜 찾아 내가. 명재현이 픽 웃었다. 아니이 나라고 사람한테 통수 맞으면서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진 않지~ 이렇게 생판 빚 갚다가 장기 팔고 싶진 않지~ 당연히 존나 만수르처럼 살 수 있음 좋겠지 나도...

명재현이 중얼중얼거린다..

“제가 도와줄까요?”
“인생 한가하냐.”
”뭐야. 복수할 생각도 없네.“

뭘 또 복수까지 해. 내가 깡패새끼냐. 명재현이 멋쩍게 웃었다. 그런 말을 깡패새끼 앞에서 하면 어떡해. 한동민이 쏘아붙였다. 복수해야지. 사람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형 돈 갚을 생각도 없죠? 어떻게 알았냐 눈치 빠르네. 아니 진짜 위기의식이 있긴 해요? 위기라 느껴야 그런 의식이 드는 거 아니냐? 난 별로 위기라 생각 안 하는데. 죽는 게 위기가 아니라고? 넌 고작 죽는 게 위기야? 인간들 어차피 다 죽어. 명재현이 주머니 속 라이터를 내내 만지작거렸다. 

“음... 그래도 일단 튈까 걍?”
“어디로요.”
“모르지 나도. 야 그리고 그걸 너한테 말하겠냐?”

명재현이 그러고 지혼자 막 킥킥 웃었다. 한동민을 툭툭 칠 때마다 얇은 흰 반팔 위로 옷주름이 생겼다 없어졌다 그랬다. 안 튀어. 야 튈 거면 진작 튀었지 이제 세 달 남았다는데. 그러고는 계속계속 웃는다. 언제 잡칠지 모르는 것이 기분이므로 웃길 때 많이 웃어둬야 한다는 좌우명을 실천한다. 







#복

지금으로서는 잘못된 욕망일 거라 생각한다. 타고나길 고아 신세로 타고난 내 유년의 음... 결핍. 그래 결핍이라는 단어로 퉁칠 수 있겠지. 고아원에 살던 시절에는 젊은 여자 선생님을 사랑했다. 우리의 나이차이가 열 셋은 족히 넘었을라나. 근데 나이라는 건 기술에 자신 없는 새끼들이나 들이미는 장애물 아닌가. 어릴 적부터 발랑까진 한동민은 어린 나이에도 그 여선생에게 족히 플러팅을 삼백번은 고수했을 것이다. 끝내 성인될 때까지는 안 된다는 미래긍정형 답변을 얻어낸 놈은 그 순간 흥미가 식었더랬지. 당장 나와 금단의 사랑을 펼쳐줄 만큼 정신 나간 사랑 아니면 필요 없어. 내 결핍은 그렇게 값싸고 쉽지 않으니까. 한동민 머릿 속에서 장황한 개소리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다음. 그 날로부터 2년이 지나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적부터 시작된 두번째 짝사랑.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나시 바람으로 하드바를 빨던 명재현. 등하교를 하던 길목에 있던 담배 전광판이 고장난 허름한 슈퍼.. 한동민이 지나갈 때면 꼭 인사를 해주던 명재현.

공부 열심히 해야 형처럼 안 된다잉
미자한테 담배 안 판다 그렇게 무섭게 노려봐도 안 돼!!!
학교 가냐아
오늘 주말 아냐? 시간 감각이 없네
왜 벌써 와 조퇴했으?
하이
딴 길로 새지 말고 얼른 집 가라

매번 의미 없이 다른 멘트로 인사를 건네던 명재현. 붙임성이 좋은건지 그도 아니면 심심한건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붙어다니던 친구들도 없었던 탓에 이 관심이 저 하나만을 향하는건지 그도 아니면 이 길목을 지나다니는 모든 남녀노소 똥강아지한테까지 이런 식으로 의미 없는 인사를 건네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사춘기 소년한테 왜 그랬나. 그렇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다.

“저 보석바 하나요.”
“우리 가겐 보석바는 없는디.”
“형이 맨날 먹는 건 뭐예요.”
“바밤바.”
“그거 주세요.”

가끔은 명재현이 빨던 것과 똑같은 하드바를 사서 맞은 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다 먹을 때까지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다 먹은 나무 막대기를 잘근잘근 씹던 명재현은 대부분의 시간을 꾸벅꾸벅 졸았다.

“야.”
“네...????”

꾸벅꾸벅 조는 줄만 알았던 명재현이 힐끗 한쪽 눈을 슬며시 뜬다.

“뭘 그렇게 쳐다봐. 따가와서 잠도 못 자겠네. 할 말 있어?”
“아... 그게... 형은 여기서 알바 하는 거예요?”
“응. 여기만큼 개꿀인 알바가 없어.”
“그렇구나.. 매일 해요?”
“그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너도 매일 학교 가잖아.”
“힘들어요?”
“별로. 너 공부 안 하니?”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그럼 학교 끝나고 학원을 가야지 맨날 여기 지나다니잖아.”
“집에서 자기주도학습 하거든요 전.”
“얼씨구ㅋㅋㅋ”

명재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스트레칭 했다. 허리가 저렇게까지 꺾일 수 있는건가. 진기명기 쇼를 보는 것 같았다.

“야 고딩. 형 이제 일해야 되니까 가라.”
“뭐 하는데요. 도와줄까요?”
“내 일자리 넘보지 말고.”
“어이가 없네... 안 넘봐요.”
“집에 가시라구요~”

그리고는 힐끗 제 가슴께로 내려갔다 도로록 올라오는 명재현의 눈.

“한동민 학생. 집 갑시다.”
”제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너 공부 못 하지.“

너 생긴 것만 불량하지 순 바보구나?











명재현이 제발로 사무실을 찾아왔다. 다짜고짜 사무실에 쳐들어와선 알아서 약속을 잡고 왔다며 곧바로 3층에 있는 사장실로 올라갔다. 뭐하는지 엿들을까 했는데 모가지 날라가긴 싫어서 그냥 아래층에서 기다렸다. 어차피 계단 내려갈 때 이곳을 지나쳐서 갈 것이다.

그러다 위층에서 불현듯 우당탕하는 큰 소리가 났다. 한동민이 반사신경적으로 벌떡 일어났으나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모양 빠지게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곧 이어 하이고 이게 뿌사졌네 어쩌네 하는 사장의 말소리가 들렸다. 전부 낡은 가구 뿐이니 뭐 하나 망가져도 이상할 것 없다.

아마 명재현이 먼저 내려오겠지 했는데 왜인지 사장이 먼저 내려왔다. 낯짝 보기 전부터 실실 빠개는 소리가 났다. 한동민이 빠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어어 쉬어라. 프라이버시니깐. 남자가 두툼한 손을 펄럭 휘저었다.

그러고 혼자 실실 웃더니 때 되면 알아서 퇴근하라고 하고선 나갔다. 명재현은요? 한동민이 내려가려는 남자를 다시금 불러세운다. 위에 있지. 가보던가. 

다녀오십쇼. 허리 깍듯하게 꺾어 그렇게 인사하고 나서 한 손에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들고 위로 올라갔다. 귀하신 손님이나 거래처(이래봤자 걍 동고동락하는 다른 조직 깡패새끼를 말하는거다) 올 때만 내주는 건데 몰래 하나 쌔볐다. 두번 정도 문을 똑똑 하고 벌컥 열어재꼈을 땐 명재현은 소파 위에 벌러덩 디비 누워있었다. 다리 한짝은 쇼파 등받이 위에 턱 걸친 채로 입 벌리고 으아아아아 괴성을 냈다. 얼굴 위엔 축축한 얇은 수건 한장을 올려두고 있었다.

“뭐해요?“
“어? 동미니~ 아니 더워서.”

아까 났던 큰소리는 뭐였는가. 방 안에는 부서진 가구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한동민이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런 이상한 소리는 왜 내는데?”
“시원해서.”

나 자취방 에어컨 안 되거든. 내가 전기세를 못 내서. 속세의 맛이 좋네 역시. 한동민이 대충 대꾸하며 쇼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나도 앉아야 돼? 아뇨 누워있으셔도 돼요. 이거 드시라고. 와 땡큐. 이따 먹을게.

사장 오늘 안 들어온대? 그런가봐요. 오늘은 너밖에 없어? 다른 똘마니들은? 누구 잡으러 간댔는데...

낡은 구형 선풍기가 탈탈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만 같은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선풍기 머리가 돌아갈 때마다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먼지 낀 창으로는 햇빛이 끔찍하게도 비춘다. 에어컨도 있는데 선풍기는 끌까 걍. 한동민이 말했다. 아니 걍 켜둬. 명재현이 답했다. 

“돈 갚았어요?”

한동민이 불쑥 묻는다. 딱히 눈치 보는 기색도 없다. 

“아니.” 
“안 갚을 거예요?”
“니가 생각하기엔 갚아야 될 것 같냐?”
“안 갚으면 죽인대잖아요. 저였으면 갚죠.“
”그런가?”

아 하여튼 너 빨리 답지도 않은 깡패짓 그만둬. 고졸이면 고등학교까진 나온거야? 명재현이 오렌지 주스 뚜껑을 시원하게 깐다. 덥석 잡은 주스병 겉에 맺혀있던 물기가 명재현 손목을 타고 그대로 흘러내렸다. 물줄기가 손목을 지나쳐서 팔등을 쭉 타고 흐르다가 꺾인 팔꿈치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걸 가만히 훑었다.

얌마 형 말 씹냐. 명재현이 한동민 앞으로 제 손을 휘적거렸다. 아, 죄송, 뭐라고 했어요? 퍼뜩 정신을 복귀시킨다. 

“대학 아직도 못 갔어?”
“안 갈 거라니까. 사람 말 드럽게 안 듣네.”

명재현이 오렌지 주스 원샷 때리곤 다시 벌러덩 눕는다. 아 걍 여기서 잘까 오늘. 열대야래 씨바... 나 자다가 죽으면 어떡해. 호상인가. 내가 오늘 밤에 죽으면 자다가 죽는 걸까 더워서 죽는 걸까. 명재현이 땀에 살짝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대학을 가야지...”
“지도 안 갔으면서.”
“그래. 그래서 내 인생 이렇게 된 거 아냐.”
“난 대학 가나 안 가나 이미 망했어.”
“왜?”
“형을 만났잖아요.”
“아.....”

됐다 걍. 너 더이상 말하지 마라. 사람 기분을 잡치게 하는 재주가 있네. 명재현이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땀에 눌러붙은 얇은 티셔츠 앞섬을 펄럭였다. 얼굴보다는 목이 좀 더 벌겋게 구워져있었다. 안 그래도 까무잡잡한 피부인데 여름 되니 피부 때문에 열감이 느껴져서 그런가 남들보더 더 더워보였다. 에어컨을 켜도 덥냐 씨.. 명재현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고꾸라졌다.

“형은 또 깡패는 싫어요?”
“깡패 좋은 사람이 어딨냐?“
”그치만..“

언젠 권상우 같은 게 좋다며. 문 밖 계단에선 불규칙한 구두소리 몇 개가 겹쳐 들리기 시작한다. 명재현이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다. 니네 사장 오나보다. 아... 안 온댔는데. 한동민이 제 뒷목을 긁적이며 읊조린다. 문 잠가버릴까? 장난기 가득한 놈의 목소리를 끝으로 아래층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 날 밤에는 꿈을 꿨다. 명재현이 나왔으니 야한 꿈이 아니어도 대충 몽정인 셈 쳤다. 명재현이 어느날 갑자기 차를 뽑고 나타났다. 존나 비싼 외제차는 아니었고 국산이었지만 그래도 중고가 아니고 새 차였다. 아반떼 신형. 스무스하게 들어온 차가 브레이크를 밟고 다 허물어가는 건물 사무소 앞에 섰다. 아니 그래도 천은 넘잖아 이거... 한동민이 얼 타고 있는 동안 운전석에서 선글라스를 낀 명재현이 내렸다. 어어 동미니. 이제 퇴근하냐? 집까지 태워줘? 명재현은 입꼬리가 아주 귀에 걸려있었다.

“형 이거 뭐 어떻게 된,”
“형 돈 다 갚았어.”
“네? 형 빚 2억이잖아요..?“
”웅 그니까 다 갚았다고. 다 갚고 남아서 차 뽑았어.”
”어떻게?“
“삐끼 짓 해서.“
“네?”
“삐끼.”

삐

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
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

아

씨발 꿈..... 

한동민의 손이 기계식 자명종 버튼 위로 오른다. 










#복수

“저 형 좋아해요.”
“그래 나도.”
“좋아한다고요.”
“알겠다구.”
“사랑한다니까요?”
“아 나도라고 새꺄.“
”아니 씨 그런 거 말고 사랑한다고, 형이랑 섹스하고싶다고!“
“므어... 머, 므어라고...”

쪽쪽 빨던 빠삐코를 여전히 입에 문 채로 웅얼거린다. 3년 전의 명재현.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되고 머리가 조금 더 꼬불꼬불거리던 어린 날의 명재현. 한동민은 이제 갓 열여덟이 됐다. 팔팔한 어린 날의 한동민. 두 사람이 나란히 선다. 그놈의 개같은 한심한 개백수 짝사랑하기에서 좀 벗어나보려고. 명재현한테서 좀 벗어나보자고. 난 내 고등학교 청춘을 고스란히 이 별볼일 없는 남자에게 바칠 테니까. 동급생들이 맥심 잡지를 돌려볼 때 나는.... 명재현의 목에는 하얀색 수건을 돌돌 말아 걸어놨다. 땀이 탐스럽게 그을린 피부에 흔적을 남기며 흐른다.

“너.. 아직 고딩 아니냐?”
“그게 중요해요 지금?“
“너 공부 안 해?”
“대답 바라고 하는 얘기 아니에요. 어차피 안 받아줄 거 알아요.”
“어.... 어 형은....”
“여자 좋아하죠?”
“아니 이게 뭐 그런 문제라기보다... 거 참...”

명재현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것보다 너 너무 비실비실하다. 운동이나 좀 해라.”
“뭐라고요?”
“남자다운 매력이라도 좀 키워보라고 임마. 너 테레비도 안 보냐? 말죽거리잔혹사 권상우 같은 그런 남자가 돼야지. 여자들도 너무 막 호리호리한 남자들 안 좋아해.“
”저 키 183인데요. 형보다 더 커요.“
”키만 크면 남자냐?“
”그럼 뭐가 또 커야 되는데요.“
”흠... 흠!!“

대학 떨어졌음 가서 공부나 해. 명재현이 붉어진 얼굴을 하곤 손사래를 쳤다. 어려빠진 남자가 지가 좋다는데 뭔 반응이 저래.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가로등에 붙어있던 허접한 전단지를 뗐다. 떼인 돈 찾아드립니다. 불륜/치정/사기/사람찾기.. 02번으로 시작하는 수상한 번호를 한참 노려보던 한동민이 이윽고 주머니에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쪼가리를 구겨넣는다. 앞으로 내 목표는 대학 아니고 남자다운 남자 되기네 그럼. 난 말죽거리잔혹사는 안 봤지만 권상우같은 남자? 못할 건 또 뭐야.

진짜 짜증나 빡추새끼.













외로운 한동민의 하루는 명재현을 만난 이래로 여전히 고달프다. 왜 그런 꿈을 꿔서 하루종일 이렇게 기분이 뒤숭숭한지... 삐끼 짓을 하는 명재현? 상상해보면 또 막 안 어울리지도 않는다. 마성의 남자가 따로 없다 아주. 기분이 삽시간에 진창에 처박힌다. 아 진짜아아아... 이딴 새끼 좀 그만 좋아하고 싶다 나도. 명재현이 한동민 테이블 앞을 지나가면서 고뇌에 빠진 한동민을 보곤 슬쩍 윙크했다. 짜증나.

진짜 존나 짜증나는 새끼...


“형 제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막 돈 없어서 몸 팔고 그런 건 아니죠?”
“엥?”

명재현이 반찬을 서빙하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하도 많이 쳐와서 국밥집 사장님이 아예 식대 대신 매일 국밥 꽁으로 줄 테니까 알바나 하라고 꽂았다 그랬다. 뭘 팔아? 그니까 뭔가 신체적으로... 한동민이 시선을 반대쪽으로 도르륵 굴렸다. 저기요 한태산씨 절 보고 말씀을 하세요. 아뇨 이게 편해서요. 좀 떨어져주세요. 명재현이 새빨갛고 미감이 구린 주방용 앞치마 앞주머니에 양손을 꽂아넣고 풉 웃는다.

“팔면 뭐 문제 있어?“
”네???“
”문제 있냐고. 내 몸이지 니 거냐?“
”아니 그.. 진짜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세요. 형 아직 스물일곱이잖아요? 다른 알바도 많고.“
”그러다가 니처럼 막 깡패 되면 어떡해. 너무 무서워~“
”아니 그래도 좀. 그건 좀 성병 생길 수도 있고 돈 없으면 몸이라도 건강해야죠. 몸이 재산이라는 말 못 들어봤어요? 그리고 성관계 너무 많이 하면 고자 될 수도 있대요. 형 아직 어리니까 고자되면 안 되잖아요.“
”뭐래? 너 지금 개그하냐?“
”하여튼 그건 안 된다고요.“

명재현이 푸흐학 웃어댔다. 아 존나 웃기네... 야 걱정하지마라? 나 고자 아니니까. 김이 폴폴 나는 국밥이 한동민 앞으로 놓여진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중얼거리면 명재현이 테이블 위로 제 손을 쾅 내리치며 1절만 하라 덧붙였다. 고자인지 아닌지 보여줘? 아니요. 

와중에 국밥 냄새만 맡아도 이미 물릴대로 물려서 토기가 훅 올라왔다. 아우욱... 와 진심 이젠 물려서 못 먹겠는데. 한동민이 애써 숟가락을 푹 넣고 휘적거렸다. 명재현 손과 팔등에 데일밴드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화상자국 같았다. 

”형은 그 개새끼를 그렇게 사랑했어요?“
”아니..“
”그럼 복수할 수 있어요."
"저번부터 왜 자꾸 복수하재?"
"안 억울해요?"
"글쎄.“

안 억울할 수가 있나. 사랑했던 사람이 내 뒷통수를 치면 그게 안 억울할 수가 있나. 복수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은 어떤 일을 당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당하고 안 억울해요."
"난 사람 아닌가보지."

동민아 난 진짜 사람 아닌 것 같아. 그치? 명재현은 그렇게 묻는다.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알 수가 없다.

빈 반찬 접시를 가리키며 명재현을 부르는 어떤 손님에게 벽지에 프린팅한지 몇 년은 지났을 것 같이 누래진 ‘반찬 셀프’ 종이를 가리키며 명재현이 고개를 까딱였다. 알아서 갖다 먹으라는 의미였다.

“형 등신인 거 몰랐어? 과대평가 땡큐.”

그러고는 쏙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 짧은 대화동안 국밥이 미지근하게 식었다. 맛 없겠다... 한동민은 때깔 좋은 뽀얀 국물을 쳐다만 보다가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식당 밖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명재현은 배웅 한번을 안 나왔다. 

“너 또 국밥 쳐먹으러 갔다 왔냐?“
”네.”
“허미 거기 지겹지도 않어. 그 빚쟁이 새끼 있다고 가는겨? 감시하는 거 기특허긴한데.”
“뭐 겸사겸사요. 싸기도 하고...”

한동민이 삐걱소리가 나는 의자 위로 몸을 앉혔다. 딱히 하는 것도 없고 가끔 담배 심부름 하거나 청소하거나 하고 나머지 시간만 알아서 때우면 적어도 최저시급이라니. 사실 이만한 꿀알바가 없다. 비록 다들 흥신소 깡패지만서도.

그때즈음에 사무실로 올라오는 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휘파람 부는 소리가 고막에 박혔다. 한동민이 곧바로 철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명재현이 땀에 눌러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방향은 3층까지 갈 듯 했는데 꽂힌 시선을 느낀 건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철문에 달린 창을 통해 눈을 마주쳤다. 

“태사니 하이.”

꼴에 옆에 다른 깡패새끼 있다고 동민이가 아니라 태산이라 불러주는 것 같았다. 배려심도 깊지. 한동민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 갚으러 왔냐?”

뒤에 앉아있던 턱수염이 쩌렁쩌렁하게 비웃는 낯짝으로 소리쳤다. 

“아뇨...?“

명재현이 하하 웃으며 3층으로 마저 걸음을 옮겼다. 한동민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태사니 하이.. 태사니 하이... 한동민의 고달픈 인생은 그 단 3초 안에 갇혀 또 뱅뱅 맴돈다. 너 생긴 것만 불량하지 순 바보구나? 한동민이 후다닥 명재현을 따라 철문을 벌컥 열고 나섰다.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와악!“

명재현이 갑작스레 열린 철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튀겼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서 아예 엉덩이를 쿵 소리 나게 계단에 찧고 넘어졌다. 씨히이발 좆되는 줄 알았네. 몰래 뻑큐 날리고 있었는데 진짜 뒤질래? 그 턱수염 새낀 줄 알았잖아. 와 십년감수했네 시발. 죄송.. 그런 찐따같은 짓을 하고 있을 줄은.

“뭔데. 할 말 있냐?”

명재현이 여전히 계단에 삐딱하게 넘어진 채로 한동민을 올려다봤다. 일어날 생각도 딱히 없어보였다. 그러더니 곧 힘없이 웃는 소리를 냈다. 할 말 없음 비키지. 할 말 있는데. 그럼 빨리 하고. 고민 중이에요. 내가 알아서 해요. 근데 새끼가 저번부터... 나 거지새끼라고 맞먹냐? 어린 놈의 새끼가...

”형.”
“뭐요.”
“제가...”
“뭐. 빨리 말해.”
“제가 돈을 좀 빌려주면 되겠어요? 그럼 갚을 거예요?”
”아......“

명재현이 큼지막한 눈을 두어번 말없이 끔벅인다.

“음.....”
“죽지 마요. 형이 인사만 먼저 해줘도 나 아직도 심장이 벌벌 뛰는 것 같아요.“
“뭐... 그럴래? 난 안 말려.“

너 얼마까지 줄 수 있는데? 모아둔 돈 좀 있어? 명재현의 형형하고 뻔뻔한 눈빛이 한동민을 향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생존자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다. 동민이 문고리를 꽉 쥔 채 말했다. 명재현의 절망 따윈 모르는 낙관적인 눈이 여전히 고달픈 한동민을 훑었다. 니 좆되든 말든. 야 너 불우이웃돕기 말리는 불우이웃 봤어? 그런 말 함부로 해주지마.

딱콩. 아야..
명재현의 꽤 매운 손끝이 한동민의 이마를 가격한다. 아프냐? 하나도 안 아파요. 너 진짜 병신이다.

그 날 밤 명재현은 사람이 없는 식당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꿈을 꾼다. 자욱하고 매캐한 연기가 원룸짜리 허접한 집안을 뒤덮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으려나. 시간 감각이 흐렸다. 명재현의 흐릿한 시간 감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멋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기이하고 낯선 몸뚱아리를 꾸역꾸역 움직이며 찐득찐득한 누런 장판 위를 기어갔다. 하반신이 저주 걸린 인어공주의 지느러미 같았다. 힘없이 딸려오는 다리의 발목을 어떤 거칠거칠한 손이 붙잡는다.

힉. 굳어버린 고개를 억지로 돌려 제 발목께를 내려다본다. 뿌얘진 시야 사이로 보인 늙은 여자의 입모양이 뻐끔뻐끔 마지막 단말마를 뱉어낸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식에게 하고싶은 말은 뭘까. 일순 호기심을 자극한다. 뻐끔.. 뻐끔. ㄱ ㅏ.. ㅈ... ㅏ..... ㄴ...ㅁ...ㅣ...ㅏ

가지마.....

나만 두고

가지마!


이윽고 살아남은 27살의 명재현이 잠에서 눈을 뜬다.

매미 우는 소리가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것만 같을 정도로 무더운 여름날이다. 국밥을 서빙하던 명재현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더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신체포기각서에 기재된 날짜로부터 딱 한 달 정도가 남았을 때의 일이었다. 때가 되었으므로...













망했다. 집에 있던 돈을 싹싹 긁어모으고 안 쓰던 물건을 당근과 번개장터에 모두 팔아버렸지만 그래도 모인 돈이 고작 해야 천만원이 간당간당 될까 말까했다. 이 집을 팔고 노숙자 신세가 되면? 그래도 이 땅값도 싸고 거지같은 집이 천만원은 뱉어낼지 의문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내 인생은 줄곧 명재현이 전부였는데. 한 달 뒤면 명재현이 죽어버릴지도 모른댄다. 이건 재난이다.

무슨 빚을 2억이나 졌어 이 개같은 새끼!
아 아니야.. 형 욕하지 말자 형 사랑해요

한동민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급한 건 그게 아니라 앞로 한달동안 어떻게 2억을 마련해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난 대학도 안 다니고 신용도 바닥인데. 가진 거라고는 필요 이상으로 쌔끈한 몸 뿐이다. 명재현이 아니라 내가 몸이라도 팔아야 하는 건가 싶었다. 동네 주민회관 아주머니들이 마주칠 때마다 여자 깨나 울리겠다고 너스레를 떨었으니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도 한동민의 발길은 역사 깊은 흥신소 사무실로 향한다. 상가 내 주위 상점들은 거의 문을 닫은 지 오래인 그 곳. 건물 전체가 폐가이자 흥신소의 나와바리가 된지 오래였다.

출근하면 가장 먼저 수특이 든 책가방을 의자 위에 내려놓고 아직 출근하지 않은 맞은 편 형님의 책상을 뽀득뽀득 닦고 층문을 연다. 환기는 기분 전환과 건강을 위해 필수다. 그러고 나면 대걸레를 빨아와 바닥도 뽀득뽀득 닦는다. 바닦이나 집기류에 쌓인 먼지는 전부 코로 들어와 심신을 망치는 법이다. 청소를 야무지게 끝낸 한동민이 다음 업무를 위해 3층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실에 일찍부터 출근하는 사장님에게 구십도로 인사를 박는 것이 한동민의 그 다음 업무이다.

덜컹. 안녕하십니.....
까?

사장에게 멱살을 잡힌 채로 여기저기 피투성이가 된 명재현과 금방이라도 내리 꽂을 것처럼 허공을 가르고 올라가 있는 팔이 달린 사장이 동시에 한동민의 쪽을 쳐다봤다.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진다.

이... 씨발새끼가....

“말로 하시죠.”

반사신경적으로 튀어나가 둘을 떨어트려놓은 한동민이 명재현을 슬쩍 제 뒤로 세워둔다. 뒤에서는 오물오물 모은 침인지 피인지를 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어깨 너머의 그 사나운 목소리가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안 비키냐?”
“말로 하세요. 어차피 이 인간 패도 돈도 안 나와요 마리오도 아니고.“
”뭐라고 인마?“
“말로 하시죠. 정 필요하면 이자를 늘리면 될 일이고요.”

속에서는 ‘한동민 이 새끼야 걍 닥쳐!‘하는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온다.

“이자 붙이면 뭐해? 2년 내내 돈 한 푼 안 나오는데.”
“이제 나올 거예요. 그쵸 형.”
“없는데.”
“있잖아요.”
“그니까 시발 저 새끼한테 줄 돈은 천원도 없,”
“내가 있잖아요. 형...”

형은 내가 있잖아요. 한동민이 작게 중얼거리며 애원한다. 명재현이 입을 꾹 다문다. 일이 겨우 일단락 된 후에야 한동민은 명재현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뭐라 개겼길래 처맞았어요?”
“원래도 종종 처맞았어. 안 처맞을 때만 너 만나서 그렇지.”
“형은 도대체 왜 그렇게 병신처럼 살아요?”
“너만큼 병신일까.“
“...내가 뭐가 병신인데요?”
“뭐 찔리냐? 표정 왜 그래. 그럼 깡패 일 하는 새끼가 병신이지 수재냐?”
“하.... 씨.”

긴장이 풀린 한동민이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쉬며 자리에 쪼그린 채 앉았다. 형은 진짜 좀..

“옛날엔 멋있었는데.”
“지금은 후달리냐?”
“지금도 맘만 먹으면 멋있어서 탈이죠.”
“넌....”
“난?”
“넌 아직도 겉모습만 불량해. 순 바보 같아.”
“하하하.”
“뭘 쪼개.”
“바보 같으면 나 좀 이용해먹고 그래라.”
“야. 진짜 병신한테 병신이라고 못 하는 것처럼 너한테도 그런거야.”
“다친 데 없어요?”
“니 눈엔 없어보여?”

아파. 약 발라줘. 우뚝 서 있는 명재현이 제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한동민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간지럽게 만지작거렸다. 다 잡은 물고기를 왜 아직도 꼬실까 이 형은. 한동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집으로 가요. 명재현의 사형선고일로부터 보름 정도 남았을 때의 일이다. 바보같은 한동민의 애정전선은 여전히 문제 없음이다. 여전히...

집을 쥐잡듯이 뒤져 찾아낸 연고를 바르며 한동민은 실로 오랜만에 명재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새 좀 더 까매졌나. 그새 좀 더 늙었나. 고생이 많았나. 인생이 고달팠나.

“동민아.”
“네.”
”넌 결과랑 과정 중에 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명재현이 퍼렇게 부은 제 볼을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뻔한 질문. 순 바보같은 한동민의 답은 정해져있다.

”결과요.“

항상 결과가 중요한 거예요. 형. (그러니까 흔들리지마요. 내가 계속 옆에 있잖아요...)










#복수는나
형은 쌈박질을 왤케 잘해요? 입가가 터진 명재현에게 후시딘을 발라주며 한동민이 묻는다. 오늘도 명재현은 이 동네의 문제아들을 전부 일망타진했다. 아주 경찰이 따로 없지. 이건 뭐 어릴 때 하던 정의의 사도 놀이도 아니고... 4:1로 싸우던 걸 처음 목격했을 땐 명재현이 일방적으로 다구리를 까이는 줄 알고 달려들어 뜯어말리던 걸 명재현이 뿌리쳤다. 비켜. 그 사나운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원래 이렇게 주기적으로 패줘야 안 나대.”
“아주 정의의 사도 납셨네.”
“아 안 그러면 자꾸 우리 슈퍼 와서 술담배 훔쳐간단 말야! 할아방탱이 늙어서 이제 쫓아가지도 못해. 그래서 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출근하는 거 아니냐고.”
“알바라도 쓰면 안 돼요?”
“너 싸움 잘해?”
“젬병인데.”
“싸움은 이 스킬이 아니라 끈기. 엉? 끈기라고.”

끝까지 잡고 물고 늘어지면 다 이기게 돼있어. 그런 것 치고는 아주 오래 바라왔던 것처럼 정확히 꽂히던 명재현의 주먹들이 몽글몽글 떠오른다. 뭐. 네..

“너 걔네랑 친하냐? 그 겉멋만 잔뜩 든..”
“같은 반이긴 하죠. 학기 초엔 자주 같이 놀자고 꼬드겼어요.“
”너 이새끼.“
”한국말은 끝까지요. 그냥 제가 체격 좋고 좀 생겼으니까 그랬겠죠. 같이 놀진 않아요. 그래도 무시 받진 않는 정도?“
”잘났다 잘났어.“
“걔네랑 그만 싸워요. 걔네 성질머리 장난 아니에요.”
“야. 형도 성질머리 장난 아냐. 나 고등학교 때 별명 저승사자였거든?”
“형 고등학교 안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안 나왔지. 그냥 그런 상상을 한 번 해봤다.”
“어이가 없네.”
“앗 따거. 야! 약 좀 제대로 발,”

명재현의 입술 끝을 훑던 한동민이 그대로 명재현의 목덜미를 잡아당겨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 어? 동시에 황당한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너 뭐하, 뭐하냐? 명재현이 한동민의 가슴께를 양손으로 밀쳐냈다. 이 발랑까진 새끼가. 와. 형 아니. 진짜 저도 모르게. 한동민이 화르륵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너... 너 진짜 나 좋아해?”
“네? 아니 그럼 지금까지 장난으로 좋아하는 줄 알았던 거예요?“
”놀리는 줄 알았지! 난 이 동네 좆고딩 새끼들 다 꼴사납다고. 겉멋만 잔뜩 들어서. 어른들 놀리고 다니고. 너도 그런 새끼라고 생각했으니까.“
”전 아니에요. 저는 형 진짜...”

진짜 좋아하는 거예요... 그 말이 목구멍 안에서 꼬로로록 잠겨내려간다. 형 진짜 뭐인마. 명재현이 한동민의 어깨를 툭 친다. 입술 주변으로 번진 연고를 쳐다보다 아래께가 저릿한 느낌에 급히 시선을 돌렸다. 미쳤구나 한동민.

“하, 하여튼! 쌈박질 좀 그만 하고 다녀요.”
“그럼 니가 걔네한테 그만 좀 얼쩡거리라고 하던가. 그리고 남자새끼들이 올거면 시원하게 맞짱을 떠야지 매앤날 튀고. 모양 빠지게.”

명재현이 뾰루퉁하게 중얼거린다. 나 명재현. 사나이 명재현. 한동민의 일방통행 사랑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고자새끼겠지. 물론 내 인생사 사내놈을 만나는 걸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막상 들이닥친 일에 대해 회피하는 건 남자로서 할 짓이 못된다. 나는 어느 정도 한동민을 받아줄 생각이었다. 그냥 하는 짓이 귀야우니까. 물론 내가 성인이고 네가 미자지만 난 사실 윤리적인 문제로는 영 빡추야. 나 병신인 거 모르고 좋아하진 않았겠지. 언제까지 가나 싶던 놈의 마음이 그렇게 한달, 두달, 반년이 쌓이고 기어코 1년을 넘어갔을 때 순애에 가볍던 명재현 마음이 홀라당 기울어져버린다. 너는 진짜 나 좋아하는구나. 이것도 결핍이라면 결핍이겠지. 나는 좀 확인받는 거 좋아해. 자꾸자꾸 확인 받아야지만 좀 살 것 같구 그래.

“형 좋아해요.”
“어허. 진심이 안 느껴진다.”
“저 아래 섰어요.”
“그런 진심 말고.“
”형은요? 형은 저 안 좋아해요?“

명재현을 꼬옥 안고 고개를 파묻은 한동민이 꿍얼꿍얼 묻는다. 넌... 넌.....

”넌 귀엽지 인마.“

미안하다. 난 애정에 있어서 좀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폐급이라서..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기가 찬 사내놈. 한동민의 흔들림 없는 시몬스 같은 줏대가 이토록 명재현을 만족시킨다.

어느 날 하교를 마치고 늘 그렇듯 명재현을 찾아온 한동민이 달뜬 표정으로 명재현에게 말한다.

”형. 그 양아치 놈들이 그냥 시원하게 한번 뜨자는데요? 경찰에 찌르지도 않을 테니까 남자답게 맞다이 뜨자고 전해달래요 나더러.“

가서 그냥 밟아버려요. 앞으로 찍 소리도 못하게! 철없을 시절의 한동민이 해사하게 웃는다. 형 할 수 있잖아요. 믿음 가득한 목소리로.












명재현의 사형선고일이 앞으로 일주일로 다가왔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도 명재현은 아무런 대책이랄 게 없어보였다. 그걸 지켜보는 안타까운 사랑꾼 한동민의 속만 잔뜩 타들어갔다고나 할까. 그 사이에 긁어 모은 돈은 끽해야 천 삼백. 2억은 택도 없다.

출근하는 사무실에서는 이제 슬슬 간간히 명재현을 어떻게 구워 삶아서 납치할지, 도망가면 어떻게 해야할지, 명재현의 장기 중 어디를 파내야 돈이 될지를 아침드라마 줄거리 얘기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 놈 튈지도 모르니까 아침저녁으로 불침번 서고. 알겄냐? 그 소리에 똘마니 몇이 힘차게 소리친다. 예 형님!

명재현을 찾아가야겠단 생각만이 뇌리를 스치고 또 스쳤다. 하지만 찾아가서? 찾아가서 뭐라고 할 건가. 2억에 발끝만큼도 못 미치는 천 삼백을 들고 가서 뭘 뭐라 할 생각인가.

명재현을 찾아가는 길에 나는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세 번쯤 생각했다.

첫 번째로는 돈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삼백. 꼴에 그동안 열심히 긁어모은 돈이다. 물론 2억 앞에서는 이게 돈인지 동전 주머니인지 분간도 안 가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는 도망가자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갈지는 나중 문제다. 사람이 일단 도망부터 가고 보는 거지, 도망갈 곳까지 마련하고 도망가는 놈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나. 세 번째로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중에 가장 현실적인 걸 골라야했다. 내가 아는 명재현이 동의해줄 법한 선택.

세 번째가 제일 현실적이었다.

명재현이 죽는다는 말을 들은 뒤로 나는 이상하게 말이 많아졌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넘기던 것들이 자꾸 걸렸다. 밥은 먹었나, 잠은 잤나, 빚쟁이들이 또 찾아온 건 아닌가, 혹시 겁먹고 혼자 어디 처박혀 있는 건 아닌가. 하나하나 생각하다 보면 끝이 없었다.

찾아간 집 앞으로 문을 두드리자 한참 뒤에야 안에서 소리가 났다.

“집에 어른이 안 계세여~”
“지랄하지말고 문 열어요 나예요..”

그로부터도 한참 뒤에야 현관문이 열린다. 라면국물이 묻은 헐렁한 흰 반팔티에 줄무늬의 사각팬티를 입은 꼬질한 명재현이 튀어나온다. 너 왜 왔어? 벌써 나 잡아오라고 시키디? 아 이게 다~~~~ 내가 생각이 있는

“통수쳤다던 꽃뱀 아직도 못 찾았어요?”
“못 찾았다고 했잖아.”
“진짜?”
“.....”
“진짜로요?”

한동민이 잡고 있는 현관의 문손잡이가 삐걱거린다. 얼마나 오래된 후진 집인거야 진짜. 이런 건 좀... 이렇게 오래된 것들은 이제 좀 버려라. 응?

“내가 도와줄까요.”
“동민아.”
“네.”
“형도 다 생각이 있어.“

그러니까 너는 지금처럼 그대로만 있으면 돼. 내가 너무 좋아서, 내가 그냥 죽어버릴까봐 어쩔 줄을 몰라서 안달난 한동민 그 자체로 있으면 돼. 날 위해서 뭐든 해줄 수 있을 것처럼 굴면 돼 계속. 계속. 계속. 옛날처럼.

“응?”

명재현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한동민의 뺨을 쓰다듬는다. 명재현의 손끝이 닿은 곳으로부터 전신에 소름이 쫘아악 퍼졌다. 명재현이 제 이름만 불러도 심장이 벌벌 뛰는 게 사랑이라고 느꼈던 그때처럼 온몸에서 땀이 홍수나듯 흐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또한 사랑이겠거니. 끝끝내 명재현을 내 마음껏 쟁취하지 못한 내 미련이겠거니...













#복수는나의
매미 소리가 무지하게 시끄러운 여름날의 일이다. 쩍쩍 갈라지는 땅바닥에서 일렁일렁 무더운 열기가 올라온다. 뭔... 맞짱 신청?? 또 다시 하드바를 깨물던 명재현이 헛웃음을 친다. 내가 잘못 들었나 지금? 제대로 들었어요.

“븅신들. 까고 있네.”
“제대로 한 번 싸우고 이번에 지면 다신 슈퍼 근처 얼씬도 안 한대요. 사과도 제대로 하고.”
“흠....”
“왜요? 막상 싸우려니까 긴장 돼요?”
“아니 어차피 내가 이길 거니까 뭐라고 쪽을 줘야 대대로 망신이 될지 생각 중이야.”
“형도 참 못됐네요.”
“난 죄질이 없단다. 사랑의 매니까.”

한동민은 그들에게서 전해들은 장소와 시간을 명재현에게 전달했다. 같이 가도 돼요? 한동민이 제안했다. 너까지 지키면서 싸울 자신 없는데. 명재현이 조소한다. 무언의 허락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우리는 둘 중 그 어느 쪽도 철없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신중하였다. 착각하지 않았다. 사랑. 그것보단 낮을 지라도. 쪽. 한동민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명재현의 빵빵한 볼에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빠르게 입을 가져다댔다가 뗀다. 이젠 폼도 아주 그럴싸하시다. 아다새끼처럼 굴지도 않고. 먹튀하는 걸레처럼 굴지도 않는다. 푸하하. 명재현이 웃는다. 난 너 받아준다 한 적 없어. 그런 사람이랑 키스는 왜 해. 넌 키스 하면 애 생기냐? 애 생기면 책임지고. 꺼져요. 걸레 같은 명재현... 한동민 위로 훨훨 나는 명재현. 그 아래 자발적으로 빌빌 기는 한동민. 둘 중 그 어느 쪽도 장난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 날 놈들과 다이다이를 까기로 했던 공터 옆 창고에서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한동민은 그냥 첫 섹스였고 명재현은 남자와 하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왜 내가 아래야! 그렇데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댈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더 안달난 쪽이 하는거야 원래. 선생님처럼 가르침의 말투를 써댔다. 사제플하는건가? 그 광경 마저도 온몸이 저릿했다. 더 안달난 쪽이 자신은 아니라며 이 관계에서 한 발자국 능숙하게 물러나는 것도 미웠다. 그래. 내가 더 안달났어. 내가 형 더 사랑해. 명재현 이 쪼다야. 사랑해. 입을 틀어막기 바빴다. 공터는 너무 넓었고 창고는 소리가 울렸고 명재현은 자꾸만 물렀다. 너무 물러서 터져버릴까봐 걱정이 됐다.

해가 저물기 전에는 일을 끝냈다. 갖고 왔던 한동민의 휴대전화가 방전된 탓에 하염없이 놈들을 기다렸다. 이러다 우리 붙어먹는 거 봐서 호모새끼라고 학교에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아냐 뭐 어때. 그래 봤자 명재현 선에서 싹 정리될 놈들. 재현이 형. 한동민이 제 옆에 앉아있는 명재현을 부른다. 왜. 저 진짜 형 사랑하나봐요... 한동민의 읊조림에 명재현이 재차 웃는다. 몸정 무섭네. 한 번 갖고? 난 그래. 뭐라고요? 난 한 번으로도 넘어가고 그런다구. 저... 저 지금 한 말 오해해도 돼요? 네가 빡추가 아닌 이상 잘 알아먹어야지.

한동민과 명재현은 한 마음으로 키스한다.

일렁이며 타오르기 시작한 불을 등 뒤 사랑의 배경으로 삼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푸흐흐. 웃는 소리 위로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오버랩된다. 명재현의 3분 짜리 로맨스 파노라마. 막이 내려간다.

불이야!













때가 되었다. 명재현의 사망선고일이 당장 오늘로 다가온다. 새벽 동이 트자마자 한동민은 명재현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맸다. 괜한 곳만 뒤지고 뒤진 끝에야 끝까지 외면하던, 이제는 더욱이 허허벌판으로 버려진 공터 속 창고로 향한다.

창고는 어릴 때 기억하던 모양새보다 훨씬 좁았다. 아니, 좁았다기보다는 한동민이 그때보다 더 커진 것에 가까웠다.

몇 번이고 지나쳤던 길이었다. 굳이 보지 않으려고 하면 세상에 못 볼 것도 없으니까. 낡은 철문에 녹이 슬어 있고, 창고 외벽에는 오래된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버려진 공터라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살아있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잡초조차 듬성듬성 말라붙어 있었다. 한동민은 그 앞에 서서 한동안 문을 바라봤다. 여기 안에 명재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참 지독하게도 명재현다운 일이었다.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것. 내가 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기다리는 것. 그리고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넘겨 자기 목숨을 건지는 것.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계획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명재현은 나를 믿고 있었다. 내가 올 거라는 걸. 나라면 결국 자기를 찾아올 거라는 걸. 그 믿음이 이렇게까지 더러운 방식으로 사용될 줄은 몰랐지만. 하지만 그러려고 계속 내가 명재현 옆에 있었던 거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명재현을 욕할 수도 없었다. 살고 싶을 것이다. 당연히 살고 싶겠지. 나라도 그랬을 거다. 아마 나라도 어떻게든 다른 사람 하나를 끌어다가 제 목숨 대신 내놓았을 거다. 아니 그건 모르겠다. 나는 내 목숨을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여겨본 적이 없어서. 어릴 때부터 내일이 없어도 오늘 밥만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살았고 죽을 만큼 아픈 일이 생기면 그냥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고 누군가 나를 버려도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명재현만은 이상하게 그게 안 됐다. 명재현이 죽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죽음과 달랐다. 그 형이 없는 내일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러니까 결국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결심 같은 건 아니었다. 그냥 명재현이 죽는 걸 보고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던 거다. 죽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살아남는 게 더 무서워서.

미안해서.... 형 말대로 내가 생긴 것만 불량하지 순 바보라서.

나는 주머니 안에서 구겨진 손을 꺼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고리를 잡았다. 차가웠다. 아주 오래 방치된 쇠붙이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들러붙었다. 그 순간 아주 잠깐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명재현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척하고 다시 돌아가면 된다. 오늘 하루만 어떻게든 숨어버리면 되는 일이다. 그럼 명재현은 다른 방법을 찾겠지. 아니면 죽겠지. 결국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였다. 그런데도 손은 문고리를 놓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야 형 그치. 사람 마음이라는 게 머리로는 그렇게 복잡하게 굴면서 막상 몸은 제일 멍청한 선택을 하더라고. 나는 결국 문고리를 연다. 여기까지가 아마 한동민 위를 훨훨 나는 명재현의 계획.

끼익 하고 오래된 문이 소리를 냈다. 안쪽에서는 먼지 냄새와 묵은 기름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창고 안쪽에 희미하게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제 와서 그때 그 일은 정말 내가 한 패거리였던 게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까? 그때 형만 두고 도망 가서 미안하다고. 나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실은 쪼다새끼라 무서웠다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새끼보다 가진 것 딱 하나 있는 새끼가 더 무서운 법이라. 난 가진 것 쥐뿔도 없는 모자란 새끼였지만 형한테는 그 슈퍼가, 할아버지가 있었잖아. 그걸 잃은 사람의 눈은 어떻게 마주봐야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어. 그 애들이 나한테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왜 형을 빼돌려달라는 부탁을 했는지 깊게 생각 안 했어. 난 그냥 형을 좋아했으니까. 형이랑 단둘이 있는 거면 다 좋았거든. 미안해. 미안해...

병원비를 전전하느라 졌던 2억의 빚. 거지에서 더 거지신세로, 나락에서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기만 했던 명재현의 삶. 그곳으로부터 도망치기 바빴던 나의 삶. 교복 주머니를 뒤져 발견했던 구겨진 종이쪼가리. 언젠가 권상우같은 남자가 되겠노라 다짐했던 철없던 지난 날의 나와... 내가 당신에게 제발로 돌아온 이유.

생긴 것만 불량하지 순 바보구나... 그때와 같은 표정으로 명재현이 읊조린다. 동민아.

“너 착한 놈인 거 알아.”
“......”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복수는나의것
동반 자살을 하려다 실패한 어머니. 인생의 마지막까지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좌절감을 맛보게 해서 유일무이한 자식으로서 죄송스러울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뭐 대단히 자식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니니 너그러이 봐주길 바라고...

졸지에 고아 신세를 지게 된 명재현을 거둬 들인 건 명재현 나이 8살의 일이다. 연도 없던 동네 슈퍼 할아버지가 명재현을 성큼 거둬 키우기 시작했다. 가끔 엄마가 용돈을 주던 날에만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다소 무섭게 생겼던 할아버지였다.

슈퍼 일은 어릴 적부터 허리가 안 좋던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도왔다. 슈퍼 일은 생각보다 한가했고 또 생각보다 고될 때도 있었다. 이걸 이 늙은 할방구 혼자 어떻게 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공부하라고 구박도 안 했고 남들 다 가는 학교에 가라고 잔소리하지도 않았다. 밥을 남기면 혼냈고 몰래 담배를 삥땅 치면 그건 아주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매를 들었다. 그 이후로 담배는 손도 안 대겠노라 다짐했다.

젊은 놈이 어차피 하나 필요했어. 할아버지는 무덤덤하게 그랬다. 동네 양아치 새끼들이 겉멋만 잔뜩 들어서 담배나 술을 훔쳐가곤 한다고 했다. 어릴 적엔 힘이 없던 탓에 머리를 왁스로 쫙쫙 민 가쿠란 차림의 양아치들이 할아버지를 골탕 먹이고 담배 몇 보루를 훔쳐 달아다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야했다. 경찰에 신고하자고도 해봤지만 애초에 좁아 터진 시골 동네인데다가 월세를 벌써 몇 달째 밀린 탓에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그냥 내가 얼른 크면 되지. 얼른 커서... 얼른 커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 아주 혼쭐을 내줘야지!

내가 할아버지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은혜란 걸 아는 놈이니까. 나의 어머니도 해주지 못한 것을 내어준 이의 다정을 아는 놈이니까. 나 타고 나길 유별난 팔자로 태어나서 번지르르한 효도는 못하더라도 당신 얼굴에 먹칠하는 짓은 안 할 거니까. 그 누구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세상에서 당신의 아들이기를 선택할 수 있었던 난.

한동민을 뿌리치고 정신없이 달려간 그 곳은 이미 활활 타오른 정든 제 집이 있을 뿐이었다. 방화범들은 애진작에 체포돼 경찰차에 실린지 오래였다. 넋이 나간 명재현을 향해 가운데손가락을 날리는 놈들이 회개따위 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나를 쫓아왔을 거라 생각한 한동민은 그림자조차 비추지않는다. 무서워서 튀었나. 당황스러워서 피했나. 그도 아님 처음부터 한 패였나? 어쩐지 생긴 게 불량하더라니. 생긴 게...

몰려든 주민과 새카맣게 그을린 방화복을 입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소방관들 사이에 우뚝 선 명재현. 제 앞에 미련도 없이 활활 타올라 가늠할 수 없을만큼 높이 사라져버리는 불빛을, 작은 동공 안을 가득 채워 일렁거리는 불빛을 뜬 눈으로 지켜본다. 눈알이 쩍쩍 갈라지는 감각. 양파라도 문댄 것처럼 매운 눈물이 흐른다. 저 안에 물건들이 돈이 얼만데. 돈 아깝다. 할배 눈치 보느라 그간 삥땅 못 친 게 얼만데. 이럴 줄 알았으면 몰래 하나씩 쌔볐지. 어쨌거나 목숨줄 얼마 안 남았던 할배. 나도 화장시켜줄 생각이었는데 화장할 돈 굳었네. 그렇게 아끼던 슈퍼랑 한꺼번에 갔으니 다행인 일이지. 안 그래? 안 그런가. 안 그런가... 그 순간 눈 앞의 모든 광경이 제 인생과 아주 흡사함을 깨닫는다. 그래... 맞아 그랬지. 활활 불타오르면 결국 새카만 재만 남는 게 내 인생 같았어. 내 인생에서는 항상 마지막에 탄내가 났거든...





















epilogue

낚시터에 쪼그리고 앉아 물 아래 가라앉아 있을 것들을 상상한다. 신발. 이어폰. 쓰레기. 담배 꽁초. 수영복. 물안경. 양말. 돈이 없어 끝끝내 장례를 치르지 못한 당신의 유골. 사람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것 같았던 창고의 드럼통..... 그리고 그 안의.

멀어진 시야 사이로 보인 불량한 남자의 입모양이 뻐끔뻐끔 마지막 단말마를 뱉어낸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저를 배신한 애인에게 하고싶은 말은 뭘까. 일순 호기심을 자극한다. 뻐끔.. 뻐끔. ㄷ....ㅗ....ㄱ.....
ㅁ...ㅏ....
ㅈ.......

도망가

절대

잡히지마!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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