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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은 찌질이. 요즘 애들 죄다 줄인 교복 입고 다닌다는데 펑퍼짐하게 떨어진 아빠 양복 핏. 에어팟 꼽고 다니는 시대에 줄 이어폰. 칠 년 전에 나온 갤럭시 S 시리즈 들고 다니는 애.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가 눈을 반쯤 가렸던 인상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이웃끼리 다닥다닥 붙어 사는 복도식 아파트. 페인트 시공 안내문 붙더니 금세 공사를 마쳤는지 햇볕에 말라가는 페인트 냄새가 진동했다.

"흡연구역 저쪽이에요."

복도 난간에 기대어 담배 빠는 동혁에게 위층 학생이 말 건다.

"여기서 한 대만 태우면 안 될까."
"저희 집으로 연기가 올라와요."
"미안. 습관이라."
"... 미안하다면서 왜 계속 피우세요?"

눈치 둔하고 느릿하게 생겨선 은근 말에 뼈가 있었다. 동혁은 머쓱하게 웃으며 깡통에 재를 털었다. 담배 툭툭 치는 동혁의 손가락을 학생이 빤히 본다. 재떨이에 담배 쑤셔 박기를 기다리는 눈빛. 결국 고등학생 기에 못 이겨 반도 못 빤 담배가 깡통 속에 처박혔다. 용건 끝났는지 허리 꾸벅 숙여 인사하더니 계단 위로 사라진다. 요즘 애들 참 무서워. 어른한테 따박따박 할 말 다 하고 말이야. 중얼거리며 핸드폰 꺼내든다. 네이버 메인 뉴스 헤드라인 훑는 갈색 동공. 밑창 헤진 쪼리 슬리퍼. 회사 로고 박힌 단체티. 행색은 영락없는 동네 백수였다.

동혁은 맛만 본 담배가 아쉬워 괜히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였다. 지상 주차장 옆 흡연구역까지 갈까 고민하다 귀찮음이 앞서 관둔다.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에 땡볕에서 마시는 연기는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선 동혁이 문을 닫자마자 훌러덩 벗고 욕실로 향했다. 뜨끈한 피부 위로 찬물을 끼얹었다. 동혁은 혼자 사는 특권이랍시고 팬티 한 장 입은 홀몸으로 거실을 활보했다. 물기 맺힌 발자국이 러그 위로 찍혔다. 케이블 축구 중계 틀어두고 바닥에 풀썩 앉는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 한 캔을 목구멍에 들이붓는데 다 피우지 못한 담배가 자꾸만 손끝에서 맴돌았다. 이참에 금연을 해 볼까. 가방끈을 두 손에 꽉 쥐었던 학생의 얼굴이 흐릿하게 스쳤다. 담배 연기에 아주 싫증이 난 것 같던데. 복도에서 너무 많이 태웠나. 맥주를 다 비운 동혁이 소파에 엎어졌다.



* * *



여름방학 끝무렵인지 아파트 주차장이 한산했다. 가족 단위의 주민들이 막바지 휴가를 떠난 탓이다. 늦은 퇴근으로 늘 주차 자리를 놓쳤던 동혁에겐 오랜만에 여유로운 퇴근을 즐길 타이밍이었다.

주차장 구석에 차를 세운 동혁이 자켓 주머니 속의 담배를 만지작거리다 흡연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서 피우던 습관 때문인지 시야에 차만 가득한 흡연구역은 성에 차지 않았다. 9층 복도가 야경은 끝내주는데... 연기를 뱉어낸 동혁이 벤치 위로 풀썩 앉았다. 여름 밤공기가 꽤 선선했다.

"... 이제 복도에서 안 피우기로 하신 거예요?"
"아, 깜짝아."

깡통 위로 재를 털던 동혁이 어린 목소리에 놀라 담배를 떨어트렸다. 와... 반도 못 피웠는데. 동혁이 중얼거리자 재현의 고개가 갸웃한다.

"학생 내 담배 감시하러 다녀?"
"안 피우는 게 건강에 좋잖아요."
"그건 나도 알지."

알면 끊으시지... 혼잣말인지 잔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재현의 목소리가 얇게 흩어졌다. 무거운 가방을 벤치에 내려놓은 재현이 동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예고 없이 위층 학생과 흡연구역 벤치에 동석하게 된 동혁이 손을 휘저어 연기를 날려보냈다.

"학생이 너무 늦게 들어가는 거 아냐?"
"원래 학원 끝나면 이 시간이에요."
"열심히 사네."
"아저씨는 볼 때마다 담배만 피우시고."

너 지금 나 열심히 안 산다고 꼽 주냐. 나도 회사 열심히 다녀. 동혁이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회사 다니시는 줄 몰랐어요. 재현은 아랑곳 않고 대꾸했다.

"아저씨 제 이름 아세요?"
"알지. 맨날 명찰 달고 다니는데 모르겠냐."
"오늘은 명찰 없는데."

얇은 반팔 차림의 재현이 티셔츠 끝자락을 매만졌다. 명찰 없어도 내 이름 알아요? 고개를 돌려 재현의 가슴팍을 빤히 바라보던 동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알아. 명찰 있어야 알지. 재현이 동혁 몰래 입술을 작게 삐죽였다.

가방을 챙겨 일어섰더니 동혁이 재현을 불러세운다. 야, 학생. 아이스크림 사 줄까.

두 손에 설레임을 쥔 재현이 벤치 밑으로 신발을 툭툭 쳤다. 바밤바 봉지를 쪽지 모양으로 접던 동혁이 발을 뻗어 재현의 흰 스니커즈를 제지했다.

"다리 떨면 복 나간다."
"저 손 시려워요."

재현이 빨개진 손으로 설레임을 내민다. 바밤바를 입에 문 동혁이 설레임을 받아들어 손가락으로 눌러댔다. 물렁해진 설레임을 손바닥 위에서 조물대던 동혁이 다시 재현의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옮겼다. 됐지? 어딘가 모르게 뿌듯한 말투는 덤이었다.

"다 녹았네요."
"내가 원래 열이 많아."

바밤바 막대를 잘근대던 동혁이 고개를 돌렸다. 너도 그거 씹는 버릇 있냐. 설레임 입구를 이 끝으로 뭉개던 재현이 몸을 움찔했다. 아... 혀 씹었어요. 아저씨가 말 걸어서.

"남탓을 잘하네."
"아픈데..."
"고개 들어 봐."

동혁의 손가락이 턱을 감쌌다. 손끝에 볼이 눌린 재현이 자세가 불편한지 작게 버둥댔다. 가만히 좀 있어. 피 나는지 보려고 그래. 재현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얇은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었다.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눈만 굴리는데 동혁의 얼굴이 멀어진다. 피 안 나고 멀쩡해. 이제 내 탓 아니지?

로맨스 영화조차 본 적 없는 열여덟 고등학생의 손이 동글게 말렸다. 무릎 위에서 움찔대던 주먹이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달싹였다. 바보 같아... 고개를 푹 숙인 재현이 가방을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사춘기를 겪었던 경험이 십 년도 넘은 동혁은 예민하고 말랑한 고등학생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 씹힌 혀가 아릿했다. 동혁의 손이 닿았던 보조개를 괜히 만져본다. 풀리지 않은 날씨 탓인지 뺨 위의 열감이 식지 않았다.



* * *



재현을 다시 마주친 것은 여름방학이 끝난 후의 일이다. 왼쪽 가슴에 명찰을 단 재현이 9층 계단 위로 쪼그려 앉았다. 주머니에서 꺼낸 꼬인 이어폰을 푼다. 손이 느려 이어폰을 귀에 꼽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이어폰에서는 이미 수백 번도 넘게 들었던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됐다. 90년대 발라드가 전부였다.

무료하게 지나간 여름방학 동안 재현의 일상을 방해한 건 아랫집 남자의 존재다. 설레임을 쥐고 있던 손의 한기가 여전히 재현의 가슴께를 간질였다. 이번 방학도 재미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잔잔히 닿는 노랫소리에 눈이 감길 때쯤 누군가 재현의 어깨를 건드렸다.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는데."
"... 아저씨?"
"뭐 해? 집에 안 들어가고."

얼른 가라. 부모님 걱정하신다. 손목에 매달린 편의점 봉투를 달랑거리던 동혁이 두 계단 아래에 선다. 재현아. 울어? 불쑥 허리를 숙인 동혁이 재현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훅 끼치는 샴푸 냄새에 재현이 얼굴을 돌렸다.

"... 안 울거든요. 갑자기 제가 왜 울어요."
"말이 없길래."
"내 이름 모른다면서 오늘은 아시네요."
"명찰 했잖어."

동혁이 턱짓으로 명찰을 가리켰다. 실실 웃는 입꼬리가 얄미웠다. 이름 알면서... 저번엔 모른다고 거짓말하고. 아저씨 거짓말쟁이죠. 무릎을 끌어안은 재현이 계단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헐렁하게 걸쳤던 이어폰이 계단으로 떨어졌다. 재현의 옆자리에 풀썩 앉은 동혁이 이어폰 한 쪽을 주워 바람을 후 불었다. 요즘 애들은 무슨 노래 듣냐. 거짓말쟁이냐는 물음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넌 무슨 고등학생이 김광석 노래를 들어?"
"들을 수도 있죠."
"감성이 특이하네..."

집 들어가기 싫어? 동혁의 물음에 재현이 눈을 깜빡였다. 티 내려고 하지 않았는데 티가 났나. 그렇게 눈치 빠른 사람 같지는 않던데...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느린 계산으로 내놓을 수 있는 적절한 대답이 없었다. 재현은 결국 대화를 돌렸다.

"아직 혀가 안 나았어요."
"아직도?"
"얼마 전에 또 씹었거든요."
"말 돌리는 거 티 나는데 그냥 넘어가?"

눈치 빠른 것 같지 않다는 말은 취소.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호기심 가득해 보이기는 했지만 숨기려는 비밀마저 캐낼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재현은 이어폰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넘어가요. 재현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계단 위 센서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계단이 깜깜했다. 옆에서 조용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은 제 손에 닿는 찬 기운에 몸을 움찔 떨었다. 편의점 봉투에서 동혁이 건넨 음료수였다. 맥주만 사려다가 그게 갑자기 눈에 보이길래 집었는데 잘됐네. 복숭아향 이온음료를 손톱 끝으로 건드리던 재현이 난간에 기댔던 몸을 반대로 눕혔다.

"... 뭐 해?"
"센서 켜지라고 움직인 거예요."

재현의 머리가 동혁의 어깨 위로 닿았다. 작은 움직임을 센서가 인지했는지 계단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동혁이 고개를 돌린 시선 아래 재현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요즘 애들은 이렇게 경계심이 없나... 아직 맥주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알딸딸했다.

파우더향이 나는 로션을 발랐던 기억이 까마득했다. 정말 덜 자란 아이에게서 나는 냄새. 동혁은 괜히 바람막이 소매를 코에 가져다 대고 킁킁거렸다. 로션 냄새가 나는 어린 재현에게 제 담배 냄새가 밸까 봐. 바람막이의 부스럭거림을 들었는지 재현이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아저씨 불편해요?"
"엄청."
"나는 편한데..."

떨어지기 싫었는지 흑갈색 머리카락이 느릿하게 위치를 옮긴다. 다시 난간에 기댄 재현이 동혁의 다리 위로 손을 내밀었다. 열 많다면서요. 음료수 쥐고 있어서 손 시린데... 잠깐 녹여 주면 안 돼요? 여름 바람에 마구잡이로 헤집어진 동혁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제 머리카락을 넘겨대던 동혁이 재현의 손을 빤히 보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무슨 뜻으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 네?"
"너는 너무 어리고, 재현아..."
"무슨 말이에요?"
"... 아니야?"
"아저씨 진짜 저질..."

저질이라니. 넌 이웃 어른한테 그런 소리를 하니. 동혁이 되려 욱해 덧붙였다. 귓바퀴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필이면 재현이 교복까지 차려입은 날에 이런 실수를 했다는 창피함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저렇게 어린 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요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동혁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재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녹지 못한 한기가 손을 감쌌다. 캔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계단으로 흘렀다.



* * *



타임 세일 시간에 맞춰 동네 마트에 카트를 끌고 입장한 동혁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평소에는 살 물건이 없어 지나치던 생활용품 코너였다. 하얀 용기에 담긴 베이비 로션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걸 바르려나... 향이 비슷했는데. 손 뻗어 병 입구의 향을 맡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변태 같이 뭐 하는 거야, 이게..."

고개를 저은 동혁이 로션을 내려두고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날 이후 일부러 동혁을 피하는 건지 이상하리만치 재현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만나서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웬 아저씨랑 엮여서 기분 더러웠으려나. 재현을 생각하기 바빠 우유를 빼먹은 채 집에 도착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은 두 시간 뒤의 일이다.

9층 복도에서는 큰 도로 건너 버스정류장이 보였는데, 인근에 사는 학생들은 죄다 그 정류장을 거쳐 등교했다. 마침 하교 시간이었는지 버스에서 학생들이 우르르 내렸다. 습관적으로 복도에서 담배를 태우던 동혁은 개미만큼 작게 보이는 학생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벌써 계절감이 바뀌기 시작했는지 교복이 긴팔 셔츠로 바뀌어 있었다. 윗집 고딩도 춘추복이 더 잘 어울렸던 것 같은데... 무의식을 뒤덮은 생각이 연기와 함께 흐려졌다.

"흡연구역 여기 아니라니까요."
"아, 심장아..."

무의식을 뒤덮은 주인공의 등장에 동혁이 담배를 떨어트렸다. 손등을 스친 불씨의 화끈함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되려 큰소리를 친 것은 동혁이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아... 맞다."
"학교에서 맞고 다녀?"

재현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숨겼다. 얼굴을 붙잡아버린 동혁의 손길 때문에 끝내 숨길 수는 없었지만, 재현은 눈을 굴려 동혁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몇 주 동안 얼굴 한 번을 보이지 않던 재현이 뺨에 멍을 달고 나타났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극단적 시나리오를 다섯 편도 더 쓴 동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신고해야지. 요즘에도 학교 폭력 같은 걸 해? 재현이 다급하게 팔을 뻗어 동혁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뺏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맞았어."
"......"
"... 집에서 너 때려?"

동혁이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숨을 푹 내쉰 재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아니긴 한데요... 말꼬리가 흐려졌다.

"아저씨..."
"응, 얘기해."
"... 고민상담 한 번만요."

동혁의 집 현관에 새로운 신발이 놓였다. 흰 스니커즈를 가지런히 정리한 재현이 거실 소파에 풀썩 앉았다. 똑같은 집 구조 때문인지 어색함이 없었다. 오히려 낯을 가리는 건 어린 학생을 집에 들인 동혁이었다. 주스라도 줄까 싶어 냉장고를 열었더니 수입맥주가 한 칸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결국 미지근한 물 한 잔을 가져온 동혁이 재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말하기 어려우면 천천히 해도 돼."

부모 두고 아랫집 어른한테 털어놓으려는 이유가 있겠지. 어린 시절의 저 역시 부모에게 숨기는 비밀 하나쯤은 있었다. 그 나이에는 으레 그러는 거니까... 동혁은 재현의 상황을 부러 넘겨짚지 않으려 스스로 곱씹었다.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나요."
"... 뭐?"
"바람을 피워요. 아빠를 두고."

동혁의 머릿속에 두서없이 쌓였던 시나리오 중엔 없는 소재였다. 위로할 멘트도 마땅치 않아 말을 골라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부모님은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랬어요."

엄마 얼굴 알죠? 엄마가 많이 어릴 때 결혼을 해서... 그렇게 하고 싶던 결혼은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아빠랑 만났대요. 우리 엄만 입고 싶은 옷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참으면서 저를 키웠나 봐요. 열여섯 살 땐가... 이혼을 할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아빠는 반대했지만요. 제가 어느 정도 컸으니까 말해 주는 거라고 하셨어요.

티는 안 냈지만 이혼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지금도 외로운데 아빠랑 둘이 살면 더 외로울 것 같아서요. 아빠는 무뚝뚝하시거든요. 그래서 만약에 이혼을 하게 되면, 엄마랑 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엄마 표정이 좋지 않더라고요. 그때부터 짐작했어요. 엄마는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재현은 긴장하는 기색 없이 말을 이어갔다. 몇 분 동안 수 년 분량의 윗집 가정사를 들어버린 동혁의 머릿속만 어지러워질 뿐이었다.

"그래서 직접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누굴 만나는지?"
"네. 차라리 제 짐작이 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요."

재현은 일주일간 본인이 겪은 미행담을 늘어놓았다. 야간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와 엄마의 퇴근길을 밟았던 지난 7일. 흰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출근한 엄마가 회사를 나올 땐 보라색 원피스 차림이었던 모습. 낯선 남자와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던 엄마가 환히 웃던 표정 같은 것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귀가한 엄마에게 아빠는 소리를 쳤었지. 엄마는 늘 그렇듯 웃어넘기며 회사에서 회식이 있었다고 했다. 엄마의 새빨간 거짓말을 아는 재현은 침묵했다. 엄마를 미행하던 어린 아들이 자전거와 부딪혀 멍에 든 사실에 대해선 그 누구도 경위를 묻지 않았다.

재현은 엄마의 행복을 빌었다. 사랑받지 못한 아들이었으나 엄마 역시 사랑받지 못한 아내였으므로. 그러나 엄마가 행복하지 않은 것보다 두려운 것은, 혼자 남게 되는 자신이었다. 재현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갈라진 부부 사이에 혼자 남은 자식을 누가 돌봐. 그것도 다 커버린 자식을. 어떤 날은 집에 혼자 남겨져 영원히 홀로 살아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엄마가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그럼?"
"엄마를 전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힘들어요."

재현이 옅게 웃었다. 복잡한 마음 사이로 동혁의 손이 파고들었다.



* * *



짧은 고민상담 이후 재현은 꽤 자주 동혁의 집에 드나들었다. 텅 빈 동혁의 집은 야자를 짼 고등학생의 1인 독서실 역할을 했다. 마땅한 책상이 없어 거실 테이블에서 문제집을 풀어야 했지만 재현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밀린 숙제를 하다 허기가 지면 동혁이 끓여 주는 라면을 먹었다. 혼자 살아 라면 하나는 잘 끓인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날이 갈수록 재현의 얼굴에 살이 붙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동혁의 집에 들른 재현이 가방을 내려놓더니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자고 갈래요."
"안 돼."
"고민도 안 하고 거절해요?"
"외박하는 건 뭐라고 설명하게."

오늘 친구 집에서 자겠다고 이미 말했는데... 아무리 부쩍 친해졌다지만 동혁은 재현을 제 집에서 재우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부정하고 있던 퀴퀴한 속내를 인정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혁은 나름 정상 범주에 속하는 사고 방식을 가졌고, 따지자면 평균 이상의 모범 시민이었다. 아는 학생을 재워 주는 일이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언제까지나 어떠한 사심도 없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재현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계단에서 제 어깨에 기댔던 재현의 표정을 보지 못한 동혁은 그의 마음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씻어도 돼요?"
"집이 바로 위에 있는데 씻고 오지 그랬어."
"저 씻을게요. 갈아입을 옷 빌려 주세요."
"집이 바로 위에 있는데 잠옷을 가져오면 안 되나?"

동혁의 잔소리에도 눈 하나 꿈쩍 않은 재현이 욕실 속으로 사라졌다. 소파 위로 파묻힌 동혁만 쿠션을 끌어안은 채 곡소리를 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희미한 기억 속 옛 여자친구의 샤워를 기다리던 과거가 떠올랐다. 동혁은 이 대목에서 혀를 깨물었다. 애초에 어린 학생을 데리고 여자친구를 떠올린다는 사실은 성립할 수 없는 거였다.

잔잔하게 울리던 물소리가 멎더니 습기 가득한 욕실에서 재현이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이 흰 피부 위로 얌전히 내려앉아있었다. 동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조용한 거실에 그 소리가 들렸을까 싶어 눈을 굴렸지만 다행히 재현은 동혁이 무슨 상태에 놓였는지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흰 티셔츠에 검은 반바지를 입은 재현이 거실을 기웃거렸다. 로션 같은 거 있어요? 멍한 정신을 다잡은 동혁이 대꾸했다. 어어. 침대 옆 서랍에.

동혁이 바르는 화장품이라곤 30대 아저씨 향을 풍기는 스킨이 전부였다. 허여멀건하고 투명한 고등학생의 피부에서 남자 스킨 냄새가 나는 상상이 쉽게 되진 않았다. 뺨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서랍이 닫힌다. 어쩐지 조금 굳은 표정의 재현이 동혁의 옆에 앉았다.

"... 아저씨 결혼했어요?"

덜 자란 몸에서 옅게 흐르는 스킨 향에 코가 적응하기도 잠시, 동혁은 재현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 혼자 사는데? 영 마땅치 않은 대답이었는지 재현이 고개를 푹 숙여 다리 사이로 파묻었다.

"서랍에... 반지 있어서요."
"아... 할 뻔했지."
"......"
"그 반지 못 주고 헤어졌어."

동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내뱉었다. 재현의 마음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꼬였다. 종지부를 찍은 사랑에 질투하는 제 모습이 싫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보면 실례일까. 어쩌다 결혼이 무산된 건지, 어떻게 헤어진 건지... 묻고 싶은 질문이 한가득이었다.

"궁금해요."
"어떤 게?"
"아저씨가 하는 사랑은 어떤 모양인지."

결국 내뱉고 말았다. 말의 저의를 파악하려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두드리던 동혁의 행동이 멈췄다.

"재현아. 오늘은 가서 자는 게 좋겠는데."
"아저씨, 저는요..."
"재현아."
"아저씨가 좋아요."
"......"
"외로워서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사랑은 결국 죄가 된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마음을 감당할 시간이 필요했다. 허울 좋은 가족의 균열. 그리고 이방인. 때로는 저주가 선물일 수 있다. 사랑의 총량은 존재하나 봐요. 그동안 받지 못했던 걸 몇 달 사이에 다 받은 것 같아. 물기 머금은 재현의 목소리가 얇게 흩어졌다.

"재현아."
"......"
"이유 없이 안 될 것 같은 사랑들이 있잖아."
"... 좋아해서 죄송해요."

이내 무너진다. 재현이 발개진 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채 흐르지 못한 눈물이 소매 위로 젖어들었다. 덜 자란 어깨가 흐느낀다. 동혁은 팔을 뻗어 재현의 등을 토닥였다. 받을 수 없는 마음에 대한 위로였다.

재현이 불쑥 고개를 든다. 다듬어지지 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버석한 동혁의 입술 위로 재현의 무게가 실렸다. 고개를 뗄 틈도 없이 서툰 입술이 맞물린다.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열여덟 끝자락에 닿은 첫키스는 짠맛이었다.



* * *



경험 없는 입술이 동혁의 입을 쉴 새 없이 오물거렸다. 어디서 본 건 많지만 실천에 옮길 수 없었던 서툰 움직임이었다. 긴장했는지 숨을 내쉴 틈도 없이 입을 맞춰오는 재현에게 동혁이 팔을 감았다. 허리 위로 닿는 따뜻한 손의 온기에 안도한 재현이 힘준 어깨를 진정시켰다. 숨이 가빠 보여 고개를 살짝 떼어냈더니 눈꼬리가 축 처진다.

"싫어서 뗀 거 아니고."
"... 그럼요? 못해서요?"
"너 숨 좀 쉬라고."

재현이 작게 입을 벌려 숨을 몰아 쉬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터져나왔다. 젖은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열감 오른 혀가 고양이처럼 동혁을 핥았다. 입을 벌릴 줄 모르는 것 같아 보조개를 살짝 눌렀더니 입술 사이가 벌어진다. 여린 살을 파고든 혀에 놀랐는지 재현이 몸을 움찔했다. 작은 송곳니가 동혁의 혀를 깨물었다.

"죄송해요..."
"키스하다가 혀 깨물리긴 처음이다."
"키스 많이 해 본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작은 질투에 웃음이 번진다. 재현의 목덜미 위로 얼굴을 묻은 동혁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어린 재현의 목에서 남자 스킨 냄새가 옅게 풍겼다.

"스킨 냄새 안 어울린다."
"제가 애 같아서요?"
"애 같은 게 아니라 애 맞지."

애랑 이런 거 하는 아저씨는 뭐야... 재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얇은 티셔츠 사이로 뜨끈한 손이 들어오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차갑게 식은 피부 위로 동혁의 손이 닿았다. 느릿한 손길이 판판한 배를 쓰다듬는다.

뜨끈한 손이 허리 위를 한참 맴돌더니 헐렁한 바지 안으로 불쑥 들어온다. 재현의 상체가 동혁의 몸 위로 무너졌다. 품 안에 재현을 안아든 동혁이 드로즈 위로 재현의 성기를 문질렀다. 아직 반쯤 선 앞섶이 드로즈가 갑갑한지 빠듯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묵직한 손가락이 한참을 괴롭히고 나서야 재현의 속옷이 젖어들었다.

벌써 사정할 기미가 보이는 게 민망했는지 재현이 낮은 목소리를 긁어대며 동혁의 품을 파고들었다. 비슷한 체격이었지만 덜 자란 뼈대 때문인지 품 안으로 몸이 가볍게 안겼다. 드로즈를 살짝 치워 빳빳하게 선 성기를 꺼낸 동혁이 손을 둥글게 말아 움직였다. 온몸의 열이 몰린 앞섶에 뜨거운 손이 닿아 자극이 심했는지 재현이 힘없이 허리를 떨어가며 사정했다.

혼자 달랜 경험조차 손에 꼽는 재현에게 타인의 손이 주는 자극은 상상 이상이었다. 짓궂은 동혁이 방금 사정을 마친 재현의 귀두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둥글게 굴렸다. 흐르지 못한 파정액이 부드럽게 성기 위로 발렸다. 아직 여운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예민한 곳에 손이 닿아오자 재현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꺾었다.

"아저씨, 잠시만, 잠시만요..."
"그만해?"
"이거 이상, 흐으, 이상해..."

더운 숨을 잔뜩 머금은 호흡이 뚝뚝 끊겼다. 재현을 소파에 눕힌 동혁이 하얀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뒤로 안 해 봤을 거 아냐. 처음부터는 좀 무리겠지. 어르고 달래는 말투에도 재현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오기였다. 오기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아는 동혁이 헛웃음 지었다. 당장 빼라고 울지나 말고 말 들어.

재현이 두 손으로 제 다리를 붙잡았다. 방금 물을 뺐음에도 다시 빳빳하게 선 성기가 재현의 아랫배에 부벼졌다. 바지와 속옷을 벗어낸 동혁이 제 것을 손으로 쥐어 두어 번 흔들었다. 얌전히 다물린 재현의 허벅지 사이를 빤히 본다. 하얀 허벅지 틈새로 핏줄 선 동혁의 것이 뭉근하게 파고들었다. 젤 없이 부벼지는 마찰음이 꽤 뻑뻑했다. 동혁이 조심스럽게 허벅지 사이에서 움직일 때마다 성기가 맞닿았다. 잔뜩 열 오른 부위가 스치듯이 닿아오는 자극에 재현이 허리를 떨었다.

"뜨거워요, 아저씨..."
"천천히 할까?"
"으응, 조금만 천천히..."

얇은 몸이 흔들렸다. 재현의 발목을 손에 쥔 동혁이 손가락으로 발목 근처를 쓰다듬었다. 간지러운 기분에 입을 벌린 재현의 긴장이 풀렸는지 허벅지에 주던 힘을 풀었다. 순간 느슨해진 조임에 동혁이 몸을 더 맞붙였다. 유연성 없는 재현의 몸이 반쯤 접혔다. 불편한 자세에 도리질을 치던 재현이 손톱으로 소파를 긁어댔다. 사정감이 온다는 신호였다.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재현은 동혁의 밑에서 벗어나려 버둥댔다. 당장이라도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다리를 들고 있는 자세 탓에 안길 수가 없었다. 뻑뻑하던 허벅지 사이가 조금씩 흘러나온 파정액 때문에 질척하게 젖어갔다. 뚝뚝 끊어지는 재현의 목소리 사이로 질퍽이는 마찰음이 공백을 메꿨다.

재현이 세 번째 사정을 했을 때 동혁 역시 재현의 배 위로 파정했다. 몸 위에 사정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자극에 몸을 떨던 재현이 갑작스레 허벅지를 조여 제어하지 못한 파정액이 흩어졌다. 뒷정리를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던 동혁의 몸이 제지당한다. 얇은 다리로 동혁의 허리를 감싼 재현이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책임지셔야죠..."

재현의 행동은 가끔 계산된 구석이 있었지만 모든 것이 서툴고 어설퍼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동혁의 이상한 취향을 건드렸다. 이를테면 혹시나 싶어 혼자서 뒤를 풀고 왔다는 재현의 웅얼거림 같은 것들. 학생이 이렇게 까져도 되나 싶어 기가 찼지만 손가락을 밀어 넣고 나서야 그 어설픔을 깨달았다. 하나도 풀리지 않은 내벽이 엉성하게 물러있었다.

결국 동혁은 서랍에서 콘돔을 꺼냈다. 재현은 왜 혼자 사는 남자 집에 콘돔이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를 깨기 싫어 침묵했다. 손가락보다 몇 배는 굵은 성기가 엉덩이 사이로 부벼지자 재현이 숨을 들이쉬었다. 깊게 참은 숨이 터져나오지를 않았다.

반도 못 먹은 성기가 자꾸만 빠져나오려는 듯 움찔댔다. 처음부터 삽입은 무리라고 생각했던 동혁이 재현을 달랬다. 힘들면 뺄까? 나중에 해도 돼. 정말로 나중을 기약하는 목소리였다. 잠시 움직임이 없던 재현이 동혁의 허리에 감은 다리를 꾸욱 눌렀다. 마저 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오기로 될 게 아닌데... 동혁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재현의 허리를 주물러 힘을 풀게 했다.



* * *



아침 햇살이 지나치게 밝았다. 동혁은 눈을 뜨자마자 볼을 꼬집었다. 고개를 돌렸더니 티셔츠만 입은 채 새근새근 잠든 재현의 얼굴이 보였다. 재현의 다리 위로 이불을 덮어 준 동혁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지난 밤 제 아래에 매달려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해요. 그게 아저씨라서 더요.



@goj2ee
2022.10.02. 커미션 A타입 (13058자)

*때로는 저주가 선물일 수 있다. / 해당 대사는 영화 <추즈 오어 다이>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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