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산책

"나 너 좋아해."

인성의 특기는 웃음으로 무마하기였다. 굳이 의식 안 해도 잘 했다 그런 건. 예상된 범위 안에서는 뭐든 쳐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늘 상상할 수 없는 부분에서 일어난다. 이를테면 그닥 본인과 친하지도 않았던 동기가 냅다 고백한다던가. 인성은 순간 걸음걸이를 제대로 옮기는 법도 까먹을 뻔했다. 오른발과 오른손을 같이 움직일 뻔하다가 겨우 정신 차렸다. 오른쪽에는 영빈이 본인을 쳐다보며 걷고 있었으니까.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럴 때 쓰는 레파토리는 많았다. 나도 너 친구로서 좋아하지, 대답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거나. 혹은 있지도 않은 여자친구 끌어와서 커버치거나. 모두 실제로 몇 번 사용해본 것들이었고 어지간한 경우에는 잘 먹혔다. 안 먹히면 몇 번 더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영빈의 눈을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고백하는 사람이 원래 이런 눈을 하던가. 너무 올곧은 눈빛이라 피할 구석을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애꿎은 에어팟 케이스만 매만지다가 말했다.

"우리 근데... 그만큼 친했나."

인성이 어물거리자 영빈이 딱 잘라 말했다.

"친해야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말문이 다시 막힌 관계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원래 이런가. 그냥 거절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은 좀 다른 방향의 것이었다. 나를 언제부터 좋아했어? 어디가 좋은 거야? 왜? 어쨌든 거절할 상대한테 하기 적합한 말은 아니었다.


오늘 영빈과 만난 건 우연이었다. 영빈은 인성만치 과 생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가끔 같은 전공을 듣거나 과실에서 마주치기는 했으나 각자 다른 무리와 함께 다녔기에 애초에 말할 기회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오다가다 인사나 몇 번 하고 말았다. 개인톡도 안 했다. 카톡 상단에 뜨면 형식적인 생일 축하 메시지나 좀 보내는 게 끝이었다. 스크롤 한 번 내리면 그게 대화의 전부였다.

그랬으니 서로의 반경에 대해서는 전혀 알 턱이 없었다. 도서관 자리를 발급했는데 바로 옆자리가 영빈이었다. 칸막이가 없는 테이블이라 영빈의 옆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으니 영빈과 눈이 마주쳤다. 곧 카톡이 왔다.

오늘 몇 시까지 공부하게ㅎㅎ?
저녁 먹을때까지는 할 것 같은데 ㅋㅋㅋ
그럼 나랑 가자
저녁먹으러

굳이 거절할 이유 없어서 그러겠다고 답했다. 뭐 같은 과 동기인데 친해지면 좋지. 동갑이고 같은 복학생 처지고. 겹치는 전공도 있는데 필기 좀 공유하면 나야 좋고 쟤도 좋고. 그런 생각을 하다 금방 정신 차리고서 책을 폈다. 아 이거 수업 들은 내용 맞나. 곧 다시 덮고 싶어졌으나 옆자리의 영빈이 의식되었다. 꼭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은.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뭐라 하려나. 자기 친구들한테 꽤 엄하게 구는 것 같던데. 이따 밥이라도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해 봐야지...


그랬는데 고백이라니. 밥 잘 먹었고 얘기도 나름 재밌었고. 쿵짝 아주 잘 맞는 건 아니었으나 나쁘지 않을 만큼은 맞물려 떨어졌다. 이전보다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졸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자고 카페에서 커피 하나씩 시키고 들어가는 길에 대뜸 저런 말을 들은 것이었다. 아무 맥락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데 인성아, 하고 튀어나온 말이라 대비할 시간도 전혀 갖추지 못했다. 날것의 상태로 영빈의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근데 내가 왜 좋은데...?"
"그러게. 진짜 모르겠다... 그냥 너밖에 안 보이던데."

인정한다. 좀 별로인 질문이었다. 그런데 영빈은 꽤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인성은 본인이 영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 얘 이런 타입이었구나. 인성이 이유 모를 감정으로 눈만 조용히 껌뻑거리는 사이 커피를 한 입 빨아들인 영빈은 도서관 앞 잔디밭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 그냥 마음이 답답해서 한번 말해본 거야. 시험기간이라 그런가? 요즘 너 볼 때마다 말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말하네. 그냥 잊어버려도 돼."

인성은 직감했다. 그날 공부는 공쳤음을... 아마도 인성 혼자만.
Report ab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