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남의 사정 1


카게히라 미카(22). 도쿄 미술대학 기숙사 거주, 자소(jaso) 장학금 대상.

원래 좋아했던 것들은 솜인형 덕질, 고스나 호러, 테디베어 수집.

그럼 지금 좋아하는 건?

그건 바로...

아름다운 블론드 헤어, 기다란 속눈썹, 화려한 자수가 놓인 새하얀 레이스.

낡고 지친 대학생은 함부로 손도 댈 수 없을 것 같은 구체관절인형 덕질이었다.



동인남의 사정(우리 장르에는 신이 살고 있다)



그럼 이 가련한 동인남이 본인이 잘 파고 있던 크리피 큐트 장르를 놔두고 구체관절인형이라는 미치도록 비싸고 우아한 장르로 이동한 이유를 이제부터 알아보자.

그건 어떤 특별한 만남 때문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집에서 호러틱하지만 귀여운 테디베어를 만들고, sns에 전시하고, 검은 레이스를 뜨고 있던 카게히라 미카는 어느 날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았다.

와인빛 실크 벨벳 연미복을 입은 분홍 머리의 남자. 그는 눈만 살짝 가리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허리가 잘록하게 잡힌 연미복의 뒷자락은 무릎 뒤까지 내려오고, 자개 단추 조끼는 아이보리색에 장미 덩굴이 은사로 수놓아져 있었다.

셔츠는 흰색에 실크. 소매 끝에는 레이스 커프가 달려 있는데 손등을 반쯤 덮은 형태였다. 목에도 레이스 자보가 3단으로 겹쳐졌지만, 가운데에 상아빛 카메오 브로치로 포인트를 줘서 답답해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하의는 어떻고? 연미복과 같은 벨벳 슬랙스에 옆에 새틴 라인이 들어가 있다. 장갑도 셔츠와 같은 흰색으로 에나멜 옥스퍼드인 검은 신발과 대조를 이루고, 통일감은 조끼 주머니의 은 회중시계 사슬과 신발 은 버클로 챙겼다.

이쯤 되면 다들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 카게히라 미카는 처음엔 구체관절인형 장르에 빠진 게 아니었다. 그는 그냥 구체관절인형 장르 존잘 'Valkyrie'에 빠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튼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발키리 씨는 매번 구체관절인형을 손에 들고 사진을 찍었고, 카게히라는 그 사진을 보며 설렘을 느꼈기 때문에 굳이 발키리와 구체관절인형 마드모아젤을 구분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너무 좋다! 불타는 모에다!

카게히라 미카는 즉각 돌계(*인형 덕질 계정)를 새로 만들고 구체관절인형을 사들여 정성껏 코디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자기 인형도 마드모아젤이라 부르진 못했지만, 같은 금발의 공주님은 포기하지 못했다. 미카는 자신의 인형을 마드네라고 불렀다. 누가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들킬 팬심이었지만, 다행히 들키는 일은 지금껏 발생하지 않았다. 왜냐면...

- [RT] : 이 사람 요즘 자주 보이는데 너무 좋아~ 고스로리 스타일 귀하지!

- 카게미님 인형이랑 같이 코스하는 거 퀄리티 진심 높네 할로윈 기념 강시 코스튬 만든 거 완전 천재

그가 동경해 마지 않는 발키리와 그는 너무나도 다른 예술성을 추구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카도 발키리 같은 의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연분홍 실크 쥐스토코르에 금사 자수 조끼, 레이스 크라바트, 리본으로 묶인 반바지도 너무 보기 좋았고 일부러 색깔 맞춰 신은 흰 스타킹도 초모에였다.

마드모아젤은 또 어떻고? 발키리님과 같은 색의 파니에로 옆을 부풀린 드레스를 입었는데, 머리에 단 깃털과 리본이 또 끝내주게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상하게 미카가 펜만 들면, 레퍼런스만 따기 시작하면, 자수를 놓고 레이스를 만들기 시작하면! 발키리가 추구하는 느낌에서 점점 멀어져 결국 모든 게 원래 미카가 추구하던 스타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내는 아무리 해도 안 된데이.......'

그래도 카게히라는 좌절하진 않았다. 발키리님을 만난 것만으로, 그와 같은 판에서 덕질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분에 넘치는 행운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카게히라는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은 충격에 휩싸이게 됐다.

바로 발키리님이...... 고딕 상복 컨셉으로 의상을 만든 것이다!!

처음 sns에서 사진을 본 순간 카게히라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제 눈을 몇 번이고 비비고 멍하니 볼을 꼬집었다. 당연히 아팠다.(아얏!)

검은 벨벳 프록코트에 검은 레이스 자보. 흑옥으로 만든 브로치와 검은 장갑에 감싸인 은 손잡이 지팡이가 소름돋게 아름다웠다.

마드모아젤은 검은 크레이프 드레스에 베일이 달린 미니햇을 쓰고 있었는데 페어로 맞춘 흑옥 목걸이도 너무 잘 어울렸다.

'고스로리.......'

정확히는 고스로리가 아니라 고딕풍에 가까웠지만, 아무튼 고스로리와 너무 잘 붙을 것 같은 의상이었다. 발키리가 이런 의상도 추구하다니. 진짜 얼마나 초존잘인 거냐고. 그는 못 만들 의상도 없고, 이해하지 못할 컨셉도 없고 어쩌고.......

그러다 카게히라는 사진 밑에 짧게 남겨진 트윗을 겨우 찾아 읽었다.

- 26년 11월 22일 돌페스타(doll.Festa)에 화보집으로 참가한다는 것이다!

갖고 싶었다. 22년 인생과 맞바꿔서라도…….

그렇게 카게히라 미카는 인생 첫 동인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당연히 참관객으로 티켓을 사전 구매한 카게히라였으나 그는 이때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참관객이 아닌 부스러로 행사에 참여하게 되며, 신과 인접 부스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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