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 익셉션 上


* exception (예외)
* 25.03.28. 일부 문장 수정 (내용 변화는 없습니다.)




이츠키 슈는 우연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우연히 좋은 모티브를 발견해서, 혹은 우연히 작품의 뮤즈를 만나서. 주변의 예술가로부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고. 모티브가 되었든 뮤즈가 되었든, 그것은 전부 그걸 발견하길 원하고 향하였기에 만났을 뿐이라 단언했다. 그것은 우연히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 그걸 발견하기를 욕망하였기에 만난 인위적인 결과라 했다. 원하는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 자료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견해였다. 그에게 예술이란, 완벽히 계산된 결과물이었다. 자수 한 땀, 길이 하나 전부 계산해서 작품을 만들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황금비라 일컫는 완벽한 비율을 맞추기만 한다면, 속물들도 예술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을 거라 단언했다. 그에 걸맞게, 그의 모든 작품은 흔히들 말하는 완벽한 비율을 맞추고 있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의상은 자체의 완성도는 높았으나, 대중적이지 않은 편이었다. 잘못하면 옷을 입은 사람이 옷에 파묻힐 정도로 화려하고 고풍스러웠다. 그러나 의상 대부분이 이츠키 슈 본인에게 맞춰진 의상이었기에, 사실 그가 입으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아이러니함이 있었다. 그는 모델에 의상을 맞추기보다는, 의상에 모델을 맞추려고 하는 탓에 모델들이 손사래를 칠 정도로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러나 유학생의 신분으로 파리에서 배움을 지속하던 그에게 더는 피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다음번 작품에서는 무조건 모델을 기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만든 의상을 가지고 학기 말에 열릴 교내 런웨이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교내 런웨이는 모델과와 함께 진행하기에, 대부분은 모델과 학생들과의 협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그는 모델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만들고자 하는 것을 만들기로 했다.

당신의 의상은 훌륭합니다. 그 의상에 어울릴 모델을 찾는 게 관건이겠군요. 이츠키는 교수에게 자기 작품에 문제가 있느냐고 되물었고, 그건 아니라는 대답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런웨이를 어떻게 구상할 생각이냐는 교수의 질문에, 그는 어차피 런웨이에서 중요한 것은 의상이므로 평소처럼 그가 추구하던 스타일을 유지하겠다는 기조를 꺾지 않았다. 담당 교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당신의 기준에 충족하는 사람을 만나길 기도하죠. 교수의 말에 그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충족하는 모델을 만날 리도 전혀 없을뿐더러, 오히려 만나지 못한다면, 그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그러면 자신이 런웨이에 서면 된다고 생각했다.

학기 말 런웨이로 이번 학기를 평가받는 것이라 기간은 넉넉하다 못해 넘쳤다. 특히, 이츠키는 다른 사람에 비해 손도 빠른 편이었고, 그가 바라는바 또한 명확해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도, 구체화 시키는 것도 빨랐다. 이대로 파리에 남아서 작업을 진행할지, 혹은 일본으로 돌아갈지 고민하던 그의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는, 그렇다면 일본으로 오라 청했다. 별 희한한 이유를 들어가며 어떻게든 가족들을 모이게 하려던 분이 별다른 이유 없이 오라고 청하자, 이츠키는 기꺼이 곧바로 일본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눈앞으로 노란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는 순간 놀라 걸음을 멈추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의 발치에 노란색 은행잎이 놓여있었다. 시선을 들어 위를 보자, 노란색으로 물든 은행잎들이 푸른 하늘을 전부 가리고 있었다. 가을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노란 은행잎들이 살랑살랑 바람에 맞춰 춤추었다. 이츠키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저 멀리 보이는 소극장을 바라보았다.

걸음을 옮기며, 그는 건네받은 티켓을 다시 확인했다. 제목도 생소한데, 극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이름도 그랬다. 그가 들고 있는 티켓은 할아버지의 대리인을 통해 받은 것이었다. 아는 사람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받은 티켓이라는데 한가하니 다녀오라는 뜻이었다. 그 또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예술을 접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흔쾌히 티켓을 받아들였다.

낙엽들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목표했던 소극장 근처에 다다랐다. 극장 앞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이츠키는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입장하기엔 이른 시간이라 다들 입구 근처에서 무리 지어서 모여있었던 듯했다. 연극 팸플릿이라도 확인해볼까, 그는 로비를 둘러보고자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기 무섭게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득 채우더니 이내 부딪쳤다.

“응아… 미안타…!”
“…”

이츠키는 미간을 찌푸리며 부딪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귀에 꽂히는 특이한 말투에 신경 쓰이기 무섭게 ‘그것’이 고개를 들자, 시선을 잡아끄는 오드아이에 순간 입을 다물었다. 뇌리로 아까 본 광경이 떠올랐다. 가을의 색. 노란 은행잎과 푸른 하늘. ‘그것’의 눈은 보석으로 따지자면, 엠버와 루리였다. 금새 시선을 피하고 내리깐 시선에 그는 푹 숙인 ‘그것’의 정수리를 보았다. 양손에는 꽃다발과 의상으로 추정되는 드레스가 있었다. 연극 스태프인가, 시선으로 주욱 훑었다.

“응아아… 괜찮나? 미안타…. 내 지금 좀 많이 바빠서…. 앞을 잘 못 봐붓다.”
“…”
“어데, 다친 데는 없나? 미안하구마….”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한 시선으로 흘끔흘끔 올려다보는 오드아이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상 그렇게 세게 부딪쳤던 것도 아니었고, 들고 있던 물품들도 상해를 입힐 정도의 물건이 아니었기에 딱히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친 곳은 없으니 괜찮다. 그나저나 스태프인 모양인데, 얼른 가보는 게 좋겠군.”
“응아아… 맞다! 얼른 가야 한다. 미안타!”

이츠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것’이 고개를 번쩍 치켜든 탓에, 또다시 이색의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오드아이인 것도 특이했지만, 그 색이 상반된 색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끄는 조합이었다. 거기에 짙은 녹색 빛깔이 도는 머리카락까지. 엠버와 루리가 섞이면 그 색일 것이다. 고개를 치켜들자, ‘그것’은 머쓱하게 웃더니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려 빠르게 뛰어갔다. 뛰어가는 ‘그것’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키에 비해 비율이 나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곧 입장이 시작된다는 알림에, 그는 팸플릿을 찾으려던 걸 포기하고 극장 안으로 향했다.

‘그것’의 눈동자가 꼭 엠버와 루리를 닮았다고 생각한 탓인지, 그날 밤 그는 그것들로 장식된 장식품들로 가득 찬 전시관을 돌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그는 꿈을 떠올리며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분명, 이츠키 슈의 갈라테이아에는 부합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랬음이 틀림없다. 그는 자신의 취향이 확고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뇌리에서는 이색의 두 쌍이 떠나질 않았다. 진부한 사랑 이야기였던 연극 내용이라던가, ‘그것’이 들고 가던 드레스의 모양이라던가. 그런 것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휘발된 지 오래였다. 부딪쳤을 때의 엠버와 루리의 빛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혼자 소란스럽던 반나절이 지나고서야, 그는 ‘그것’을 런웨이에 세우고 싶었다는 것을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시선을 끄는 오드아이, 짙은 녹빛을 띄는 그 흑발까지. 붉은색 옷을 입는다면 분명 매혹적인 장미일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깨닫자마자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곧장 어제의 장소로 향했다. ‘그것’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고민은 이츠키 슈에게 하등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가 찾고자 하면, 찾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가 소극장에 도착했을 때, 극장 앞은 한산했다. 극장 내부로 들어가 확인해 보니, 극은 이미 끝난 후였다. 연극배우도 아니고, 스태프였으니 뒷정리하고 있었을 거라 판단한 그는 무작정 기다려보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스태프인지, 배우인지 모를 사람들이 극장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입구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고 그가 찾던 ‘그것’의 머리카락 색이 시야에 잡혔다. 바닥을 보고 걷는 것인지,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였다. 이츠키는 곧바로 ‘그것’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붙잡아 세웠다.

“잠깐.”
“흐앗?!”

갑자기 어깨에 닿는 느낌에 놀란 것인지 휙 돌아보는 몸은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동그랗게 커진 이색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부딪쳤다. 어제 밝은 조명 아래서도 꽤 시선을 사로잡는 눈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어둠이 빛을 흡수하듯 사위의 빛을 전부 잡아먹어, 유일하게 빛나는 두 개의 보석 같았다.  아? 어제 봤던 사람이구마. 깜짝 놀랐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것’은 애매하게 돌리다 말았던 몸을 제대로 돌려 정면으로 마주했다.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듯, 슬쩍 올려다보다 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건가. 슈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의 시야에 ‘그것’의 비어있는 두 손이 들어왔다.


“오늘은 일하지 않는 건가?”
“아이다. 일은 끝났고, 이제 돌아가려던 참이었데이~”

그런데… 무슨 일로? 오늘도 공연을 보러 왔었나? 두 눈을 휘며, 웃었다. 그쪽은 공연을 무지하게 좋아하는구마. 멋대로 결론을 내린 모습에 슈는 부정했다.

“너를 보려고 온 것이야.”
“응아…? 내를? 왜? 아…. 어제 부딪친 것 때문에?”

‘그것’은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양손을 마주 잡고는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저자세인 모습에 이츠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츠키에 비해 작은 키 탓에, 그는 시선을 내려다보며 눈대중으로 ‘그것’의 키를 어림짐작했다. 말로 어림짐작이지, 사실상 자로 잰 듯 완벽한 눈대중은 그의 특기 중 하나였다. 보아하니 키가 큰 편은 아니었기에 모델로서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 불완전함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추궁하려고 온 게 아닌 것이야. 너에게 제안하려고 온 게야.”
“제안?”
“우선은,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 질문에 대답해. 지금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 있나?”
“응아? 응아아… 정기적으로 하는 건 없는데….”

그건 다행이네. 이츠키는 이후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키, 몸무게, 나이, 그리고 연극이던, 음악이던, 예술 활동을 해본 적이 있는지 등을 물었고, ‘그것’은 왜 묻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꼬박꼬박 대답했다. 예술 활동에 관한 질문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 어제오늘 연극 스태프 일도 그쪽이 말하는 예술 활동에 포함되는 기가? 라고 대답해 이츠키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사는 곳이며, 가족관계며, 사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묻기엔 너무나도 내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것’은 기겁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매섭게 이츠키를 노려봤다. 내, 내는 종교 같은 건 안 믿는데이! ‘그것’의 말에 그는 자신이 순간 실수했음을 깨달았으나 도리어 한심하다는 듯 ’그것’을 내려다보며 질문을 마저 이어갔다.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행동에 ‘그것’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츠키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내 모델로 일해볼 생각이 있나? 이츠키를 의심스럽게 보던 두 눈이 크게 떠지더니 ‘그것’의 입이 멍하게 벌어졌다. 아름답지 않은 모습에 그는 살포시 인상을 썼다. 이츠키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친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응아…? 그게 뭔 소리가? 모델? 내가?”
“솔직히 모델로 적격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만, 너 정도면 꽤 나쁘지 않은 편이야.”

워킹이나 자세는 지금부터 내가 교정시키면, 런웨이 전까지는 문제될 것은 없을 테고. 단언하는 그의 말에 ‘그것’이 화들짝 놀란 듯 펄쩍 뛰었다.

“내, 내는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바쁘다….”
“비용은 충분히 지급할 것이니 걱정 마. 그리고 아르바이트까지 막진 않을 거다.”

아, 물론, 런웨이 두어 달 전부터는 전부 그만해야 할 테지만. 그것 또한 고려해서 지급할 테니 걱정 마. ‘그것’이 모델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갖가지를 대었지만, 이츠키는 모든 이유를 완벽하게 방어해냈다. 그는 심지어 사는 아파트에서 나와, 당분간은 같이 사는 것이 낫겠다며 벌써 앞일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게 확정되어가는 듯한 분위기에 ‘그것’은 -흡사 아이가 낼 법한 말버릇 같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좌우로 붕붕 저었다.

“너, 너무 갑작스럽데이! 내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그쪽이 누군지도 내는 모르고….”
“흠…. 내가 겨울 런웨이에 모델을 세워야 해. 내가 만든 의상을 입고. 평가를 받는 자리라 꽤 중요하거든.”
“응아… 듣기만 해도 내가 갈만한 자리가 아인데….”

‘그것’의 부정에도 이츠키는 팔짱을 끼며 반박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다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야. 그럼, 시간을 줄 테니 고민해 보는 건? 그의 제안에 ‘그것’은 가만히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층 편안해진 표정에 이츠키는 머릿속으로 어느 정도 기간이 적당한지에 대해 고민했다. 모델에 신경을 써본 경험이 드문 탓에 고민은 깊어져 갔다. 이츠키가 고민하는 걸 보던 ‘그것’은 머뭇거리다 의견을 내었다.

“그러믄… 이번주 토요일 개안나?”
“토요일?“

오늘이 화요일이니 토요일이면 나흘이었다. 일주일도 아니고 사흘도 아니고 닷새도 아닌 애매한 기간에 오히려 이츠키가 어리둥절해졌다. 그의 표정을 슬금슬금 확인하던 ‘그것’은 되묻는 말에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내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토요일 저녁에는 시간이 빈다 아이가….

“아, 그런 이유?”

어차피 일본에서 따로 정해둔 일정은 없었던 지라, 이츠키는 ‘그것’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것’은 고개를 휙휙 돌리더니 손가락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이 켜져 있는 카페였다. 토요일 8시에 저기는 개안나? 그는 일정을 머릿속에 기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흔쾌히 받아들인 모습에 ‘그것’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츠키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연락처를 요청했다. ‘그것’ 또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처를 입력하려던 두 사람의 손이 멈췄다.

“있나, 그쪽을 뭐라 부르면 되는 기가?”
“그러고 보니…. 통성명이 아직이었군. 내 이름은 이츠키 슈.”
“그으… 카게히라 미카 라고 합니더….”
“호오…?”

이츠키는 ‘그것’의 이름에 흥미로움을 느꼈다. 남성에게는 흔치 않은 이름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미카’라는 이름은 보통 남성보다는 여성 쪽에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다. 오드아이부터 시작해서, 왜소한 체구, 이름, 그리고 꼭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온몸을 꽁꽁 싸맨 것도 그러했다. 추위에 껴입은 느낌이 아니라, 스스로가 피부를 드러내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팔에 딱 맞는 이너가 아닌, 손등까지 덮을 정도의 길이면 더더욱 그러했다. 이츠키가 말없이 가만히 눈으로 훑는 것을 느낀 것인지, ‘카게히라’는 숨으려는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아까도 느낀 거였지만, 아무래도 시선을 받는 것이 불편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걸 가르칠 앞날을 생각하니 쉽지 않을 것 같아, 이츠키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카게히라’는 데굴데굴 시선을 올렸다.

“그… 다른 모델들은 그쪽을 뭐라 부르는 기가?”
“난 모델을 쓰지 않다만.”
“응아… 그으럼, 다른 사람들은 뭐라 부르나?”

당연히 이름으로 부른다. 이름? 슈? 확인하려는 듯, 슈우-하고 길게 부르자, 안 그래도 찌푸리고 있던 미간에 골이 더 패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울렁거리는 느낌에 그는 버럭 화를 냈다.

“이름으로는 부르지 마라!”
“에엥… 그럼… 이츠키 씨?”
“차라리 그게 나을 지경이군.”

에헤헤…. 실없이 웃는 모습에 이츠키는 대체 뭐가 좋다고 저리 웃는지 모르겠다며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있나, 이츠키 씨. 내도 ‘카게히라’라고 불러주면 좋겠구마.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다.”
“응후후, 그랬나? 꼭 신님 같구마.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게.”
“나는 신이 아니야. 이건, 그저 관찰과 추론의 결과일 뿐인 게야.”

‘카게히라’는 스마트폰을 토독토독 두드리고 이내 확인받으려는 듯 화면을 이츠키에게 내밀었다. ‘이츠키 씨’라고 쓰여있는 전화번호부 화면이 보였다. 그는 건네받은 스마트폰 화면에 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도 전부 입력하고 저장을 눌렀다. 맞게 입력된 것을 확인한 이츠키는 스마트폰을 다시 ‘카게히라’에게 건네주었다. 그 또한 ‘카게히라’로부터 연락처를 건네받고, 화면을 잠그고 다시 겉옷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럼, 토요일 8시에 이곳에서 보는 걸로 하지. 이츠키의 확인에 ‘카게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하게 가라앉은 표정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너는 그저 네가 이 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만 고민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도울 수 있어. ‘카게히라’는 알았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자리를 떴다.

당신의 기준에 충족하는 사람을 만나길 기도하죠. ‘카게히라’의 뒷모습을 보던 이츠키는 담당 교수가 했던 마지막 인사를 떠올렸다. 사실 ‘카게히라’는 이츠키의 기준에 충족하는 모델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완전했고, 부족했다. 특출난 거라면, 눈에 띄는 오드아이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츠키가 그를 결정한 까닭은 시선을 잡아끈다는 점이었다. 프릴과 장식을 많이 사용하는 그의 의상 특성상, 시선을 잡아끈다는 점은 꽤 큰 메리트였다. 정작, 본인은 시선을 끄는 걸 싫어하는 듯했지만. 모델의 매력을 돋보이게 만들라고 했지만, 그가 만든 옷을 소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었다.




“그으… 실은 내는… 독립하구 혼자 사느라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뭐에 재능이 있는지를 모른데이….”

나흘 만에 만난 카게히라는 자리에 앉자마자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조심조심 이츠키의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 모습에 이츠키는 어디 한 번 더 말해보라는 듯 눈짓했다. 양손을 가만 놔두지 못하고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이던 카게히라는 두 눈을 꾹 감고 외쳤다. 내 못 할 것 같데이! 카게히라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그는 스케치하고 있던 노트를 덮고 팔짱을 낀 채 카게히라를 직시했다.

“이유는?”
“내가 분명 이츠키 씨한테 폐가 될끼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츠키는 또다시 되물었다. 그의 질문에 카게히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꼭 심문하는 듯한 분위기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추궁하려는 게 아닌 게야.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어투에서 화난 기운은 딱히 느껴지지 않아, 카게히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이츠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마저도 시선이 부딪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이리저리 다른 곳을 보기 시작했지만.

“이츠키 씨도 내한테 그랬잖나…. 내가 모델에 적격은 아이라고….”
“그건 그렇지. 근데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것도 그렇지만은….”

팔짱을 풀고 턱을 괸 채 카게히라를 이리저리 훑은 이츠키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갑자기 들리는 작은 웃음소리에 카게히라는 고개를 슬쩍 들어 그를 살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너는 나만 믿거라.

“응아? 그게 뭔 소리고?”
“네 말은, 네가 너를 못 믿겠다는 거니까. 그럼 대신 너를 선택한 나를 믿으라는 것이야.”

그의 단언에 카게히라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이츠키를 직시하자, 그는 더더욱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너에게도 도전이지만, 나에게도 도전인 셈이야. 말했잖아. 난 모델은 쓰지 않았다고. 카게히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믄, 이번에도 그러믄 되지 않나? 굳이 내를 모델로 쓰지 않아도…. 핵심을 짚는 말에 이츠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난 솔직히 지금도 마네킹이나 나 이외에는 내 의상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
“너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어. 나는 그걸 이용할 생각이고.”

…그건, 이 눈 때문에? 카게히라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츠키는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겨 그가 가리키는 엠버를 보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카게히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뭐야…. 그런 거였구마….

“물론, 네 오드아이가 시선을 끄는 건 사실이지. 내가 그 눈에 시선이 이끌렸다는 점도 부정하지 않겠어.”
“…”
“그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은, 너는 내 옷을 소화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이지.”

카게히라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이츠키 씨는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내가 이츠키 씨 옷을 입어본 것도 아인데…. 그는 대답하지 않고, 아까 덮어두었던 노트를 다시 펼쳐서 카게히라 쪽으로 돌려주었다. 그곳에는 첫날 카게히라가 그에게 대답했던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두어 가지 정도의 의상 디자인이 그려져 있었다. 이츠키 씨, 이거….

“내가 그날 이후 생각난 것들을 정리한 것이야.”
“…”
“나는 화려한 게 좋아. 프릴도, 장신구도, 된다면 망토든 숄이든 전부 이용하는 편이지.”

화려함에 잡아먹힐 것인가, 아니면 그 화려함으로 만개할 것인가. 나한테는 그게 중요해. 이츠키의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에 카게히라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카게히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카게히라. 나를 믿고 하자는 게야.




카게히라가 이츠키의 모델로 일하기로 한 후, 카게히라의 생활은 하루아침 사이에 뒤바뀌었다. 이른 아침부터 집에 들이닥친 이츠키의 강권에, 카게히라는 갑작스럽게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으, 실례합니더…. 머뭇거리며 이츠키 가에 입성하게 된 카게히라는 불안한 듯 시선을 가만두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츠키는 익숙하게 카게히라를 이끌고는 자신의 옆방을 내어주었다. 대강 짐을 정리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에 카게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된 카게히라는 두 눈을 깜빡였다. 꼭 귀신에 홀린 것 같구마…. 카게히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 소중히 들고 온 테디베어를 침대 옆 협탁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이츠키의 말에 따르면, 기괴하기 짝이 없는- 미의식이라고는 보이지도 않는 흉물스러운-거라 하지만, 카게히라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협탁 위에 놓인 테디베어와 눈을 마주한 카게히라는 빙긋 웃었다.

“귀엽기만 하구만은….”

우째 이츠키 씨 취향에는 안 맞나 보구마. 새로운 환경이었지만, 익숙한 테디베어 하나만으로도 카게히라는 안도했다. 레슨,한다고 했제…. 짐도 정리하라 했꼬…. 짐가방 앞에 앉은 카게히라는 눈앞의 큰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제까지 카게히라가 보고 지내던 바깥과는 전혀 달랐다. 새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고는 으아아….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그랬제…. 왜 그랬나 모르겠구마….”

한숨을 포옥 내쉰 카게히라는 고개를 돌려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짐을 대강 정리하고 나오라며, 그를 밀어 넣은 이츠키가 저 너머 있을 테다. 연극 쪽 일은 자세히 모르지만, 다양한 일을 해봤던 카게히라에게 그날은 유난히도 어수선했다. 수선을 맡겼던 의상과 극 중 사용될 꽃다발이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나중에 연극이 끝나고, 다른 스태프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일을 담당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바뀌면서 중간에 착오가 생긴 것 같다 했다. 물품이 도착했다는 전화에, 총괄 스태프는 근처에서 무대 기물들을 확인하던 카게히라에게 픽업을 부탁했다. 수선된 의상을 받고, 무사히 도착한 꽃다발을 픽업하는 것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매우 빠듯한 시간에, 발걸음을 재촉해 뛰어가듯 빠르게 걸어 나갔다. 입장을 준비하는 듯, 관객들로 가득 찬 로비에서 끙끙거리며 겨우 인파를 빠져나와 뛰다가 이내 앞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누군가와 부딪치고 말았다. 응아아… 일진이 사납구마….

카게히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내려다보는 한 쌍의 보랏빛 눈동자의 시선이 매서웠다. 무서워…! 그는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고 하자, 오히려 그쪽은 자비롭게도 괜찮다며 오히려 그에게 서둘러야 하지 않겠냐고 조언했다. 그 말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다시금 치켜들었다. 아까보다는 풀어진 미간과 눈빛에 카게히라는 머쓱한 듯 웃고, 다시 고맙다는 듯 꾸벅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무대 뒤편으로 향하자, 총괄 스태프는 그의 손에서 물품들을 건네받았다. 흡사 폭풍이 지나가듯 일이 끝나고서야 그는 불현듯 부딪쳤던 사람에 대해 떠올렸다. 분홍색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가 신기했다. 카게히라는 슬쩍 자기 머리카락을 엄지와 검지로 끌어당겨 보았다. 봄의 벚꽃 같은 그 사람이랑은 다르게 칙칙한 검은색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연극에서 사용될 전신거울에 그가 비쳐 있었다. 거울에 비친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양쪽 눈 색도 달랐다. 그는 습관적으로 앞 머리카락을 밑으로 꾹꾹 당겼다. 당겨진 머리카락은 그의 두 눈을 가려주지 못했다.

시선을 끄는 눈을 어떻게든 숨기려 머리카락을 기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너무 길어버리면, 앞이 잘 안 보여 다치기 일쑤였다. 연극 스태프는 기물들을 많이 나르고 움직여야 해서 머리카락을 살짝 잘랐는데, 실수로 조금 더 많이 잘라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탓에 아무리 머리카락을 내려도 짧은 길이 탓에 두 눈을 가려주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닿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움츠리고 말았다. 짧게 잘린 앞머리가 신경 쓰여서 고개를 숙이고 일하다가 결국 작은 사고를 치고 말았다. 카게히라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건 단순히 운 없는 날이라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자각하기 무섭게 불운이 끊이질 않았다. 걸려서 넘어지고, 부딪치고의 반복이었다. 카게히라 씨, 조심 좀 해. 결국 총괄 스태프는 보다못해 잔소리를 내뱉었다. 오늘로 마지막이라고 대충하려는 거야? 카게히라는 재빠르게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부정했다.

그래도 그 말이 약간의 액땜 역할을 해주었던 건지, 어찌어찌 마지막 공연은 더 이상의 문제 없이 무사히 끝이 났다. 마지막 기념 회식이 있다고 했지만, 사람들과 함께하기엔 아직도 낯을 가렸던 카게히라는 급한 일이 있다는 핑계로 재빠르게 극장 밖으로 향했다. 극장 스태프 일은 힘든 만큼 보수가 좋은 편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여유시간을 계산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어깨에 닿는 감각에 흠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어두운 밤하늘이었는데도, 조명 하나 없는 어두운 사위임에도 눈에 바로 띄었다. 벚꽃 같은 머리카락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이츠키 슈’라고 소개한 그는 카게히라에게 곧바로 일을 제안했다.

“이츠키 씨는, 신기하데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모델로 만들겠다 하지 않나.”

카게히라는 눈앞의 테디베어에게 가까이 다가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기울여 협탁에 볼을 붙였다. 이렇게 보니께… 쿠마 쨩의 옷, 그 사람 눈 색이구마. 카게히라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카게히라는 항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살았다.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부터, 아르바이트에서도, 심지어 양부모님이 계시는 집에서도. 결국, 스스로가 버티지 못하고 일찍이 독립해버렸지만.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창가로 옮겼다. 눈부셨다. 이 빛을 계속 보다가는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도 그랬다.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던 그의 모습은 눈부시고, 반짝였다. 그 빛에 다가가고 싶어서 홀렸던 것일지도 몰랐다. 폐가 되고 말 거라고 고민하던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네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고 하던 그때를 떠올리자,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말한 만큼, 그것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원하는 바에 도달하고 싶다.라고.




카게히라가 몇 주 동안 이츠키를 지켜보며 깨달은 점은, 그는 지독한 완벽주의자라는 점이었다. 모델 일은 자시고, 그 관련 일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카게히라가 따라가기에 벅찰 정도였다. 어지간한 모델이었다면 두손 두발 다 들고 포기했을 법한 강도의 연습이 주어졌지만, 카게히라는 힘들다고 할지언정 주어진 바에 최선은 다했다. 물론, 노력하는 것에 비해 실력이 획기적으로 늘지는 않아, 이츠키의 잔소리를 듣곤 했지만.

“너는 재능이 없는 편은 아니야. 그저 관련해 지식이 부족했을 뿐이지. 많이 늘긴 늘었어.”
“호오, 그런 건가? 이츠키 씨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거겠제~”

오래간만에 듣는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카게히라는 연습 후 지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 어제도 아르바이트 끝나고 연습했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던 것 같데이~ 헤실거리는 모습에 이츠키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물론, 아직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 아직도 걸음이 흐느적거린다는 게야. 좀 더 힘 있게 걷도록 해.”
“응응, 알고 있데이~ 하도 이츠키 씨가 강조해서 그른가, 요즘엔 내도 모르게 평소에도 그렇게 걸으려고 하게 된다 아이가.”
“그건 좋은 일이군. 너는 희한하게도 벽에 붙어 걸어 다니는 나쁜 버릇이 있으니 말이야.”

에에, 나쁜 버릇이라니…. 그 정도는 아이다…. 부루퉁하게 그의 말에 부정하자, 이츠키는 도리어 코웃음을 치며, 주저앉아 있는 카게히라의 소매 부분을 가리켰다. 이츠키의 말을 증명하듯 유난히 헤져있는 소매가 카게히라의 시야에 닿았다. 카게히라는 겸연쩍게 웃으며 슬금슬금 양손을 등 뒤로 숨겼다. 이츠키는 혀를 차며 팔짱을 낀 채로 카게히라를 내려다보았다. 길게 내려온 앞머리 탓에 그늘진 얼굴이 우울해 보이기 일쑤였다. 자세를 낮춘 이츠키는 카게히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츠키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던 고개가 정면의 예쁜 얼굴을 향했다. 왜 그러냐는 카게히라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손을 뻗어 긴 앞머리의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슬슬 다듬어야겠어. 꽤 많이 길었네.”
“이츠키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제. 내는 별로 길다는 생각을 안 해서.”

대수롭지 않은 듯한 어투에 이츠키는 차갑게 웃으며 잡고 있던 앞머리를 불만스레 당겼다. 당겨지는 머리카락 탓에 카게히라는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당기는 힘에 따라 목을 길게 뻗었다. 이츠키 씨, 내 뭐 잘못 말했나? 끙끙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이츠키는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카게히라는 고개를 푸욱 숙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츠키는 동그란 두상에 이리저리 뻗친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살짝 덮는 길이를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적막이 감도는 연습실에, 슬쩍 고개를 든 카게히라는 턱을 살짝 쥔 채 시선을 내리깐 이츠키의 모습에 곤란한 듯 볼을 긁적였다. 카게히라가 이츠키를 아주 길게 본 건 아니지만, 이츠키는 생각에 잠길 때마다 꼭 저렇게 턱을 살짝 쥐곤 했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이 정각에 근접하자, 슬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카게히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츠키 씨. 슬슬 연습실 대여 시간이 다 된다 아이가. 내 뒷정리 좀 하고 있을게?”
“…”

카게히라의 말에도 이츠키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카게히라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놓여있는 청소도구로 간단하게 정리를 끝마친 카게히라는 짐을 챙겨 들고 이츠키에게 다가갔다. 카게히라가 이츠키의 생각을 멈추게 하려고 그의 어깨로 손을 뻗음과 동시에 이츠키는 그보다 빨리 카게히라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제비꽃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게히라는 당황해서 손을 뻗은 모양새 그대로 굳어있었다. 이츠키는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이 생각한 바를 줄줄 내뱉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조금 다듬어야겠어. 뒤쪽도 마찬가지로. 물론, 너는 어느 정도 길이감이 있는 게 어울리는 편이니 뒤쪽은 별로 차이가 도드라지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앞쪽은 뒤쪽보다는 조금 더 잘라야겠어. 너는 얼굴을 너무 가리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아. 그리고….”
“잠깐, 잠깐! 이츠키 씨, 우리 이제 나가야 한다!”

카게히라의 외침에 이츠키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대여한 시간이 끝난 정각이었다. 이츠키는 원치 않게 생각이 멈춘 탓인지 불만족스럽게 혀를 찼다. 연습실을 나가려는 그의 모습에 카게히라는 한숨을 포옥 내쉬고 그 뒤를 쫓았다.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하늘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카게히라는 이츠키와 걸음걸이를 맞추며 같이 걸었다.

“그래서 이츠키 씨. 하려던 말은 머리카락 다듬는다는 이야기?”
“아니, 의상에 대한 대략적인 생각이 났다 만, 말로 설명해선 어차피 네가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에에… 이츠키 씨가 너무 어렵게만 말하니까 그런 거다….”

카게히라의 볼멘소리에 이츠키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나랑 몇 달은 같이 일해야 할 사이이니, 너도 좀 배우려고 노력해보도록 해. 이츠키의 말에 카게히라는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메고 있던 가방을 추슬렀다. 카게히라의 머쓱한 웃음에도 이츠키는 단호했다. 그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걷던 카게히라는 흘끗 이츠키를 바라보았다. 올곧게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선이 날렵했다. 지는 태양 빛을 정면으로 받아서인지, 종교화 속 절대 신처럼 고귀해 보였다. 카게히라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보라색 눈동자가 움직였다. 무감한 눈빛에 카게히라는 지레 겁을 먹고,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가만 보던 이츠키는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바보인 너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눈으로 보여줄 테니 걱정 마.




이츠키는 그 말을 증명하듯,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스케치를 시작했다. 관리라는 명목으로 항상 이츠키가 식사를 준비했기에 졸지에 카게히라는 이츠키의 스케치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을 보며 카게히라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눈꺼풀로 반쯤 가려진 보라색의 두 눈, 다물린 입술, 그리고 연필을 쥔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까지. 카게히라는 가만히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는 말을 입증하듯, 슥슥 그려가는 모습에 카게히라는 순수하게 놀랐다. 예술에는 문외한인 카게히라는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가인지 정확히 체감할 수는 없었지만, 생각을 곧바로 구체화해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연필이 종이에 쓸리며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메웠다.

슬슬 집중력이 깨지던 카게히라를 깨우듯, 이츠키의 연필이 멈추었다. 이츠키는 완료한 스케치를 카게히라 쪽으로 밀어주었다. 카게히라의 시선이 스케치 된 의상을 향하자, 이츠키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목 부분은 흰색의 프릴을 써서 덮고, 어깨 부분에도 포인트로 프릴이 들어가면 좋겠어. 손가락이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하자 카게히라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장신구부터 신발 밑창까지 설명하는 모습에 카게히라는 헤에, 입을 벌리며 놀랐다. 대략적인 설명을 끝마친 이츠키는 카게히라에게 눈짓했다.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 말해도 말이제…. 내가 아는 게 있어야 말이제…. 이츠키 씨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데이.”

으음, 근데 말이제. 머뭇거리며 말을 하다 말고 슬쩍 이츠키의 눈치를 보는 모습에 이츠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하게 말하라는 이츠키의 허락에 카게히라는 머쓱하게 웃으며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츠키 씨가 만든 거, 진짜 엄청 예쁘다. 화려하고…. 장신구도 많아서 반짝반짝할 것 같데이. 카게히라의 의견에 이츠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이츠키의 긍정에 카게히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츠키 씨한테는 잘 어울릴 것 같은 의상이라 생각한다. 근데 내한테 이런 옷이 어울릴까 싶은 생각이 들어가꼬.”
“…”

카게히라의 말에 이츠키는 매서운 눈빛으로 카게히라를 머리부터 훑기 시작했다. 매서운 눈빛에 카게히라는 놀라 양손을 앞으로 뻗어 흔들며 울상을 지었다. 물론 이츠키 씨 의상이 이상하다던가, 별로라든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이다! 당황한 카게히라의 외침에도 이츠키는 스케치한 의상과 카게히라를 매치하기 시작했다. 이츠키의 기준에도 다소 화려하긴 해도 이 정도면 카게히라가 소화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완벽하게 어울린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예 소화하지 못할 정돈 아니었다. 이츠키의 기준에 의상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카게히라 미카라는 사람의 매력이 전부 드러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에 이츠키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알겠어.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보는 게 맞겠어.”
“응아… 그, 이츠키 씨 의상이 이상하다던가 그런 건 아이다…. 내가 그렇게 화려한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가꼬…. 잘 모르겠어서….”
“알아들었다고 했잖아. 우선은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저녁을 먹는 게 좋겠어.”

슬금슬금 이츠키의 눈치를 보며 그의 뒤를 따르던 카게히라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저녁 식사 준비하는 이츠키의 옆에서 카게히라는 평소처럼 식기를 나르며 같이 저녁 준비하기 시작했다. 채소를 손질하는 이츠키의 머릿속은 여러 생각으로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의상에 부족한 점은 없었다. 물론 카게히라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채소를 손질하다 말고 이츠키는 불쾌한 듯 이마를 붙잡았다. 아쉽다? 그로서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가 만든 의상은 언제나 최상의 결과물이었다. 아쉽다는 느낌이 끼어들 틈조차 없었을 정도로. 이츠키는 식탁 위에 식기를 놓는 카게히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다듬지 않아 너저분하게 느껴지는 짙은 색의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맞춰 하늘하늘 흔들렸다. 그와는 전혀 다른 어두운 밤의 색,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이리저리 흩날리는 가느다란 머리카락. 이츠키는 두 눈을 꾸욱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것은 난제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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