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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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판14의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경 쓰시는 분들께는 열람을 권장드리지 않습니다. 만약 이 문제로 독백 감상에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리베주한테 스포 없는 요약을 요청해주시길 바랍니다.
#파판14의 인게임 대사를 그대로 가져온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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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스가 짐승을 베어 넘긴다. 괴물이 죽은 다음에는 또 괴물을 벤다. 목을 날린다. 허리를 자른다. 대가리를 반으로 가른다. 언젠가 인간이었던 존재라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인간의 형상이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제노스한테 인간은 의미가 없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지껄이는 윤리와 도덕은 가치를 잃은지 오래다. 제노스의 아버지는 자신의 삼촌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정말로 가족이 누구보다도 사랑해야 할 관계라면, 패륜을 저지른 황제를 국민들은 어째서 그렇게 추앙했단 말인가? 갈레말 제국은 인간을 무참히 학살한지 오래되었다. 정말로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라면, 제국 신민들은 중죄를 저지르고도 어떻게 머리를 뻣뻣이 들고 다닐 수 있는가?
도덕은 가변적이다. 영민한 제노스는 어린 나이에 그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눈 깜짝할 새 판도가 뒤바뀌는 놀음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추구할만한 다른 가치가 있던 것도 아니다. 애초에, 쾌락 또한 순간이었다. 진미를 씹어도 향미는 스쳐 지나갈 뿐이요 향락을 일삼아도 몇 초가 지나면 허무함이 밀려올 따름이다. 학문을 배우는 재미를 알았다. 하지만 금세 질렸다. 자애를 베푸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찰나 속에 반짝이다가 한순간에 꺼져버린다. 제노스는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어떤가? 진리를 깨닫지 못 한 채 눈 앞의 가치에 매달리기 급급해 의미 없는 발버둥을 반복한다. 핵심을 꿰뚫어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제노스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없다.
딱 한 사람, 리베리우스를 제외하고.
제노스는 리베리우스가 아직 리베리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던 시절을 기억한다. 동방 대륙 원정을 처음 나갔을 때, 한심한 야만족한테 선전포고문을 읊는 장교의 뒤에서 제노스는 허공을 올려다봤다. 이번 사냥은 그저 그런 실력의 제국군이 어중이떠중이들을 이럭저럭 상대할 뿐인 재미없는 사냥이 될 것이다. 전력차가 심하게 났기에 패배를 점칠 필요가 없었다. 시시한 임무에 제노스는 애초부터 흥미를 갖지 않았다.
지루한 시간이 언제 끝나나 궁금해하던 와중, 쓰레기들 사이에서 그나마 봐줄만한 원석 하나를 발견했다. 뿔 달린 야만족들은 제노스가 아닌 최전방의 장교한테 온 신경을 쏟았다. 시끄러운 틈바구니에서 제노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새끼 야만족 한 명밖에 없었다. 제노스는 그 눈을 알았다. 사냥견이 토끼를 응시하는 표정이었다.
수십이 넘는 아우라 부족 중에서 제노스를 사냥하러 온 건 단 한 명이다. 한손에 장검을 들었던 에르킨은 이 무리를 통솔하는 자가 누구인지 꿰뚫어보는 시야가 있으며 제국군의 감시망을 돌파할 실력 또한 갖췄다. 장정 십수 명한테 제압당해 피를 흘리는 에르킨을 내려다보면서 제노스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 자라면 남들과 다를지도 모른다. 겨우 찾은 원석이 타인한테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는 강함을 그 속에 지녔기를 바랐다. 자신과 같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서, 호적수가 될만한 사람이어서, 완벽히 몰두할 수 있을만한 행복을 선사해주길 희망했다.
옛날 이야기에 으레 나오곤 하는 그 설레임을⋯ 이름을 떨친 영웅이 느꼈을 법한 전투의 고양감을⋯⋯.
제노스는 그것을 위해 살아가기로 스스로 선택했다. 싸움은 제노스의 삶의 목적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눈 위로 이어지던 제노스의 발자국이 멈추었다. 제노스는 푸른 눈동자를 굴려 발언자의 위치를 찾았다. 제국식 외투를 착용했고, 허리에는 제국군 병사한테 주어지는 보급형 검을 패용했다. 별 볼 일 없는 떨거지다.
제노스는 리베리우스가 저것과 함께 다니는 이유가 궁금했다. 제노스를 대하던 태도를 보아 제국 출신이라면 치를 떨며 싫어할 거라 예상했었는데. 리베리우스는 어금니를 가는 제국 군인과 한 편에 서 있었으며, 지금은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듯 몇 명 안 되는 무리의 뒤편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그가 말하는 선악 또한 제노스가 모르던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음이 틀림 없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하잘것없는 가치에 빠질 바에야 자신과 함께 싸우는 게 훨씬 행복했을 텐데. 제노스는 리베리우스를 이해하지 못 했다.
"갈레말 제국이 무너졌어⋯⋯ 우리의 조국이⋯⋯ 너희가 다스리던 나라가! 나처럼 군대에 있던 사람만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민간인까지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제노스는 리베리우스가 제 품의 어린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심경이 많이 복잡해보였다. 백발의 여자가 어깨의 손을 다독여주는 것을 위안 삼아 본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같다. ⋯ 신기했다.
"너희가 원해서 벌인 짓이라고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사실이라면 대체 왜⋯!!"
"모두 사실이다. 이제 와서 보자면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제노스⋯⋯ 이 자식⋯⋯!!"
타인의 언행이 감정이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가?
권태로운 눈이 군인한테로 굴러갔다. 거기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유가 있으면 괜찮아지나?"
"뭐라고⋯⋯?"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면 눈앞에 벌어진 일들을 용납했을 거냔 얘기다. 만약 그렇다면 네놈들은 역시 어리석은 짐승⋯⋯ 사냥을 당하는 존재일 테지. 세상 만사는 언제나 유리한 누군가가 생기도록 흘러간다. 어떠한 이유라도 명분이라도, 선악이라 하는 것조차도. 갈레말이라는 나라의 중심부에서 수도 없이 볼 수 있지 않았나. 서로 죽고 죽이는 광경 속에서 올바름이 몇 번이고 뒤집히는 꼴을⋯⋯. 혹은 민중이 의기양양하게 내걸었던 정의가 계략으로 선동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제노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에선 유성우가 지상으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네놈은 지금 내게 왜냐고 물었지. ⋯⋯ 한심하기 짝이 없군. 현실을 납득하기 위한 이유를 타인 따위에게 물어서 뭐가 된다는 거지? 그런 건 설령 땅 끝까지, 하늘 끝까지 가서 묻는다 한들 타인의 입장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생을 살면서 거기에 의미를, 답을 내놓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찰나동안 빛을 내어 순식간에 사라지는 유성우나 인간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전부 하나같이 시시하다.
리베리우스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네가 스스로 낸 답이 검을 뽑는 일이라면 나는 나의 명분대로 네 몸을 내 검의 양분으로 삼아주마."
"⋯⋯."
이름 모를 군인은 검 손잡이에 부들거리는 손을 올려놓았다. 당장이라도 발검할 듯한 자세였다. 제국민이 여러 실리와 이상을 머릿속에서 저울질했다.
"⋯⋯ 지금 당장이라도 슬픔과 울분을 모두 뱉어내면서 네놈을 때려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게 절망이 되고 괴물을 낳아 비극으로 이어진다면⋯⋯ 나는 너 때문에 피를 나눈 동료를 더는 잃고 싶지 않아. 꺼져⋯⋯! 그리고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혹시나 해서 한 줌의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역시나 이렇다. 제노스의 머릿속에서 군인의 존재는 빠르게 잊혀졌고, 관심이 순식간에 리베리우스로 옮겨졌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리베리우스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제노스. 어떤 면에선 네 말도 옳은 말이야. 방금 말을 한 사람이 네놈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박수를 치며 칭찬을 쏟아내고 있었을걸."
"⋯⋯ 호오."
"하지만 너따위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가장 유감스럽네. 너의 부도덕을 정당화하려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참 안타까워. 네 주제를 알아."
"벗이여, 이러니 내가 너한테 늘 실망한다는 거다. 네게는 분명 나와 똑같은 걸 선택할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다⋯⋯."
"나는 내 삶이 다 할 때까지 인간으로 남고 싶거든. 너와는 달리."
흔히 보이던 웃음 하나 내어주지 않는 리베리우스의 품에 계속 안겨있던 여자 아이가 리베리우스의 말을 받았다. 제 분에 못 이겨 무심코 서두를 던졌다는 느낌이 났다.
"제노스,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은 확실히 강해. 일리는 있다고 봐. 하지만 그걸로 타인을 상처입히면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고독할 거야. 당신이랑 전투든 뭐든 하고싶어할 리가 없어."
"⋯⋯ 알리제."
"남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본인이 즐길 생각만 하지 말고 함께 즐기려고 해야지. 그런 당연한 것도 모르겠다면⋯ 영원히 거절당하시든가."
제노스를 노려보는 눈매는 비웃음을 내보이는 리베리우스와 닮았고,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표정 또한 전투에 몰입한 리베리우스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여자아이를 리베리우스가 다독여주는 모습을 제노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노스의 기억과 달리 리베리우스의 표정이 퍽 부드러웠다.
"알리제. 괜찮아요. 하지 말아요. 당신이 굳이 힘들여서 한 소리 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저게 짜증나게 하잖아⋯!"
"알아요. 그래도 저게 우리가 하는 말을 들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말을 조금이라도 들으려 했다면 애초에 사태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죠. 알리제 입만 아플 거예요."
리베리우스는 제노스를 보지 않았다.
"저한텐 알리제가 있으니 괜찮아요. 저를 위해 화내려 해줘서 고마워요."
제노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망막 위에 지금 장면이 오래도록 남는다. 천천히 몸을 돌려, 제노스는 옛 갈레말 제국 터로부터 떠나가기 시작했다.
눈밭 위에 남는 발자국은 한 줄밖에 없다. 바다를 건너면서도, 숲을 지나면서도, 사막을 가로지르면서도 제노스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걷는 것을 어색하게 여겼던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제노스는 혼자 있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쾌감이나 희열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만 같다.
발길이 닿고 닿아 지금 도착한 곳은 알라미고의 공중 정원이다. 일전에 두 사람이 맞서 싸웠던 장소이며, 제노스의 삶이 한 번 막을 내렸던 그 곳이다. 이제는 볼일이 없는 알라미고 왕궁에 굳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제노스는 알지 못 했다. 그저 예전처럼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공간에서 선회한다.
날씨는 건조하고 후덥지근하건만 여전히 설원 위의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남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본인이 즐길 생각만 하지 말라고 했던가⋯⋯."
제노스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결판을 지었을 때, 나는 네게 뭘 원했지⋯⋯?"
너는 내게 뭘 원했지?
제노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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