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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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백은 파이널판타지14의 크리티컬한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파판14 기반캐의 과거사를 다루는 독백이므로 리베주가 미처 인식하지 못 한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포함됐을 수 있습니다.
#구토, 부상, 유혈, 사망 묘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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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로 에르킨은 하루가 멀다하고 제노스한테 불려 나갔다. 에르킨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황자라는 놈이 원래 다 이런 건가? 귀하디 귀한 옥체에 흠집이 나면 천지가 뒤집힐 듯이 날뛰는 세습귀족과 제노스는 달랐다. 얼마나 부상을 입든 상관 없이 전투에 만전을 가하고는 했다. 마치 자신이 이 곳에서 죽어버려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리고 그건 에르킨도 마찬가지였다.
"윽......!"
척추를 훑고 지나가는 짜릿함이 있다. 이는 전투의 희열을 비유한 표현이 아니다. 죄수의 표현임을 증빙하는 초커에서 고압 전류가 단번에 방출되었고 에르킨은 속절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제노스의 부상이 일정치에 다다르거든 대련장을 감시하던 시종이 초커로 신호를 보낸다. 오늘의 대련은 여기서 끝이다, 라고.
당초에는 전기를 맞든 말든 전투를 이어가려고 했었다. 죽을만치 아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 결과 에르킨은 전투 중간에 기절해버려 며칠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제노스한테 불려가서 또 싸우고 또 기절하고... 그것이 몇 번 반복되고서야 에르킨은 포기했다. 살짝 짜릿한 알람이라 생각하면 편했다.
목에 겹겹이 쌓인 화상을 메만지는 에르킨을 제노스는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검집에 검을 집어넣는 행동에서 미련이 묻어나왔다.
"또 부르지."
"그러시겠지."
에르킨이 습관처럼 비아냥거렸다. 이 정도로는 움찔하지도 않는 걸 알고 있다. 초커에 연결된 쇠사슬에 끌려 대련장을 나가는 에르킨한테 제노스가 말을 걸었다.
"내일은 검술 수련을 받을 예정이다만 참석하고 싶나?"
"수련? ... 어차피 나랑 치고박고 싸우는 거잖아? 나한테 선택권이 어디 있어."
제노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검술 선생을 새로 하나 구했다. 나한테는 질이 낮은 교본밖에 없거든."
'질이 낮은 교본'이라 할 때 제노스는 에르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감히 나한테서 칼 쓰는 법을 훔쳐가려 한 건가, 에르킨이 눈살을 왈칵 찌푸렸다. 어쩜 이렇게까지 건방질까!
"그거 기대되는데...!"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한껏 찢는다. 이미 한바탕 싸우고 난 뒤면서도 당장 2차전을 시작할 것만 같은 기세다.
"어디 한번 해봐. 날 죽일 실력이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보자고!"
효과는 발군이었다. 도마인 선생을 들인 이후로 제노스의 발전 속도는 날개를 단 듯 했다. (식민지에서 차출한 인력이라는 말을 듣고 에르킨은 혀를 찼다. 제국이란!) 에르킨의 수를 읽지 못 한 게 언제냐는 듯 칼을 맞받아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이제는 까딱 잘못했다간 공세의 주도권이 제노스한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정말 놀라운 성장이었다! 웬만한 사냥꾼들도 에르킨한테서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었다. 그걸 지금 이 열네살 꼬맹이가 해낸 것이다.
신체는 힘들었으나 정신은 괴롭지 않았다. 지하 감옥의 차가운 바닥도 버틸만 했다. 대련장에서 잔뜩 흘린 땀을 식히는 데에 돌바닥이 도움이 되는 면도 있었다. 산악지대에서 생포되었을 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곳 생활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감옥 바닥에 몸을 옹송그리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제노스가 비책을 하나 생각해 냈다던데 그게 무얼까? 결정력이 약하다는 제노스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술일까? 아니면 특유의 추진력을 더욱 살리는 계책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에르킨은 양쪽 모두가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일 제노스가 어떤 걸 보여줄지 정말 기대된다.......
"......."
에르킨이 눈을 홉뜬다.
내가 방금 뭐라고 생각한 거야?
"...... 기대된다고?"
제노스와 싸우는 것이 즐겁다고 했나? 내가? 제국으로 인해 가족도 고향도 잃어버린 자신이, 제국의 황자와 보내는 시간을 재밌어 했다고?
내가 감히 즐거워할 자격이 있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꼬리를 쓸었다. 어느샌가 입꼬리 끝이 슬그머니 올라가 있었다. 에르킨은 웃고 있었다. 제노스와 함께 있는 게 재밌다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아니야!"
쾅.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냐! 그렇게 느낀 적 없어!"
다시 한 번 더. 아릿한 통증으로 벌을 대신한다. 제노스는 에르킨이 분노를 느껴 마땅한 상대다. 또한 분노를 느껴야만 하는 상대이기도 하다. 수탈과 탄압에서 이득을 얻는 침략자, 평화를 깨부순 잔해 위에서 영화를 누리는 족속, 이웃의 시체를 밟으며 걸어왔을 학살자...
그런 상대와 싸우면서 희열을 느껴서야 마치 짐승과도 같지 않은가.
"우... 웩,"
한번 인식하기 시작하자 거부감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결국 참지 못 하고 속을 게워낸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불의를 멀리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처럼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자신 또한 자신을 거두어둔 그들처럼 선과 정의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에르킨은 짐승이 아니었으니까.
"께헥, 흑."
역겨운 자신을 밀어내기 위해 신체는 계속해서 내면을 밀어냈다. 간수 하나가 창살을 쿵쿵 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복되는 강도 높은 노역에 밤새 앓는 식민지인은 많다, 저 간수도 곧 관심을 잃고 떠나갈 거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는 무엇 하나 성치 못 한 사람들이 사지를 널브러뜨리고 있겠지.
심하게 떨리는 온 몸은 도통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르킨은 양팔을 감싸안은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 에르킨은 저들과 함께 해야 했다. 제노스같은 타도해야 할 악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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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제노스의 방으로 다시 불려갔을 때. 지난날의 다짐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소식을 하나 들었다.
"그 남자는 죽었다."
손바닥에 유난히 심한 상처가 나있길래 그에 대해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이렇다. 제국인이 선천적으로 쓸 수 없는 '검격'을 따라하기 위해 손에 에테르 크리스탈을 박아넣었고, 그 결과 검술 선생을 이길 실력을 갖추게 되어.
그래서 죽였다고 했다. 제노스가 이길 수 있었으니까, 죽었다.
"...... 죽일 필요까지 있었어?"
검날을 햇빛에 비추어보던 제노스는 날에 반사된 에르킨의 상을 눈에 담았다. 몇 날 며칠을 함께 한 상대에 대한 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어리석은 질문이군. 죽일 이유가 있던 게 아니라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뿐."
"......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나는 그 자와의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넘지 못 할 벽을 뛰어넘기 위해 말 그대로 온몸을 갈아넣었지. 죽을 각오로 전투에 모든 걸 쏟아부었고 그 결과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다... 당연한 결과 아닌가."
"......"
제노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라면 이해하고 있을 텐데."
이해할 수 있었다.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에르킨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턱은 아래로 잡아당겨졌고 오랫동안 자르지 못 한 머리카락은 그의 두 눈에 음영을 드리웠다. 느릿한 속도로, 그는 검집을 잡았다.
"...... 제노스."
검은 검집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허리춤을 벗어난 검집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르킨의 손을 벗어난 검을 빤히 바라보던 제노스는 이내 시선을 에르킨의 얼굴로 돌렸다.
"나는 너와 싸우지 않을 거야."
"... 검을 들어라."
"너와 싸우지 않겠다고 말 했어..."
에르킨이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제노스가 칼을 빼들었다. 날카로운 금속질 소리가 선연하다.
"무기를 들어라, 에무킨 파호드."
에르킨은 움직이지 않았다. 칼끝을 겨눈 제노스가 돌진해올 때조차도,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나와 싸우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푹. 살덩이를 관통하는 불쾌한 감각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에르킨은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깊이 가라앉아 도리어 굳게 굳은 눈동자만이 제노스를 향할 뿐이었다.
"그럼 죽이든가. 검술 선생님한테 그랬던 것처럼."
"... 이해할 수가 없군. 그 자의 죽음이 네놈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내 눈앞에 있는 게 갈레말 제국의 황자인 이상 관련이 없을 수가 없을 거야."
칼을 털어내듯 빼내자 옆구리가 크게 베인다. 후두둑, 피가 비오듯이 쏟아진다. 에르킨도 사람인 이상 고통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을 물러난다.
"그따위 시시한 것에 연연하지 마라. 신분이니 정치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저 허울에 불과하단 말이다......!"
어금니가 뿌득 갈린다. 고통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다. 눈앞이 시뻘개지는 걸 고스란히 느끼며 에르킨이 배에서부터 소리를 끌어올린다.
"그렇다면 버려보든가...! 네가 나를 옆에 둘 수 있던 것도, 강해지기 위한 수단을 고르고 쓸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다 잘난 황자라는 직위 덕분이잖아! 어디 한번 그걸 모조리 버리고 흔적도 없이 불태워 보라고! 보나마나 시도도 못 할걸!"
"... 상대할 가치도 없는 말이군."
"왜냐하면 너희가 탐욕에 찌든 짐승이니까──!!"
크게 치켜든 검이 에르킨을 길게 찢는다. 검의 궤도, 칼날의 각도, 힘의 세기가 모두 속속들이 읽혔지만, 에르킨은 그저 밀쳐지는 대로 넘어지기만 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피웅덩이가 에르킨의 옷을 서서히 물들여갔다.
천천히 에르킨의 머리맡으로 걸어온 제노스는 검끝을 에르킨의 눈 앞에 겨눴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무기를 들고 나와 싸워라."
에르킨의 푸른 눈이 제노스를 응시한다. 무언가를 열망하는 눈이었으나 그것이 코 앞의 피냄새는 아닐 터였다.
"... 내 말대로 해준다면 얼마든지."
네 특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면 죽여라. 말에 담긴 속뜻을 제노스 또한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치를 먼저 그만둔 쪽은 제노스였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그는 말없이 발을 돌렸다. 얼마 안 가 시종 몇 명이 방에 들어와 에르킨을 끌고 나갔다. 그 날의 만남은 그것이 끝이었다.
한동안 제노스는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에르킨을 자주 불러세웠다. 그리고 그 때마다 제노스는 칼을 들었으며, 에르킨은 바닥에 누웠다. 언젠가는 외압에 의해 억지로 쓰러졌던 에르킨이었으나 이제는 다르다. 에르킨은 스스로의 의지로 싸움을 그만두었다. 그저 제노스가 자신을 죽이지 않는 이유를 의아하게 여기기만 하며, 모든 욕망 추구의 행동을 멈춰버린 것이다.
그런 날이 반복되자 호출 빈도는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 한 달에 한 번으로, 그것이 분기 별로 늘어졌다.
제노스를 모시는 시종들에겐 그것이 참으로 골칫거리였다. 다른 죄수들처럼 노역으로 부려먹자니 제노스의 눈치가 보이고, 이전처럼 가만히 놔두자니 제노스가 가지고 노는 횟수가 적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계륵같은 입장이 되어 에르킨은 살아갔다.
그것이 수 년이었다. 오래토록 이어질 것 같았던 생활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끝이 났다.
지상으로 추락한 붉은 달, 제7재해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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