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로가 날뛰는 김에 적기 시작했던 독백로그


#이 독백은 파이널판타지14의 크리티컬한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파판14 기반캐의 과거사를 다루는 독백이므로 리베주가 미처 인식하지 못 한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포함됐을 수 있습니다.
#필터링 없는 욕설을 포함합니다.
#리베주는 절대로 식민사관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옹호하면 리베주 아빠가 윤석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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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리베리우스가 아직 리베리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의 이야기이다.
미래에 리베리우스라 불릴 소년, 에르킨 다무 파호드는 십수 년 만에 파호드 부족으로 돌아왔다. 젖먹이었던 시절 그의 양친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제국군의 침략에서 도망친 이래 처음이었다. 당연히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그 어린 아이가 산간 마을에 오고 싶어하리라 예상했던 사람도 없었다. 실제로 마을 어른 중 한 명은 에르킨한테 왜 마을로 돌아왔느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묻기도 했다. 좋은 나라에 입양갔으면 그곳에서 등 따숩게 살 수 있지 않느냐면서.

에르킨도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르킨은 그 정갈하고 엄숙한 도시에서 살 수 없었다. 매일같이 숨이 막혔다. 본인조차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었으나, 사실이 그랬다. 에르킨은 차라리 영원히 정착하지 아니한 채로 돌산을 떠도는 파호드 부족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여기라면 제대로 숨을 쉬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평온한 나날은 길게 가지 않았다. 갈레말 제국군 중대가 기어코 능선을 넘어와 오지에 거주하던 토착 민족한테까지 총부리를 겨누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그러나 계속해서 항전한다면 씨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키겠다. 중대장의 전령이 그렇게 말했었다.

"어르신, 난 당최 이해를 못 하겠소. 저쪽에서 목숨은 살려주겠다 하지 않았소?" 언젠가 에르킨한테 치즈덩이를 나눠주었던 어른이 말했다. "저들의 무기가 나무를 불태우던 걸 생각해보시오. 우리의 창대로는 상대조차 안 될 게요. 내가 똑똑히 보아 알고 있소!"

마을에서 가장 넓은 천막집 내부는 수많은 말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침착하게 주장을 펼치는 토론가는 차라리 양반이다. 지레 겁먹어 때 이른 절망에 빠진 사람도 여럿이며 어른들의 분위기에 그대로 노출된 아이들은 말을 잃거나 말이 너무 많거나 둘 중 하나를 택했다. 에르킨이 사랑했던 산바람은 유독 그날 밤에만 잠잠했다. 바람 없이도 자애로운 달이 없는 밤공기는 충분히 서늘했다.

마을에서 가장 지혜로운 이, 부족장이 목소리를 내었다.

"아지즈야, 너도 알지 않더냐, 가만히 고개를 숙여서야 어찌 우리가 긍지 높은 파호드족이라 할 수 있겠느냐. 저들이 우리한테 치욕을 주더라도..."
"그 놈의 긍지가 우리 목숨까지 살려준단 말이오? 카키모라족이 어떻게 됐는지를 생각해 보시오. 거대한 철덩이가 불을 뿜자 그 이름난 전사도 맥을 못 추리고 쓰러지지 않았소이까! 난 그런 전쟁터로 우리 아들딸은 못 보내오."
"입 조심하시오! 듣자듣자하니 안 되겠군, 차라리 여섯 살 난 자네 딸이 더 용맹하겠소! 시작하지도 않은 싸움을 벌써부터 두려워해서야 어쩌자는 게요!"
"그렇지만 아지즈의 말이 틀리지는 않잖소. 그들을 이길 계책이라도 있는 게요?"
"수로만 봐도 우리가 질 게 뻔히 보이는 것을..."
"다른 부족들이랑은 뭐 이길 걸 알고 싸웠나..."

말. 말. 말이 많다. 에르킨은 머릿속에 점점 짜증이 쌓이는 걸 느낀다. 경청의 방법도 모르는 것들이 자신의 발언만 옳다며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에르킨은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상태가...

"아저씨! 그거 아니에요! 잘못 알고 계세요!"
"도마국을 떠올려봐요! 누나는 거기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봤잖아요!"
"제국에는 절대 가면 안 된다니까요!"

... 아무리 소리를 질러봐도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열다섯밖에 되지 못 한 소년은 성인 남성은 물론이고 웬만한 성인 여성보다도 키가 작았다. 게다가 마을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는 신세이기까지 한데, 아무리 까치발을 들고 팔을 올린다 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너무 답답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학교에서는 적어도 다들 상대방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했었는데!

"다 조용히─!"

부족장이 지팡이를 세게 내리찍었다. 지나치게 흥분하여 시장바닥처럼 떠들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든다. 에르킨은 부족장한테 사회자의 역할을 기대하며 그를 바라보았고,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채 부족장은 마른 기침을 몇 번 했다.

"한 사람씩 좀 말 해라, 이것들아. 여전히 쓸데없이 팔팔하니 이 늙은이가 기쁘기야 하다만 도가 지나치지 않느냐. 너무 시끄러워서 뿔이 다 아프다. 한 명 씩, 돌아가면서, 잘 알아먹었느냐?"

부족장은 지팡이로 옆 사람을 가리켰다.

"네가 먼저 말해보거라."

염원하던 발언 기회가 에르킨한테 찾아왔다. 그가 제일 배운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그가 존경받는 위치여서도 아닌, 그저 우연히 부족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얻은 기회다. 하지만 이것만 해도 에르킨한테는 큰 기회다. 그는 말할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부족 사람들을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에르킨은 떨리는 손을 가슴 앞에 그러모았다.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제국이랑 싸워도 괜찮아요. 군인들한테서 도망쳐도 괜찮아요. 하지만 절대로 저들한테 항복해서는 안 돼요.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해요."

심장이 바쁘게 뛰어 가쁜 숨을 정돈했다. 그 틈새로 부족 어른 하나가 말을 끼어들었다.

"도망치는 거나 항복하는 거나 뭐가 다른지 나는 모르겠구나."
"아직 말하고 있잖느냐."

부족장이 지팡이를 바닥에 찍으며 질책했다. 에르킨은 그 부족민과 눈을 마주했다.

"... 오사드 대륙 안에서는 동방 연합이, 그리고 대륙 바깥에서는 알라미고가 갈레말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어요. 알라미고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아세요? 노예가 된 것마냥 착취당하는 데다가 인간만도 못 한 취급을 받으며 모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요. 도마국 사람들은 여기 사람들도 아는 분들이 많을걸요? 다들 보셨었죠? 그게 사람 사는 꼴이 맞아요? 다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을 거 아녜요!"

적절한 어투, 적절한 손짓, 적절한 표정을 곁들여가며 에르킨은 열변을 토했다. 어렵게 만난 고향 사람들이 제국의 손에 넘어가는 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이 샬레이안에 가서 지식을 배워온 것도 이 사태를 막길 바라는 하이델린의 뜻이 아니었을까? 에르킨은 오만하게도 그렇게까지 생각했다...

에르킨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부족민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게 뭐가 나쁘다는 거냐?"
"...... 네?"
"도마는 갈레말과의 전쟁에서 졌잖아. 알라미고라는 나라도 똑같을 거 아니냐?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따라야 하는 법, 거기에 따르는 것 뿐.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에르킨은 할말을 잃었다. 자기 부족이 침략당하기 일보 직전인데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있나?

"도, 도의적으로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익을 위해서 함부로 대하는 건......"
"얘야. 네가 바깥물 먹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 아우라 젤라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단다. 싸우고, 다치고, 피흘리고, 지키고, 버려지고, 그러면서 이 바위산에서 살아남은 거다. 파호드가 다른 부족은 안 잡아먹었을 것 같더냐? 내 증조할머니는 지금은 없는 부족 출신이셨어!"

...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껏 저런 논리는 접해본 적이 없었다. 에르킨의 이성은 저 말이 잘못되었다고 경종을 울렸으나 구체적으로 어디가 잘못됐는지 집어낼 능력이 그한테는 없었다. 푸른 눈이 바르르 떨리는 사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은 곳곳에 있었다.

"우리의 삶 그 자체를 부정해선 아니되긴 하오."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치욕스럽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다들 그러길 바라요?"
"그러니까 도망가자고 저 아이도 말하는 게 아니겠소. 나는 에르킨의 말에 찬성이오."
"아니지. 사람답게 살지 못 할 바에야 끝까지 긍지는 지키자는 말이잖아. 이대로 그냥 도망이나 치자고? 다들 자존심도 없어?"
"저, 저기요."

어른들은 이미 에르킨한테 관심이 없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좀 더 멋지게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줄 알았는데. 에르킨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고 부족장의 지팡이 소리는 여전히 거대하게 뿔을 울렸다.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하나하나 말대꾸하지 좀 말아라! 애송이들이 혓바닥에 기름칠은 아주 잘 했구나! 자, 다음!"
"저 아직 다 안 했..."
"솔리하가 말해보거라."

에르킨의 기회는 허망하게 넘어갔다. 다음 타자가 자신만의 말을 파호드의 언어로 말하고, 다른 부족민들이 거기에 끼어드려 하고. 말로써 이어지는 난전이 계속되었다. 거기에 에르킨의 자리는 없었다.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에르킨은 이것이 자신이 화가 났음을 알리는 신호라는 걸 안다. 눈 앞이 새하야면서 동시에 벌겋기도 하다. 이대로 간다면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를 해버릴 것만 같아, 에르킨은 누구한테도 꼬리 끝 하나 닿지 않고 천막을 뛰쳐나왔다. 어디든 좋으니 저 인파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했다.

첨벙.

강물을 한가득 퍼올려 세수를 한다. 손끝이 아릴 정도로 세수를 해도 열이 식지를 않아 아예 머리를 강물에 담갔다. 숨방울이 보글보글 피어오른다. 수십 초가 지나고 머리를 들어올리자 푹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줄기가 쏟아진다. 노기를 채 다 버리지 못 한 두 눈은 굳게 감겨 있다.

"진정해...... 참자. 내가 참는 거야."

상황이 마음에 안 들게 흘러가거든 폭력부터 쓰고싶어지는 건 에르킨의 고질적인 나쁜 버릇이다. 이걸 고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에르킨은 지금 무조건 참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각고를 다 한다.

에르킨은 본인들이 처한 상황을 잘 모르는 듯한 마을 사람들한테 화가 났다. 당장 내일이면 침략당해 존엄이고 뭐고 다 없어질 사람들이 약육강식의 논리나 들이밀고 있다. "인간이 되어서는 그딴 말이나," 아니, 아니다. 분노의 방향을 잘못 정해서는 안 된다. 에르킨이 화를 내야 할 대상은 무력정복을 꾀하는 제국이어야 하지 죄없는 부족민이어선 안 된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자. 냉정한 머리로 이성적인 생각을......

"...... 아니 근데 저 새끼들이 먼저 멍청하게!!"

쾅! 나무 줄기에 주먹질을 하자 구멍이 커다랗게 패인다. 기둥 한중간을 반절이나 잃어버린 나무가 기어코 기우뚱 넘어진다. 강물 위로 넘어진 나무가 물보라를 일으키는 동안에도 에르킨은 여전히 이마에 열이 잔뜩 올랐다.

에르킨도 알고 있다, 이 곳 사람들은 교육다운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불어 사는 사회란 어떤 것인지, 도덕을 논하기 이전에 공용어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도 절반을 넘지 못 할 것이다. 배우지 못 한 사람들을 어찌 욕할 수 있으리, 그러니 지금 느끼는 분노는... 설득시킬 능력이 없는 자신을 향한 것이 절반이요 옳지 못 하게 흘러가는 세상을 향한 게 나머지 절반일 터다.

"............ 짜증나."

이 울분은 세수 한두 번 하는 것만으로는 쉬이 풀리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에르킨은 무엇을 해야 할까? 시한폭탄같은 성질머리를 이끌고 마을로 돌아가야 할까? 에르킨은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갈밭에 던져놨던 호신용 외날검을 꼬나쥐고 비틀비틀 걸어간다. 방향은 산 너머, 제국군 중대가 진지를 쳐놓은 공터다. 피가 지나치게 쏠린 두뇌가 지극히 단순한 논리를 내놓았다. 부족민들 말대로 약한 자가 강한 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법이라면 자신이 대장 모가지를 쳐버렸을 때 모두가 자신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암살 대상으로 삼은 건 푸른 눈의 금발 남자아이. 자신보다도 나이가 적어보였지만 황태자라고 불렸으니 그 자가 저 중대 안에서 가장 높은 위치일 것이다. 선전포고를 하는 군인들을 보려고 몰려든 여러 부족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에르킨은 우연히 그 소년을 발견했었고, 그 또한 오랫동안 눈맞춤을 유지했었다. 누군가한테는 일생이 걸린 중대한 사태를 벌여놓고 이 모든 게 지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년.

"죽여버리겠어."

그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짜증이 치솟는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 잘난 상판대기를 물어뜯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것 같다.

별만이 빛을 더하는 가장 어두운 밤. 에르킨은 생애 첫 인간 사냥을 나섰다. 실패로 끝날 것이 예정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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