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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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판14의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경 쓰시는 분들께는 열람을 권장드리지 않습니다. 만약 이 문제로 독백 감상에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리베주한테 스포 없는 요약을 요청해주시길 바랍니다.
#파판14의 인게임 대사를 그대로 가져온 부분이 있습니다.
#욕설, 유혈, 부상, 자살, 사망 묘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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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어디 가는 건가?"
"... 알피노."
리베리우스가 우뚝 멈춰선다. 고개만 돌려 뒤를 보니 머리카락에 가려져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두른 분위기는 알피노한테 늘상 보여주던 친애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노스를 습격하러 가나?"
"이미 잘 아시면서 굳이 여쭤보시네요."
"리베리우스...... 자네."
날카로운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알피노는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다 한다.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랄거의 손길에서 제노스와 맞선 이후 자네의 상태가 평소와는 다르네.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이 조급해하고 있어. ... 왜 그러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조급해하는 이유요."
"그 날의 패배가 자네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네. 자네가 원한다면 적절한 시기가 찾아왔을 때 다시 맞붙을 수 있을 걸세. 그 날의 설욕을 되갚아줄 수도 있을 테고. 그러나... 고우세츠와 다른 이들이 말했듯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닐세. 자네 또한 잘 알고 있을 테야."
앞머리 아래의 푸른 눈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알피노는 그 눈동자를 직시하고자 노력했다.
"자네가 지금 이렇게 서두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게 괜찮을 거라는 뜻일세."
"......"
리베리우스의 머리가 원래 가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제 말을 시작한다.
"...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했어요. 제국과 정면으로 맞붙겠다고 다짐했다면 언젠가 제노스랑 마주하게 될 날도 오리라고 미리 예상을 해뒀어야 하는 건데. 나는 그럴 각오가 되어있지 않았고, 그 날에 도끼질 한 번조차 제대로 하지 못 했어요."
"누구라도 그럴 수 있을 걸세. 자네의 탓이 아니었어."
"내 탓이 맞아요. 그리고 실수는 바로잡아야만 해요."
리베리우스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알피노와 더 나눌 말이 없음을 몸짓으로 알린다.
"리베리우스! 서두르지 말게!"
"알아서 살아돌아올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알피노를 향해 손만 팔랑팔랑 흔들어 보인다.
"제노스를 죽이고 돌아올게요."
'그 때 그렇게 말했었지.'
리베리우스가 지난 전투를 회상한다.
'결국 못 죽였지만.'
도마 도읍지의 암살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리베리우스의 무기가 암살에는 적합하지 못 했던 점, 그의 실력이 제노스를 완벽히 압도할 정도는 되지 못 했던 점, 그리고 뜻을 같이 했던 동료가 제노스를 상대하기에는 약했다는 점. 보호를 업으로 삼은 리베리우스는 동료한테 과도한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데에 많은 신경을 쏟았다. 제노스는 그걸 알고 처음에는 동료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싸움이 재미가 없다며 칼을 집어넣었다.
그 때 제노스가 뭐라고 말했었더라. 조금 더 실력을 갈고닦아서 본인의 피를 끓게 만들만한 사냥감이 되라고 했던가.
그러면 본인은 이 지루하고 하찮은 세상에서 자신을 사냥하는 낙으로 살아가겠다고 했던가.
"건방진 새끼!"
까앙! 리베리우스의 도끼가 제노스의 검 한 자루를 쳐냈다. 저것이 제노스한테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루였다.
제국이 점령한 알라미고의 왕궁. 총독이 점거한 왕좌. 그리고 그 앞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이 리베리우스다. 긴 시간동안 먼 길을 돌아 알라미고 탈환 작전은 최종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리베리우스가 맡은 역할은 제노스의 수급을 가져오는 것.
제노스가 비틀거리며 두세 발을 물러난다.
열다섯 적부터 이어져오던 숙명에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리베리우스는 지금 후련한가? 행복한가? 본인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눈 앞에 있는 상대한테 오롯이 집중할 따름이다.
언젠가 느꼈던 공포심은 휘발된지 오래였다. 전투에 휩쓸리고 또 빠지며 부채감은 눈녹듯이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자기 승화를 눈 앞에 둔 초극이었다. 이 곳 이 시간에 리베리우스가 살아있다. 그것이 유일하다.
허리를 숙여 숨을 고르던 제노스, 불현듯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리베리우스는 흠칫거리며 제노스의 동태를 살핀다.
"하하하! 좋아, 좋아. 제법 재미있는 짓을 하는구나! 사냥감이 이 정도는 돼야 사냥을 할 맛이 나지!"
"내가 너 재미있게 하려고 싸우는 줄 아냐? 이 새끼가 아직도 자기 분수를 모르네?"
"야만족의 마을에서 처음 다시 만났을 때에는 실망이 컸다, 한 때 나를 능가했던 실력자가 이렇게까지 이빨이 무뎌졌다는 사실에 한탄까지 나오더군. 그런데 싸움을 거듭하며 이렇게까지 발톱을 갈았을 줄이야...!"
"너 내 말 안 듣지 지금?"
제노스가 리베리우스의 말을 안 듣는 건 두 사람 모두한테 익숙한 일이다. 머리를 치켜든 제노스의 푸른 눈이 희열로 번들거린다.
"지금의 너라면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도 있겠구나. 나는 바로 그런 자와 목숨을 내놓고 싸워보고 싶었다!"
"............"
리베리우스는 그 말에 대고 차마 나도 그렇다고 시인할 수가 없었다. 제노스와 달리 그는 도덕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야성보다 자애가 중요한 가치임을 머리로 알고 있었다. 제노스가 나불거리는 말은 그를 향한 리베리우스의 경멸심만을 촉발시켰다.
"너는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됐어."
"흥. 그걸 네놈이 말하는가."
제노스가 코웃음을 쳤다. 갑옷의 망토를 휘날리며 제노스가 뒤를 돌았다.
"따라와라, 우리의 싸움을 이 정도로 끝낼 수는 없지. 최고의 결전을 시작하자!"
리베리우스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 ...
리베리우스는 마치 홀린 듯이 제노스의 뒤를 따라간다. 에오르제아의 영웅으로서 갈레말 제국을 막아야 한다는 계산은 들어있지 않았다. 전투로 인해 지나치게 피가 쏠린 두뇌는 그 정도의 고차원적인 사고를 진행할 수 없었다.
리베리우스가 공중 정원으로 발을 들인 이유는, 그저, 제노스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의 공중정원에 온 것을 환영한다."
계절에는 조금 늦되다 싶은 꽃밭이 왕궁 옥상을 수놓는다. 바람 위에 꽃잎이 올라타 하늘을 꾸미고, 한가운데에 떠있는 것은 거대한 용을 봉인해둔 마도구. 고국을 잃은 알라미고인의 집념이 탄생시킨 야만신을 제국의 뜻이 제 입맛대로 휘두르는 모습을 올려다본다.
"이 짐승이 궁금한가? 아니, 짐승이 아니라 신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 어쩌면 이것도 네가 날 위해 준비했다고 볼 수 있겠지. 복수에 눈먼 자를 몰아붙여 신을 부르게 한 데다, 그걸 막으려고 푼 병기가 신을 내 손에 넘겨줬으니까!"
리베리우스는 고개를 내려 제노스를 노려다본다.
"제노스... 넌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아."
"이런...... 후후...... 말이 너무 많았나? 이해해다오. 살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거든!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기울여 듣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군."
거짓말하지 말라고 비꼬고 싶었다. 제노스가 리베리우스의 말을 귀담아 들은 적이 얼마나 된다고? 리베리우스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줬다면 그들의 관계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그 부분에 관해선 리베리우스는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무어라 설득하는 말을 꺼내는 대신 리베리우스는 도끼를 꺼내들었다. 어차피 이제 저것을 풀어내 자신과 싸우게 시킬 셈이겠지.
"잔말 말고 덤비기나 해. 신룡이건 뭐건 다 토벌해줄 테니까."
"호오... 이걸 쓰러뜨리겠다고? 신을 사냥한 영웅이라 이건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반응이다."
제노스가 쫙 벌린 한 손을 치켜올린다.
"그런 태도로 일관하니 가진 능력을 제대로 쓰지도 못 했겠지...!"
그리고 그 손을 꽉 주먹쥔다. 도취된 사람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가 중갑이 덜걱대는 소리를 대신한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한심하기 짝이 없어! 싸움이란 즐기기 위한 것이다. 살기 위해, 배를 채우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짐승의 본성이지만, '사냥'을 즐기고, 싸움에서 쾌락을 얻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다!"
"......"
"이 거칠고 무자비한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하나뿐인 목숨을 불태우며 싸움을 즐기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나!"
힘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 제노스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당장에 벌어질 싸움이 기대되고 또 설레어 몸을 주체할 수 없다. 열셋의 그 순간부터 지금 이 날이 찾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지!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나와 같은 부류니까."
모든 이해관계를 초월한 전투의 순간, 오로지 나 자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끓어오르는 전신의 피. 그리고 그 전부를 겪고난 뒤에 찾아오는 기쁨이란! 제노스의 세상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이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며, 그것을 누릴 자격이 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 눈 앞의 사내 이외에는.
"지금의 네놈이라면 평생의 벗으로서 곁에 두어도 좋을 것 같군."
어리석게도 선험적인 특권에서 눈을 돌리고 아무 의미도 없는 세속적 가치에만 관심을 두던 자였다. 제노스는 그것에 실망하여 한때 에르킨을 향한 관심을 완전히 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시 그 때와 같은 투기를 몸에 지닌 에르킨이라면.
다시 한 번 옛날처럼 평생을 함께 하며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떠냐? 나와 함께 살지 않겠느냐?"
......
에르킨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제노스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큭큭... 그렇겠지.... 역시 넌 나와 똑같아....... 지금 네 머릿속은 마지막 싸움에서 어떤 쾌락을 얻을 수 있을지로 가득 차 있어....... 지금도 빨리 싸우고 싶어서 온몸이 떨리겠지? 나 역시 그러하다!"
침묵을 해석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자신과 똑같이 사고하는 벗이란 어떻게 이리도 아름다운지.
제노스는 자신의 뜻대로, 에르킨의 뜻대로 검끝을 에르킨한테 겨누었다.
"역시 너만이 내 유일한 벗이 될 수 있어! 알라미고의 패권 따위 어찌 되든 상관 없다. 그저 함께 즐겨보자!"
검을 위로 휘두른다. 신룡을 가둔 마도구가 두동강이 나 바닥으로 떨어진다. 고장난 마도구가 곳곳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키고, 그 사이로 신룡이 눈을 떠 거대한 날개를 펼친다. 제노스는 그 거대한 신의 핵에 자신의 모든 것을 융합시킨다......
그렇다, 제노스는 신을 굴복시켜 신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끝을 향한 싸움이 시작된다...!"
노을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신룡. 그제야 리베리우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신룡의 꼬리를 좇아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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