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아
이따금 기현이 꿈에 나왔다. 늘 같은 내용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고속도로에서 기현은 우산도 없이 서있었다. 옷과 머리칼이 흠뻑 젖은 채 민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은 승용차도, 경찰차도 없었다. 민혁은 기현을 마주 보고 있다가 이렇게 불렀다.
실장아.
기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혁도 재차 부르지 않았다. 그냥 바라봤다. 기현의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너를 이겨먹을 생각을 하지 말걸.
빗물의 온도가 점차 미지근하게 느껴질 무렵 잠에서 깨면 숙직실의 소파였다. 민혁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앉아 정신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날 이후 한 달이 지났다. 기현을 다시 본 적은 없었다. 연락을 받은 적도, 연락을 한 적도 없었다. 하고 싶은 말도 없었고 듣고 싶은 말도 없었다. 연애를 기대한 적도 없다. 연애라니. 연애라니. 연애라니 말이 되나. 나랑 유기현이 연애. 섹스. 아니 그 전에 연애.
말도 안 되지. 내가 깜빵 갈 일 있나.
그래서 그날의 기억은 접어두고 살았다. 키스한 기억은 외면. 없었던 것으로 처리. 다행히 주변에서 민혁을 도와주었다. 과거에 눈 돌릴 틈 없도록 일을 쏟아 부었다. 민혁아 너 이거 처리했냐. 이거는 했냐. 근데 너 곧 나가야 되지 않냐. 민혁아 아까 내가 너 호출한다고 했지 왜 준비 안 했냐. 그럴 때면 민혁은 허둥지둥 움직였다. 몸도 빨랐지만 입 놀리는 것도 못지않게 빨랐다. 아 옙옙 지금 갑니다. 아 그거 거의 다 했죠. 저한테 딱 십 분만 주시면 순식간에 완성. 품질 완벽 보장. 다만 환불 불가입니다. 나오는 대로 줄줄 내뱉으며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길거리에서 구르고 있었다. 기현이 비집을 틈은 없었다. 다만 자고 있을 때는 방심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모습을 하릴없이 마주해야 했을 뿐.
양치 후 냉장고에서 포카리스웨트를 꺼냈다. 배 채우듯 마시고 책상에 앉았다. 출근한 사람들이 하나둘 주변의 자리를 채웠다. 으슬으슬 몸이 추웠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일해야지 일. 민혁은 정신을 다잡고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문자였다.
- 생일 축하해
간단한 문장. 뜬금없는 내용. 민혁은 그제야 발신번호를 확인했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었지만 익숙했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지울까 말까 며칠을 고민한 그 번호. 마침내 지웠지만 오래 들여다본 탓에 오히려 머릿속에 박혀버린 숫자들.
이것도 문제지만 문자 내용도 문제다. 어이가 없어서 오늘 날짜 확인까지 했다. 11월 22일. 내 생일은 11월 3일. 이미 지나고도 한참 됐거든. 2주가 지나고도 며칠이 더 지났거든. 잘못 보냈나. 잘못 보내도 왜 하필 나한테. 형사인 나한테. 빗속에서 욕이나 퍼붓고 등졌던 나한테. 키스까지 한 나한테. 민혁은 입술을 씹었다. 뜬금없이 던져진 공을 혼자 짊어질 성격은 못 되었다. 답장을 보냈다.
- 생일 지났거든
- 지났다는 걸 오늘 알았어
잘못 보낸 것도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말싸움으로는 지지 않을 자신 있었는데 싸울 마음 없는 사람 앞에서는 맥이 탁 풀렸다. 전화를 걸면 어떻게 될까. 어떤 상황이 닥칠까. 목소리를 듣겠지. 그 목소리를. 나는 형사님 이길 생각 없었어, 라고 말하던 그 사람의 목소리를.
그걸 들을 자신은 없었다. 다짜고짜 온 문자에도 이렇게 속수무책인데 생생한 라이브로 쩔쩔매줄 수는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이겨먹을 수 있을까. 뭐라고 해야 받아칠 수 있을까.
고민은 짧게 끝났다. 똑같이 돌려주면 된다. 엿이 왔으면 엿을 주는 게 이민혁의 법칙.
- 너도 생일 축하해
온 것과 같은 말을 보냈다. 생일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지났으면 지난대로, 아직 아니라면 아닌 대로 빡치게 하기 작전이다. 돌려줬으니까 이제 끝. 나는 내 할 일 해야지. 민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일단.
- 고마워
유기현의 답장을 확인하고 다시 생각한다. 너를 이겨먹을 생각을 하지 말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