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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면 강예솔의 꿈을 꿀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날들이 있었다. 어떤 근거도 없다. 무슨 전조도 없다. 하루종일 강예솔의 생각을 단 1초도 하지 않은 날이라고 해도(그런 날이 있었나?) 그냥 잠들려고 몸을 눕히는 순간 꿈에 나올 것 같다, 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거의 지배당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강하게. 한 번 그런 생각이 들고 나면 절대로 잠들고 싶지 않아서 한계까지 버티다가 패배하듯이 잠들고는 했는데, 그러면서 어떤 안도감인지 기대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도 같은데, 약오르게도 꼭 그런 때에 강예솔은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 온갖 게 다 나와도-심지어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야구부 감독까지 나온 적이 있었는데도-강예솔만은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거다. 짧고 불편한 잠에서 깨어나 정한림은 자신이 애초에 강예솔의 꿈을 꾸지 않은 것인지 그게 아니면 보고도 잊어버린 것인지 고민해야만 했다. 눈에 보이는 게 두려워 잠들지도 못했던 주제에, 정한림은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쁜지 가늠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아예 없던 거라면 야속했고 꿈을 꾸었는데 잊고 만 것이라면 그것대로 속이 타는 일이라고. 모든 게 정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무것도 아닌 날 강예솔이 나오는 꿈을 꾸는 것보다는.

그런 날은 예감조차 없다. 특히 피곤했던 날이라거나 생각이 많았던 날이라거나 하는 식의 지표도 없다. 그냥 느닷없이 시작되고 또 느닷없이 끝난다. 예측해보려고 시도했던 적도 있었으나 완전히 쓸모없는 노력이었다. 어떤 패턴 같은 걸 읽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떤 작업을 해 보려고 해도 할 수 없고, 손을 쓸 수도 없고, 강예솔이 그랬던 것처럼, 정한림을 내버려둔 채로 멋대로 일어나는 일이었다는 거다.

예전에 정한림은 아주 막연하게, 강예솔이 나오는 꿈을 꾼다면 (그것이 끔찍할 거라는 건 차치하고) 당연히 고등학생 시절의 어떤 장면을 되풀이하는 꿈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열일곱 살이고 강예솔이 열아홉 살이던 때의 반복재생 같은 것이리라고. 정한림이 아는 강예솔은 그 6개월의 강예솔뿐이고,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알 방도가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한 일일 거였다. 하지만 정한림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꿈 속에서, 정한림은 열일곱이기도 하지만 스물이기도 하고 스물셋이기도 하다. 언제든 꿈을 꾸는 시점의 나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고, 그런 나이라고 느낀다. 딱히 야구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야구와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이를테면 병원의 1인실에 입원 중이거나, 처음 와 보는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다거나, 인적이 드문 해변에 갑자기 서있다거나, 얼굴이 흐릿한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진저리를 치며 걷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애매한 기시감이 드는 걸 보면 이런 장면들은 언젠가 있었던 일의 성의 없는 재현 정도일 거다. 하지만 거기에 강예솔이 있다.
꿈 속의 강예솔은 열아홉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정한림이 아는 유일한 얼굴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한림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꿈에서, 강예솔은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을 조금 흐트러뜨린 모습이고, 교복도 야구부 유니폼도 아닌 단순한 모양의 티셔츠를 입고 있어 묘하게 어리게 보인다. 꿈이 반복될수록 점점 더 그 얼굴이 어리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정한림이 나이를 먹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한림이 일단 강예솔을 발견하면 강예솔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정한림 쪽으로 다가온다. 그러고는 무심한 얼굴로 손을 뻗어 정한림의 손을 쥔다. 손가락이 닿는 촉감과 손을 붙드는 동작은 늘 현기증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오래 전 손을 잡았던 기억이 모조리 이 맞잡은 손 사이로 모여드는 것 같다. 차라리 강예솔의 손을, 뭔가를 쥐고 붙잡고 뿌리치고 던지고 때리고 놓치던 그 손을, 정한림이 때로 멍하니 바라보고는 했던 손을, 잡아본 일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마음이 어지럽지는 않았을 텐데, 불행하게도 정한림은 이미 그 손을 몇 번이나 잡았었다. 온도를 기억하고 촉감을 기억한다. 심지어는 그 손에 얻어맞았을 때의 감각까지도. 그 끔찍한 첫사랑의 마지막 기억이 포옹도 악수도 아닌 폭력이었기 때문에. 하지만—그 숱한 접촉들은 (강예솔의 주먹질에 얻어터진 걸 포함해서) 무엇 하나 충분히 지속되지 않았는데, 그랬던 게 분명한데 꿈 속의 강예솔은 손을 쉽게 놓지 않는다. 당기면 당기는 대로 따라오고 밀어도 이상하게 밀려나지 않는다. 그렇게 손을 잡은 채로 어디까지든 정한림을 따라오는 것이다. 정한림이 어디로 가든 가지 않든,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묵묵한 얼굴을 한 채로.
그래서 정한림은 소년을 데리고 걷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어느 시점에—그야 꿈이니까—사실은 강예솔이 자신의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고, 자신이 강예솔의 손을 부서지도록 세게 쥐고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자신이 손을 놓으면 이 애는 미련없이 돌아서 가버릴 것이라는 사실도.

꿈은 거기에서 끝난다.

악몽에 시달린 사람처럼 정한림은 힘겹게 잠에서 깨어났다. 그 상태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끌고 싶지 않아서 금방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아무 목적도 없이 세 걸음쯤 걷는다. 그러고 나자 무시무시하도록 쓸쓸하고 허탈했다. 내려둔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빛이 흘러드는 이 평화로운 방에서, 네 자리 숫자만 남긴 고약한 기억을 거의 잊어가고 있던 시간들이 마치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정한림은 열일곱의 번민과 상실감에 사로잡혀 잠시 어쩔 줄 몰랐다. 어쩔 줄을 모르겠다면 그저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밀려나기만을 기다리며—다행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한림도 십 년치만큼은 이 일에 이골이 났다—정한림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 손목을 몇 번 가볍게 움직인다. 꿈 속의 강예솔은 이미 희미하다. 해가 갈 수록 그렇게 되고 있고 언젠가는 꿈에 나오지도 않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정한림은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손 안을 벗어난 공의 궤적을 미리 그려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가볍게 고개를 젓고, 정한림은 마침내 몇 발짝을 더 걸어 침실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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