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희망이 실현되는 모습을 보고싶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리베리우스한테 주먹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뜻이냐는 듯 주먹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길래 한 소리 해주었다.
"주먹 말이야, 주먹……! 한번 부딪쳐 봐."
"네……? 네에."
종잡을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의아해 하면서도 그는 내 말을 따라 주먹을 내 손에 맞대었다. 그러자 맞닿은 우리의 손가락 사이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개 유령에 불과한 내가 리베리우스의 살결을 느낄 수 있다. 일전에도 한 번 본 적 있는 현상이다.
"…… 역시. 예전에 방에서 있었던 일은 우연이 아니었어. 나는 더 이상 세계를 구할 수는 없지만…… 무슨 업보인지 너에게만은 관여할 수 있는 것 같다."
손을 거두면 일렁이던 빛무리는 사라진다. 나는 거뒀던 그 손을 내 가슴 위에 올린다.
"…… 우리의 선택이 틀렸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너희가 바로 그 사실을 증명해 주었기에…… 지금 이 순간, 난 맹세할 수 있어."
"보통 이런 말 다음에는 썩 듣기 좋지 않은 말이 나오던데."
"이봐, 그런 말은 하지 말고. …… 내 혼을, 너에게 걸겠다."
그런 말이 자기는 듣기 싫었던 거라고 그가 나지막이 웃었다.
"네가 세계의 적이 될 것 같으면 막아설 거고, 네가 앞으로 나아가겠다면, 등 정도는 힘껏 밀어주마."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나아가라, 영웅."
그가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 * *
"──당신이 눈을 뜨셨다는 연락을 받고 이렇게 모두 모였습니다."
장소를 바꿔, 아마로 승강장.
잠시 시야가 환해지면서 편두통이 습격해와 비틀거리던 찰나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건 친애하는 동료들의 모습. 이 도시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다들 흐트러지고 숨소리가 고르지는 못 한 모습이었다.
"…… 보아하니 수정공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과거를…… 보셨습니까."
과거를 봤냐고?
맞다. 리베리우스는 방금 전 과거를 보고 온 참이었다. 지금 리베리우스 앞에서 감히 입을 놀리고 있는 대역죄인인 위리앙제가 수정공과 손을 잡고 리베리우스를 속여먹는 장면을 낱낱이 속속들이 파헤치고 오는 길이었다!
리베리우스는 팔짱을 끼면서 짐짓 화가 난 체를 한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많았던 상태였어요. 위리앙제. 수정공이 자신을 희생해서 나를 살리려던 계획을 알고 있었죠?"
"…… 예, 그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면서 왜 저를 크리스타리움에 데려오셨어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계셨을 거면서."
"………… 무슨, 말씀이신지……."
리베리우스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어진다.
"위험하잖아요. …… 제가 여기서 죄식자로 변해버리기라도 한다면, 저한테 모든 걸 숨겨가면서 수정공을 희생하기로 한 당신의 결단이 무용한 게 돼버리잖아요. 계획에 실패했다면 그에 대한 뒷처리도 완벽하게 하셨어야죠, 위리앙제."
"…… 당신께서는 설마……"
차마 눈을 못 마주치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위리앙제가 놀란 눈으로 얼굴을 들어올린다.
"설마…… 제가…… 당신을 제1세계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이 계획에 가담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하이델린이시여. 맙소사."
잠시 제 머리를 한손으로 부여잡았던 위리앙제가 말을 잇는다.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저희는…… 당신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했어요."
"저희가 당신을 살리고 싶어하는 건 결코 당신이 세상을 구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당신이 세상을 구하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당신을 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 위리앙제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 모습은 죄인이 참회하는 모습같기도, 주인한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같기도 했다.
"……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선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수정공의 계획에 대해 모두 알게 되면 어떤 벌이든 받겠다는 각오로 그를 도왔습니다. 지금도 그 결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도, 당신은 저를 비난하거나 분개하기보다는 먼저, 행동에 나서시려 하십니다. 그런 굳은 의지를 가진 동료를 뒤따르고, 함께 하고, 옆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저를 움직이게 했던 것입니다……."
"…… 어,"
"그러니…… 부디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이 한 몸, 이 지혜를 바쳐 반드시 당신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잠깐. 잠깐만요……"
얼굴 아래쪽을 가리고 있던 손이 한 개에서 두 개로 늘었다.
"저 지금 너무 부끄러운데……."
얼굴이 화끈거려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아시겠지만 저랑 함께 있으면 엄청 위험할 거예요. 그래도 같이 가시겠다고요? …… 동료니까?"
"당신이 여전히 위험한 상태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계속 나아가는 한,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자꾸 확인해서 미안해요, 동료니까요……?"
"네, 맞습니다. 이런 저라도 아직 동료로 인정해 주신다면……."
"──아이 참, 계속 답답하게 구네!"
말을 가만 듣고 있던 알리제가 제 성질을 못 이기고 결국 참견하고야 만다.
"리베리우스! 당신, 가만히 있고 싶지 않은 거잖아! 그렇지!"
"네, 네. 네. 맞아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가주겠다고! 도구니 유용이니 뭐니 그런 걸 생각했으면 이런 결정도 안 했겠지! …… 사실은 마음만 같아선 안전한 곳에서 계속 쉬고 있으라고 하고 싶어……. 다시 나을 방법을 찾아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달라고 하고 싶다고. 하지만…… 가망 없는 일을 약속하는 건 그냥 거짓말이니까……! 그러니까,"
"…… 알리제?"
"그러니까…… 적어도 나는……!"
"응.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리베리우스는 눈물을 보이는 알리제를 제 품에 가뒀다. 뒤통수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어쩐지 오랜만인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모습을 가만 보던 알피노가 말했다.
"…… 우리도 자네와 함께 가겠네. 희망을 찾으려면 어찌 됐든 일단 발걸음부터 떼야 하지 않겠나."
"달리 방법이 없는걸요. 당신은 자신의 뜻대로 해요. 우리는 그 곁에서 당신의 눈이 되고 힘이 되어줄게요. ……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말이에요."
야슈톨라의 말을 들은 리베리우스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그걸 본 산크레드가 남몰래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여러분들이…… 이렇게 나서줄 줄은 몰라서…… 살짝 어안이 벙벙하기도 한데요. 응.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네요. 이런 건 처음 겪는 것 같기도 해요……."
아직 잘 모르겠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전, 리베리우스는 동료들한테 꼭 해야 할 말을 하기로 했다.
"그럼…… 여러분, 부디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그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