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작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다. 최종수는 구름 걷힐 줄 모르는 하늘을 흐린 보면서 탄식했다. 단지 구름만 좀 낀 거면 다행인데, 안타깝게도 일기예보는 바람을 묵살하고 장대비를 예고했다. 참으려고 해도 절로 한숨이 샜다. 간신히 거실 창밖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숙였을 때, 등 뒤에서 성큼 체중이 실렸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서 제법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목덜미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간질였다.

“와 이래 죽상이에요? 좋은 날에.”
“…안 그러게 생겼어? 며칠 내내 비 온다는데.”
“야외 결혼식도 아닌데 뭐 어때요. 그리고 멕시코는 비 안 올걸요? 여행만 잘 가면 됐지.”

일생일대의 중대사가 걸린 날인데도 태평한 말투다. 혹시라도 일정이 어긋날까, 결혼식에서 사고라도 나거나 비행기에 지연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 가득한 최종수와는 딴판이었다. 손만 뒤로 뻗어 바로 잡히는 머리통을 쓱쓱 쓸었다. 기상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원래 비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다잖아요. 우리 엄청 잘 살라고 그러납다.”
“너 그런 말도 아냐?”
“마음에도 없이 나쁜 말 하는 버릇은 언제 고치지?”

최종수의 입을 조금 아플 만큼 꼬집은 기상호가 짐짓 표정을 굳혔다. 야 아파, 입술이 잡힌 채 웅얼거리는 걸 들으니 그것도 금세 풀려버렸지만. 만전을 기해 준비했건만 얄궂게도 비가 와 심각해진 애인의 기분을 풀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 몇 달 후 날씨를 미리 예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준비한 하루의 주인공은 여전히 최종수와 기상호 둘이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축복 속에서 새삼스레 미래를 약속할 테다. 그거면 충분했다.

기상호는 한 번 더 손가락에 힘을 줬다가 입술을 놓아줬다. 이내 쪽 소리도 없이 입술이 깃털처럼 닿았다 떨어졌다.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하나둘 창문을 두들겼다. 얼마 가지 않아 굵은 빗줄기가 건물 외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갈색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었다. “대체 얼마나 잘 살게 이러는지 모르겠다.” 말이 빗소리에 묻혔다. 두 번 다시 없을 결혼 전야였다.




혼인 신고도 못 하면서 굳이 식을 올리기로 한 까닭을 따지자면 반쯤 오기였다. 오래 지속된 연애는 안정 궤도에 접어들어 별 탈 없이 이어졌다. 서로 어느 정도 속을 알게 된 이후로는 고작해야 장난 같은 사소한 다툼이 위기의 전부였다. 남 부럽지 않은 연인 사이임은 틀림없다. 권태로움 없이, 한눈팔지도 않고 한 해 한 해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시간은 천금으로 바꾸지 못할 것이다.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말하지 않아도 계속 곁에 있을 것을 안다. 분명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래도 부족했다. 기상호가 자길 떠난다든가 마음이 식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좀 더 확실하게 그 자리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은연중에 한 합의가 아니라 공공연한 인정이 필요했다. 최종수는 기상호와, 기상호는 최종수와 있는 게 당연하다고. 현재에 안주해도 좋겠지만, 더 이상 손에 쥘 것이 없을 때 멈춰도 늦지 않았다. 프러포즈는 적당히 성대했고 기상호는 그런 최종수를 훤히 들여다보면서 승낙했다. 둘은 언제나 그런 사이였다.

당연히 일과 결혼 준비를 병행하는 건 쉽지 않았다. 심지어 원정이 많은 농구 선수니 말 다했다. 최종수는 양쪽 다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욕심으로 시간을 쪼개 날짜를 정하고 식장을 잡았다. 남들 다 하는 거 안 하는 거 닥치는 대로 준비해서 태풍 오기 전날 아슬아슬하게 제주 웨딩 스냅까지 무사히 치렀다. 반 동거 수준으로 서로 집에 드나들긴 했지만, 신혼집을 새로 구하는 건 여러모로 묘한 기분이었다. 집을 계약하고 인테리어를 마친 후 처음 안방에서 함께 누운 밤은 긴장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꼭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남자애라도 된 양.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면서, 문득 이 모든 게 기꺼워졌다.

청첩장을 돌린 사람은 가족, 가까운 지인 몇과 농구계 사람들. 눈대중으로 머릿수를 세어볼 수 있을 만큼 적었다. 청첩장에는 최종수가 며칠이나 끙끙대며 만든 문구가 고스란히 실렸다. 기상호는 그 단정하고 낯간지러운 문장을 보면서 한참이나 웃었다. 참지 못하고 벅벅 찢어버리고 싶다가도 딱 마음에 든다는 말에 고치지 않고 그대로 건넸다. 별 탈 없이 축하를 받았고 식 날짜는 성급하리만치 빠르게도 다가왔다.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어서 그날이 되길 바랐다. 발에 치이는 작은 돌멩이 하나 없이 매끄러운 진행. 세상 전부가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는 것처럼 순조로웠다. 결혼식 당일, 세차게 퍼붓는 비만 아니었다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내리는 비 때문에 두 사람은 미리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준비를 했다. 움직이기 편한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머리 세팅과 화장을 하고 있으려니 기상호는 이 상황이 즐거운지 연신 웃었다. 안 그래도 하객도 그리 많지 않은 조촐한 결혼식인데 벌써 몇 명은 참석이 어렵겠다며 연락을 해왔다. 실상 누가 오든 상관은 없었으나, 생에 한 번 뿐인(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날이 맑길 바라는 마음은 웬만해서는 비슷할 테다.

식장에 도착해 세팅한 머리 따위가 망가지지 않게 조심조심 골라둔 턱시도를 입고 나오자, 마찬가지로 새하얀 웨딩 턱시도를 입은 기상호가 손을 흔들었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으로 가득한 결혼식장인데도 그 순간은 유독 조용했다. 종수 햄. 얼굴 빨개졌어요. 사람 속도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기상호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최종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식장의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불빛이 뺨을 훑고 지나갔다. 아무튼 나쁘지 않았다.

비를 뚫고 찾아와 준 지인들에게 '비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다'는 인사치레를 들을 때마다 기상호는 거 봐요, 하고 애도 아니면서 잰 체를 했다. 중요한 날이니까 어떤 날씨든 이유를 들어 어떻게든 좋은 징조라고 말해주는 게 당연한데. 이 역시 최종수를 위한 행동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랑 둘이서 웨딩 링을 교환하고 맹세의 키스를 나누며 얼굴이 불그스름 해진 채로 단출한 식을 끝냈다. 제법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웨딩 카에 올라 공항까지 가는 길에는 비가 조금 멎는 듯하다가도 금세 귀 따갑게 내리길 반복했다.

정석으로 화이트 골드 웨딩 링을 나누어 낀 신혼부부는 공항에 내릴 때까지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대로 비행기에 올라 미국을 경유해 멕시코 칸쿤에서 새파란 바다를 보며 즐거운 일주일을 보내고 나면 다시 이전과 같은 시간을 보내겠지만, 왠지 어딘가 달라질 것만 같았다. 햄은 서핑해 본 적 있어요? 아니. 근데 너보단 잘 탈 것 같은데. 싱거운 대화를 하면서 수속을 마치고 기다리는 동안 야속하게도 지연 안내가 떴다. 태풍 급으로 비가 오고 있으니 크게 당혹스럽지도 않았다.

기상호는 공항의 전면 창에 달라붙어 어두컴컴한 바깥을 내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애인에서 이제는 신랑이 된 남자를 바라봤다. 창을 짚은 커다란 손에서 다이아 반지가 반짝반짝 빛났다.

“햄. 내 좋아하죠?”

“뭐?” 황당한 질문 탓에 목소리 끝이 튀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려고 찾아온 공항에서 물을 질문은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야 이상하지는 않지만……. “뭘 그런 걸 물어 봐. 알잖아.” 최종수는 왠지 낯부끄러워서 대답을 돌렸다.

“여태 좋아한다고 말해 준 적이 없잖아요. 진짜 좋아하나 궁금해져서.”

익숙한 장난기를 담은 목소리였으나 마냥 놀리는 느낌이 아니라 이상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적이 없었나? 사귄 지가 벌써 몇 년인데. 프러포즈도 최종수가 했고, 그리고 아마 고백도……. 그러고 보면 민망하다는 이유로 그런 표현은 썩 입에 담지 않은 것 같다. 지금도 괜히 입만 뻐끔거리고 혀 끝에 고백을 올리는 건 무척 어려웠다. 기상호는 개의치 않고 도로 비행기가 비 오는 날 지렁이처럼 구물구물 움직이는 활주로를 내다봤다. 움직였다가 멈추고, 또 움직였다가 멈추고. 이래서야 출발 자체가 요원해 보였다.

큰 돈 들인 헤어스타일과 화장은 습기에 풀리고 녹았다. 옷은 애매하게 답답했고,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느라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기쁘고 좋은 날이니 그로 인한 흥분 덕에 여태 버티는 것에 가까웠다. 비행기에 무사히 탄다면 아마 수면용으로 와인 한 잔 마시지 않아도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기상호도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이다가 최종수 옆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허벅지에 돌려둔 손등에 제 손을 덥석 겹쳐 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 눈동자. 언제나 제 시선을 끌어가고, 잡아채는 그것. 코트에서도, 코트 밖에서도.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거죠? 같이 살면서 계속 보고 싶은 거고.”

“무슨…” 아직도 그 얘기? 최종수는 목구멍이 홧홧해져서 민망한 낯으로 뺨을 문질렀다. 기상호는 꼭 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야 만족할 듯이 굴었다. 입이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심장이 튀어나오려는 양 뛰어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니까, 나는 당연히…….

“아, 맞다. 시간 괘안아요? 안 늦었어요?”
“비행기? 지연됐잖아, 괜찮아.”
“아니. 그거 말구요.”

화제를 돌려줘서 다행이라는 생각 반, 뭐 때문에 기다리는지 모르는 건지 의심 반이었다. 기상호는 공을 쥐느라 딱딱한 손가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크고 따뜻한 손. 최종수는 그 손이 좋았다.

“오늘 훈련 있다 캤잖아요. 안 일어나도 돼요?”
“어?”

이제 그만 일어나요, 종수 햄. 기상호가 웃으면서 손등을 두드렸다.




휴대폰이 머리맡에서 진동했다. 최종수는 그 작은 소음에 천재지변이라도 겪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4쿼터를 풀로 뛴 듯 숨이 벅차서 헉헉 호흡을 몰아쉬었다. 몸을 덮은 이불이 스르르 미끄러지고, 눈만 하염없이 깜빡이는 동안에도 진동은 멈출 줄을 몰랐다. 베개 옆을 더듬어 연락처도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푹 잠겼다.

- 종수 햄! 모닝콜 해달라고 해놓고 안 일어나면 어떡해요! 내 몇 번이나 전화했는지 알아요?
“…기상호?”
- 글면 누구겠으요. 전화 안 하면 찾아오겠다고 그래 협박해놓구. 내가 햄 뱅기 값 아껴줬다 아니에요.

물에 잠긴 듯 무거운 몸을 가까스로 건져내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느리게 둘러봤다. 익숙한 방. 최종수와 기상호의 신혼집도, 한국의 자취방도 아닌 미국에서 지내는 집 삭막한 방 한 칸이 시야에 박혔다. 수화기 너머 기상호는 그런 상태도 모르고 또 밤새 이상한 유튜브나 본 거냐고 한참 일장 연설을 했다. 저는 훈련 끝나고 씻고 잘 준비까지 마쳤다는 보고까지 해줘서, 지구 반대편에서 갈색 머리 수비 스페셜리스트 농구 선수가 침대에 누운 모양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어서 어젯밤 뒤척이다가 유튜브에서 결혼 준비 영상 따위를 보다가 잠든 것도, 그 전에 기상호와 통화하다가 억지로 모닝콜을 시킨 것도 전부 생각이 났다.

고백한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던 것도 당연했다. 그야 한 적이 없으니까. 사귄 적도 없고, 애초에 최종수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쭉 여기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기상호와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침대에 앉은 채로 옆 창문의 커튼을 열었다. 어쩐지 점심이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어둡더라니 비가 오고 있었다. 어찌나 세차게 오는지 기상호 목소리가 자꾸만 묻혔다. 얼른 일어나서 밥부터 먹어요, 꿈속 기상호와 같은 듯 다른 음성이 재촉했다. 최종수는 그걸 들으면서도 멍하니 넋을 놨다. 아무리 영상을 보다 잠들어서 그런 꿈을 꿨기로서니, 설마 기상호와 연애 후 결혼이라는 장황하고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니. 애초에 상대로 나온 게 기상호라니. 전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개꿈이다. 두 개가 겹쳐서 우연히 이런 꿈을 꾼 것뿐이니까. 그렇게 치부하려고 밀어두는 순간, 그 목소리가 최종수에게 다시 물었다.

‘햄, 내 좋아하죠?’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거죠? 같이 살면서 계속 보고 싶은 거고.’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햄? 종수 햄? 다시 잠들었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깨우기에 여념이 없는 기호를 두고, 최종수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 진짜 미쳤냐, 최종수……. 얇은 이불이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야.”
- 예?
“나 큰일 났어. 니가 책임져야 돼.”
- 엥? 내, 내는 제때 전화했는디요? 그리고 햄이 늦잠 잔 게 내 잘못은…….
“조만간 한국 간다.”

에? 바보 같은 목소리에 제대로 설명해주는 대신 전화를 뚝 끊었다. 비는 며칠 내내 이어질 예정이었고, 최종수는 침대에 앉은 채로 하얀 턱시도를 입은 기상호와 대충 져지를 걸치고 서울 어느 동네를 걸어 다니던 기상호를 번갈아서 떠올렸다. 혼자 앞서 나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최종수는 저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메신저 알림음이 연달아 울렸다. 내용이야 안 봐도 뻔하다. 휴대폰을 적당히 내던지고 침대에 몸을 털썩 눕힌 채 눈을 감았다. 아. 큰일 났네.

나 기상호 좋아하는구나……. 동시에, 진짜 결혼식은 그래도 해가 쨍쨍하게 뜨는 날이길 바랐다. 턱시도 입은 모습을 좀 더 길게 보고 싶다는, 꽤 바보 같은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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