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아나토미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세계 대전으로 인해 징병된 25살 평범한 (전전)군필자 (전)대학생. 그게 나였다. 애초에 이 수식어들에 평범이 어울리긴 하는가 싶었으나 모두가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었으니 대충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소대의 소대장이었던 김영빈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직업 군인이었다. 제대 하는 대신 말뚝을 박았다고 했고 소대원들은 다들 고개를 저었다. 저런 사람이 진짜 있구나.
체질에 잘 맞아서 말뚝 박았는지 김영빈은 fm 태도로 우리 소대를 못살게 굴었다. 위생 청결 따위를 꼼꼼히 점검했고 지키지 못한 놈들을 몇몇 불러 직접 손을 봐주었다. 나는 대가리를 뻣뻣하게 쳐들고 앉아 신입 하나가 갈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호경아 내가 청소 좀 깨끗이 하라고 했잖아. 상병 박 호 경! 김영빈이 호경이의 뺨을 손가락으로 밀때마다 고개가 너무나도 쉽게 돌아갔다. 생활관이 쥐 죽은듯 조용했다. 소대장 말이 우스워? 상병 박 호 경! 아닙니다! 호경아. 상병 박 호 경! 호경이의 맞은편 자리를 썼던 나는 그 광경을 바로 눈 앞에서 지켜보았다. 호경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느라 몰랐겠지만... 김영빈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왜?
그때부터 나는 김영빈을 신경썼다. 말 한 적 없지만 박는 상상도 몇 번 했다. 프로이트식 복수였나? 복수가 맞긴 한가 애초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내 머릿속에서 맘대로 영빈을 괴롭혔다. 얇은 몸이 내 아래에서 나부끼는 것을 상상하며 역겨움을 느꼈다.
소대가 모인 후 처음 전쟁에서 승리한 날 김영빈은 수고했다는 짧은 한 마디를 하고 자기 막사로 들어가버렸다. 다들 사람들의 머리가 터져나가고 본인이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생활관 분위기가 최악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나눌수록 불어난다. 나는 건물을 조용히 나와 담배를 빨았다.
찬희 담배 펴?
병장 강 찬 희.
쭈그려 앉아있던 자리에서 쭈뼛쭈뼛 일어났다. 김영빈은 줘봐, 한 마디 했고 나는 머뭇거리다가 내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두 손가락으로 뺀 후 그대로 김영빈의 앞에 내밀었다. 김영빈은 오른손 밑에 받치듯 깔아놓은 내 공손한 왼손을 보더니 조금 웃었다. 받아들지는 않았다. 얼타다가 눈 질끈 감고 입가에 가져다 대주니 그제야 영빈의 그 작은 입이 열렸다. 그대로 내가 피던 담배를 물었다.
찬희 캡슐부터 터트리는 타입이네. 별로다.
죄송합니다.
아냐 됐어.
김영빈이 담배를 빠는 동안 나는 뒷짐을 지고 서서 김영빈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같은 전쟁통과 괴로움을 겪고 와서 한층 수척해진 얼굴. 나도 모르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았다. 김영빈이 담배를 땅에 떨어트리며 크게 웃었다는 것 하나만 기억한다. 전쟁터라는 거대한 도파민과 공포감의 덩어리에 있다 와서 그런가 좆됐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어지간한 역치를 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감정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뇌 어딘가가 잘린 쥐가 된 것 같았다. 김영빈한테 얼마나 처맞으려나. 그 생각 하나만 들었다.
김영빈은 나를 때리지 않았다. 기합을 주지도 않았다.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를 주워 들고 내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춰 주었다. 곧바로 담배를 다시 내 입에 물렸다. 흙이 묻었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그걸 받아 물었다. 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병장이면 제대 했었겠네?
네 그렇습니다.
언제 했어?
일곱 달 전에...
김영빈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오늘만 봐주는 거야. 그 짧고 강렬한 경험은 한 순간에 지나갔다. 그 뒤로는 전쟁, 전쟁, 전쟁이었다. 지루한 전진이 지속될수록 생활관이 적적해졌다. 소대장이 전사했다는 옆옆 소대와 통합해 다시 시끌벅적해졌으나 공허한 울림 뿐이었다. 다들 정신을 야금야금 좀먹어가고 있었다. 좀먹혔다는 표현이 맞나? 그 와중에 나는 진통제같은 효과를 바라며 대담한 상상을 점점 늘려나갔다. 혹은 점점 미쳐갔거나. 두 개가 동의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김영빈은 그럴때마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뭘 안다고. 그런 삐딱한 생각도 몇 개 들었다. 총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나. 어쨌든 오늘도 출전이었다. 나는 그날 전투에서 손을 날려먹을 뻔 했다. 총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고 피가 철철 흘렀다.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가 온통 머리를 사로잡았다. 폭죽 튀듯 뇌가 마구 날뛴다. 살고싶어살고싶어살고싶어... 미친듯이 생활관까지 살아 돌아가려고 발버둥쳤다. 군화를 길게 덮은 군복 바지를 찢어 팔을 동여맸다. 부대에는 제때 복귀하지 못했다. 내 꼴을 본 김영빈은 입을 다물었다가,
우리 사귀어도 될 것 같아.
허락해주듯 선언했다. 나는 아직 팔에서 질질 흐르는 피를 대충 닦아 내었다. 머리로 갈 피가 다른 곳으로 흘러서 그런가 영빈의 말이 머릿속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 깊은 곳에서 우러난 말은 머리 위까지 오지 않고 곧장 입 밖으로 튀어 나간다.
한 번 죽을 고비 넘기니까 그제야 제 말 좀 생각해보셨나봐요.
까마득한 상관을 향해 빈정거렸음에도 영빈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보다 오랜 시간 지구에 발 붙이고 살았던 영빈은 곤란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잘 알았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배알없는 사람마냥 영빈의 손을 잡았고 영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자존심같은 거 다 버려도 괜찮을 만큼 영빈을 사랑했다. 김영빈의 생각과 사고방식과 생활관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비일상적인 상황에 놓이니 오히려 김영빈의 그 이해 안 가는 태도들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다. 나는 본질적인 이해를 하는 대신 김영빈이 왜 대뜸 나와 사귀겠다고 했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좀 더 지엽적인 고민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