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OD KNOT
0.
앤드류가 세 번째로 소매를 걷어 올렸을 때, 케일럽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형이 긴장한 걸 처음 봐서.”
앤드류는 걷어 올린 소매를 다시 내렸다. 은실로 왕실 문장을 수놓은 검은 예복은 팔을 굽힐 때마다 손목뼈를 죄었다. 재단사는 즉위식 때와 같은 치수라고 주장했지만, 그사이 달라진 것은 몸이 아니라 옷을 입고 서야 하는 자리였다. 장례와 즉위식,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진 회의와 접견을 거치는 동안 그는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말하는 일부터 그만두었다. 앤드류가 단추 하나쯤은 풀어도 되겠다고 판단한 순간 케일럽의 손이 먼저 올라왔다.
“안 돼. 대사제가 손목까지 가리라고 했어.”
“어차피 의식이 시작되면 벗길 거잖아.”
“그 전까지는 왕답게 보여야지.”
“손목이 보이면 왕이 아닌가?”
“오늘은 그런가 보지.”
케일럽은 풀릴 뻔한 단추를 도로 잠갔다. 목 가까이 달린 장식을 바로잡으려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 위로 창가의 빛이 비스듬히 걸렸다. 스물다섯이 된 지 오래인데도 앤드류의 눈에는 이따금 그보다 열 살 어린 얼굴이 겹쳤다. 검술 수업을 빼먹고도 흙 묻은 장화만 감추면 들키지 않을 줄 알았던 얼굴, 말을 타다 떨어져 손목이 부러지고서도 먼저 형의 눈치를 살피던 얼굴이었다. 그 모든 시절을 지나 이제는 누구의 도움 없이 제 몫의 일을 해내는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지만, 앤드류에게 케일럽은 여전히 가장 오래 알고 가장 쉽게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앤드류는 케일럽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머리나 제대로 빗고 남의 옷을 지적해.”
케일럽이 목깃에서 손을 떼고 제 머리를 만졌다.
“아침부터 형 옷을 봐주러 오느라 그랬잖아.”
“내가 불렀나?”
“시종 셋을 돌려보냈다며.”
“나 혼자 입을 수 있어.”
“그래서 소매하고 싸우고 있었어?”
앤드류는 대답 대신 케일럽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케일럽이 낮게 욕설을 삼키며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려서부터 수없이 되풀이해 이제는 먼저 손을 뻗은 쪽도, 붙잡힌 쪽도 의식하지 않는 장난이었다. 앤드류는 손목을 한 번 비틀어 가볍게 빠져나왔고, 케일럽은 거울 앞에서 망가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그를 노려보았다. 방 안에 남아 있던 시종들은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감췄다. 왕이 된 뒤에도 케일럽 앞에서만큼은 앤드류의 표정이 예전과 같아지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오늘 형 반려가 나타나면 내가 제일 먼저 경고할 거야.”
“무슨 경고?”
“성질이 나쁘고, 고집이 세고, 남의 머리를 망가뜨리는 취미가 있다고.”
“왕을 모함한 죄로 탑에 가두기 전에 입을 다무는 게 좋겠군.”
“그 탑 열쇠가 어디 있는지 나도 알아.”
케일럽은 거울 앞으로 돌아서다가 무심코 예복 안쪽을 눌렀다. 손바닥이 닿은 자리는 아침부터 몇 번이나 확인한 듯 옷감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 앤드류는 그 손길을 놓치지 않았다.
“가지고 왔어?”
케일럽이 손을 멈췄다.
“뭘.”
“네가 새벽부터 잃어버릴까 봐 만지고 있는 것.”
잠시 시선을 피하던 케일럽이 결국 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짙은 녹색 가죽을 씌운 상자는 손바닥 안에 거의 다 가려졌다. 뚜껑을 열자 가느다란 금반지 가운데 박힌 옅은 청색 보석이 창가의 빛을 받았다. 화려하지 않았고, 오래 손에 끼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케일럽이 그 여자를 떠올리며 직접 고른 것이 분명했다.
앤드류는 상자와 동생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오늘 할 생각이야?”
“형 의식이 무사히 끝나면.”
“내 반려를 찾는 날에 네가 먼저 혼인을 정하겠다고?”
“그러니까 의식이 끝난 뒤라고 했잖아. 형보다 먼저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 반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루 종일 신과 협상해야 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먼저 다녀오지, 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케일럽은 상자를 닫는 손에 평소보다 힘을 주었다. 앤드류는 그가 그녀와 가까워진 뒤로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꺼냈다가 끝까지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반지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케일럽의 표정에는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불안보다 마침내 정한 일을 앞둔 사람의 긴장이 더 컸다.
“대답은 알고 있어?”
“모르지.”
“그런데 얼굴은 이미 허락받은 것 같군.”
케일럽이 상자를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으며 웃었다.
“확신도 없이 반지부터 사는 사람으로 보여?”
“내 동생이니까 그 정도 어리석음은 충분히 가능하지.”
“오늘 청혼할 사람이 둘인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은 제단에 올라가기 전에 죽고 싶나 봐.”
앤드류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케일럽의 어깨를 한 번 눌렀다. 그녀는 오랫동안 왕궁을 드나든 집안의 딸이었고, 케일럽과 나란히 있을 때에도 왕자를 대하는 법보다 케일럽을 대하는 법을 먼저 아는 사람이었다. 앤드류는 동생이 그녀와 함께 있을 때 편안하게 웃는 모습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는 혼인이었다.
“좋은 대답을 들을 거야.”
케일럽은 짧게 시선을 내렸다가 형을 보았다.
“형도.”
두 사람은 아직 신이 정하는 대답보다 인간이 스스로 청해 얻는 대답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케일럽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대충 눌러 놓고 앤드류에게 돌아왔다. 이번에는 망토를 여미는 은제 고리였다. 서로 마주 본 사자 두 마리가 왕관을 떠받친 장식은 손바닥에 올리면 보기보다 묵직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앤드류의 즉위식에서도 같은 고리가 쓰였다. 케일럽이 한쪽을 끼우는 동안 앤드류가 반대편을 받쳐 들었다. 두 사람은 어디에 힘을 주어야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할 거야?”
케일럽이 물었다.
“누가?”
“반려. 오늘 신이 골라 줄 사람.”
“신에게 다시 고르라고 해야지.”
케일럽이 웃었다.
“신이 형 말을 듣겠어?”
“그렇다면 협상해야겠군.”
“뭘 내놓고?”
“사원에 금을 조금 더 주면 되지 않을까?”
“대사제가 들으면 의식 전에 형부터 제단에 바칠걸.”
장식을 끼운 케일럽이 한 걸음 물러났다. 방금까지 입가에 머물던 장난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이 앤드류의 어깨에서 떨어지는 망토의 선을 따라 내려가 가슴을 가로지른 왕실 문장에 멈췄다. 왕관을 쓰기 전과 같은 얼굴인데, 그 위에 얹힌 것들이 너무 많았다. 케일럽은 그 무게까지 가늠하려는 사람처럼 한동안 형을 바라보았다.
“잘 어울려.”
“옷이?”
“왕관이.”
앤드류는 거울 속의 왕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쓰던 왕관은 머리에 얹을 때마다 아직 체온이 남은 유품처럼 느껴졌다. 장례를 치르고 보름 뒤에 즉위식이 열렸고, 그로부터 다시 스무 날이 흘렀다. 왕실 회의와 사절 접견, 국경 수비대의 보고가 빈자리를 채울 틈도 없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명령을 내릴 때마다 폐하라고 불렀고, 앤드류는 한 번도 돌아보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오늘 반려 의식까지 끝나면 대신들은 비로소 선왕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할 터였다.
그러나 거울 속 얼굴에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시작된 시간이 아직 어딘가에서 중단된 채 남아 있었다.
케일럽이 거울 너머로 앤드류의 시선을 마주쳤다.
“아버지도 처음에는 불편해하셨어.”
“왕관을?”
“왕이 된 걸.”
앤드류가 돌아보았다.
“네가 어떻게 알아?”
“말씀하셨으니까. 형이 즉위하면 잘 지켜보라고도 하셨어.”
“누가 누구를 지켜봐.”
앤드류는 케일럽의 목 뒤로 팔을 둘러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케일럽은 익숙하게 몸을 기울였다가 형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밀어 넣었다. 앤드류가 즉위한 뒤에도 달라지지 않은 몇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오기 전에 허락을 기다렸지만, 케일럽은 여전히 문을 두드리는 것조차 잊었고 앤드류 역시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잘해. 내가 다른 나라로 도망갈 생각이 들지 않게.”
“내 허락 없이 어디도 못 가.”
“왕이 되더니 벌써 폭군이군.”
“동생 하나 단속하는 데 왕권까지 필요하진 않아.”
문밖에서 시종장이 의식 시간이 가까워졌다고 알렸다. 케일럽이 앤드류의 팔 아래에서 빠져나오며 마지막으로 망토를 당겨 주었다.
“가자. 온 나라가 형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어.”
앤드류는 탁자 위에 놓아 둔 장갑을 집어 들었다.
“내 운명보다 네 점심 메뉴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의식이 길어지면 형의 반려보다 먼저 부엌을 찾을 거야.”
앤드류는 웃으며 케일럽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두 사람은 동쪽 회랑을 지나 대신전으로 향했다. 창문 사이마다 왕실의 짙은 청색 깃발과 신전의 흰 깃발이 번갈아 늘어져 있었다. 바람이 들 때마다 사자 문장과 금빛 원환이 서로를 덮었다가 갈라졌다. 뜰 아래는 의식을 보러 온 사람들로 돌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왕의 반려가 확인되는 순간 수도의 모든 종이 울리고, 성벽 위의 첫 봉화가 국경까지 소식을 옮길 예정이었다. 누구의 이름이 불리느냐보다 붉은 실이 나타나느냐가 중요한 날이었다.
케일럽은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혀를 찼다.
“저 사람들 전부 오늘 안에 결과가 나온다고 믿겠지?”
“나오겠지.”
“만약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앞서 걷던 시종장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앤드류는 대답하지 않았다. 첫 의식에서 반려가 발견되지 않은 왕도 있었다. 상대가 왕국 밖에 있거나 신전이 추려 낸 명단에서 누락된 경우였다. 그런 때에는 수도의 문을 닫고 모든 출생 기록을 다시 뒤졌으며, 붉은 표식이 나타날 때까지 매달 같은 의식을 반복했다.
그러나 새 왕에게 허락된 시간은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였다.
왕관을 받아들이는 순간 왕의 몸에는 왕국을 지탱하는 신력이 깃들었다. 국경의 수호석을 밝히고 강의 흐름과 계절의 질서를 붙드는 힘이었다. 인간 하나의 육신에 오래 머물기에는 지나치게 컸고, 반려는 넘치는 힘을 나누어 받아 왕의 심장에 붙들어 매는 닻이었다. 반려 없이 왕이 죽으면 신력은 다음 후계자에게 이어지지 않았다. 왕의 생명과 함께 왕가가 신과 맺은 최초의 언약도 끊어졌다.
그 뒤에 무엇이 오는지는 어린아이도 노래처럼 외웠다.
반려 없는 왕은 죽고, 왕 없는 땅은 겨울에 삼켜진다.
오래전 반려를 찾지 못한 왕이 즉위한 지 백이레 만에 죽었고, 그날부터 일곱 해 동안 봄이 오지 않았다. 강은 바닥까지 얼고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한 채 땅속에서 썩었다. 굶주린 사람들이 성문 안팎에 쌓였으며, 국경의 수호석이 꺼진 틈으로 북부의 짐승들이 내려왔다. 왕국은 백성 셋 가운데 하나를 묻고서야 새로운 언약을 세울 수 있었다.
그 뒤로 반려 의식은 왕의 혼사가 아니었다. 왕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와 함께 이 땅의 내년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날이었다.
“한 번에 나타날 거야.”
앤드류가 말했다.
케일럽이 그를 돌아보았다.
“확신해?”
“오늘 끝내야 네가 점심을 먹을 수 있으니까.”
케일럽은 잠깐 말이 없다가 웃었다.
“그건 신도 무시하기 어려운 이유겠네.”
회랑 끝에서 왕실 근위대가 창을 들어 두 줄로 갈라졌다. 대신전의 청동문이 열리자 짙은 향 냄새와 수백 명이 억누르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앤드류의 발이 문턱을 넘는 순간 안쪽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돌기둥 사이로 의복 스치는 소리가 파도처럼 번졌다가 멎었다.
케일럽은 왕족석으로 향하기 전에 앤드류의 팔을 붙잡았다.
“형.”
앤드류가 고개를 돌렸다.
“긴장하지 마.”
“아까부터 긴장하지 않았어.”
“소매를 세 번이나 걷어 올린 사람이?”
앤드류가 케일럽의 손을 떼어 내며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점심이나 생각해.”
“끝나고 봐.”
케일럽은 웃으며 왕족석으로 올라갔다. 앤드류는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 제단을 향해 걸었다.
대신전 중앙에는 하나의 돌을 왕관 모양으로 깎아 만든 흰 제단이 놓여 있었다. 높고 좁은 천창을 통과한 햇빛이 그 위에 둥글게 고여, 주변의 얼굴들까지 희게 떠오르게 했다. 제단 양쪽에는 신의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유력한 귀족 가문의 자녀들과 동맹국의 왕족, 신전이 별의 움직임과 출생 기록을 대조해 불러들인 이들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고 나이와 출신도 달랐으나 모두 왼쪽 소매를 걷어 같은 자세로 손목을 내놓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선택이 아니라 왕국 전체의 생사를 가를 결과를 기다리는 얼굴들이었다.
앤드류는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함께 말을 탔던 북부 공작의 딸도 있었고, 지난해 국경 협상을 위해 방문했던 서부 왕국의 둘째 왕자도 있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 또한 웃지 않았다. 오늘 붉은 표식이 나타나면 그 순간부터 한 사람의 이름과 가문, 이제껏 계획한 삶이 모두 왕의 생명 아래 놓인다. 앤드류는 그들 중 누구를 보아도 자신의 남은 생을 함께할 사람이라는 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낯선 것은 얼굴이 아니라, 신이 인간 하나를 골라 자신의 운명에 꿰매 놓는다는 일이었다.
왕족석에 앉은 케일럽이 북부 공작의 딸을 힐끗 가리켰다. 앤드류와 눈이 마주치자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잘됐네.
앤드류는 못 본 척 제단 앞으로 시선을 돌리다 왕족석에서 두 줄 아래에 앉은 여자를 발견했다. 케일럽이 의식이 끝난 뒤 찾아갈 사람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단을 보고 있었지만, 케일럽이 자세를 바꿀 때마다 시선이 잠깐씩 그쪽으로 움직였다. 케일럽은 그것을 모르는 척하면서도 입가에 남은 웃음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안주머니의 반지와 아직 건네지 않은 질문이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었다.
앤드류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제단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식이 끝난 뒤에는 케일럽을 먼저 보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사제가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웅성거리던 대신전이 고요해졌다.
“왕은 왕관을 홀로 쓰되, 그 힘을 홀로 지니지 않는다.”
나이 든 목소리가 둥근 천장 아래로 울려 퍼졌다.
“신께서는 왕과 숨을 나눌 한 사람을 고르신다. 왕의 힘이 넘칠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왕의 생명이 기울 때 자신의 생명으로 붙들며, 왕이 어둠에 잠길 때 그 이름을 불러 되돌릴 사람이다.”
대사제가 제단 위에 놓인 붉은 실타래를 들어 올렸다. 왕실 문장과 함께 오래전부터 반려를 상징해 온 물건이었다.
“사람은 그 선택을 청할 수 있으나 정할 수 없고, 신은 선택한 이를 바꾸지 않으신다. 두 사람의 손목에 같은 표식이 나타날 때, 보이지 않던 실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는 붉은 실을 제단 위의 불에 넣었다. 실은 타지 않았다. 불길 속에서 잠시 금빛으로 빛나다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왕의 손이 홀로 남으면 피는 왕의 심장에서 멎고, 불은 백성의 화로에서 꺼지며, 씨앗은 대지의 품에서 썩으리라.”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붉은 실로 왕을 붙들라. 반려 없는 왕이 쓰러지는 날, 신과 맺은 나라의 언약도 끝나리라.”
앤드류는 장갑을 벗어 제단 위에 놓았다. 대사제가 그의 왼쪽 소매를 팔꿈치 가까이 걷고 손목 안쪽에 성유를 발랐다. 차가운 기름이 맥 위에 머물렀다가 손바닥을 향해 흘렀다. 아침부터 소매가 손목을 조였던 감각이 사라지자 오히려 그곳만 지나치게 드러난 듯했다. 왕관을 쓸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종류의 무방비함이었다.
후보들이 한 사람씩 제단 앞으로 나왔다.
첫 번째 사람이 성배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앤드류의 손목 위로 물을 떨어뜨렸다. 성유 위에 닿은 물방울이 잠시 둥글게 맺혔다가 손바닥으로 흘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사람이 같은 자리에 손을 얹었고, 세 번째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손의 온도와 향수 냄새만 달라질 뿐 앤드류의 손목은 아무 표식도 없이 희었다. 대사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음 이름을 불렀다.
열 번째 사람이 지나갔을 때 앤드류는 왕족석을 보았다. 케일럽은 턱을 괸 채 앉아 있다가 앤드류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남은 후보들의 수를 세어 보였다. 앤드류가 눈을 가늘게 뜨자 자세를 바로잡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얼굴로 앞을 보았다.
스무 번째 사람이 돌아섰다.
제단 주변의 침묵이 처음과 달라져 있었다. 옷깃을 여미는 손, 서로에게 기울어지는 대신들의 어깨, 성배에 물이 다시 채워질 때마다 길어지는 숨이 보였다. 후보가 줄어들수록 사람들의 시선은 앤드류의 빈 손목에서 대신전의 문으로 옮겨 갔다. 저 문 바깥의 수많은 사람에게 오늘 아무 이름도 전하지 못할 가능성을 이제야 각자 헤아리는 얼굴들이었다.
마지막 후보는 동부 변경백의 아들이었다. 그가 성배의 물을 앤드류의 손목에 떨어뜨렸다. 투명한 물방울이 성유 위에서 흔들리다가 소매 끝으로 흘러내렸다.
붉은 표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전 바깥의 바람이 닫힌 문을 밀었다. 무거운 문짝이 낮게 울렸다.
대사제가 성배를 내려놓았다.
“오늘의 명단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왕실 재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식을 다시 시행해야 합니다.”
“성수를 새로 준비하겠습니다.”
“오늘 안에 가능합니까?”
“신의 선택을 재촉할 수는 없습니다.”
낮게 엉겨 있던 목소리들이 순식간에 커졌다. 수도에 들어온 외국인을 전부 조사해야 한다는 말과 지방 신전에서도 동시에 의식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겹쳤다. 왕실 재정과 국경 봉쇄, 다음 의식의 날짜가 왕의 앞에서 허락도 없이 오갔다. 앤드류는 그 소란을 가르며 왕족석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남은 후보를 세어 보이던 케일럽은 팔걸이를 움켜쥔 채 앉아 있었다. 형을 보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처음으로 왕의 죽음을 떠올린 사람의 표정이 남아 있었다.
대사제가 지팡이를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때 제단 위의 불꽃이 크게 흔들렸다.
아무 바람도 없는데 불길이 한쪽으로 길게 누웠다. 제단 위의 성배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돌 표면을 긁으며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앤드류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붙잡았다. 손바닥이 잔 가장자리를 감싸는 순간, 거기에 새겨진 가시 문양이 살을 길게 그었다.
피가 흰 돌 위로 떨어졌다.
제단의 불이 꺼졌다.
누군가 비명을 삼켰다.
앤드류는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오므리자 갈라진 살 사이로 피가 다시 배어 나왔지만 깊지는 않았다. 문제는 상처가 아니었다. 왕의 피가 제단에 떨어진 순간 신성한 불이 꺼졌다. 앤드류에게는 우연히 겹친 두 사건이었으나, 기적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이미 흉조가 되어 있었다. 대신전 안에 있던 이들이 의자를 밀치며 일어섰다.
“형.”
케일럽의 목소리가 들렸다.
앤드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케일럽은 이미 왕족석 아래의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근위대 하나가 본능적으로 창대를 기울였다가 곧바로 거두었다. 왕에게 허락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케일럽이 형에게 가는 길을 막아 본 사람도 없었다. 그는 웅성거림과 대사제의 만류를 지나 제단 앞까지 곧장 와서 앤드류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피가 나잖아.”
“이 정도로 죽지는 않아.”
“형은 항상 그 말을 하고 더 크게 다쳐.”
케일럽은 예복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바닥의 피를 닦으려 앤드류의 손을 뒤집고,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손가락 아래를 받쳤다. 아침에 단추를 잠그고 망토의 고리를 끼울 때와 다르지 않은 손길이었다. 그래서 대사제가 들이켠 숨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전까지 어느 쪽도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앤드류는 들었다.
“손을 놓으십시오.”
대사제가 말했다.
케일럽이 그를 돌아보았다.
“상처만 묶겠습니다.”
“전하, 왕의 손을 놓으셔야 합니다.”
앤드류는 대사제의 시선이 자신들의 맞잡은 손이 아니라 케일럽의 왼쪽 손목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 붉은 선이 나타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피가 케일럽에게 묻은 줄 알았다. 그러나 선은 피부 위로 번지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가려진 손 아래, 케일럽의 손목 안쪽에서 가느다란 붉은빛이 살아 있는 핏줄처럼 뛰고 있었다. 그것은 맥을 따라 손바닥으로 내려와 두 사람의 맞물린 손가락 사이를 통과했다. 앤드류의 벌어진 상처를 스친 빛이 피를 머금으며 짙어졌다. 곧 같은 선이 그의 손바닥을 가르고 손목 안쪽까지 올라왔다.
꺼졌던 제단의 불이 다시 타올랐다.
이번에는 붉은 불꽃이었다.
대신전 안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다음 의식을 재촉하던 대신들도, 제단 양쪽에 물러나 있던 후보들도 입을 다문 채 두 사람의 손을 바라보았다. 왕의 반려가 발견되었다면 종을 울리고 신의 이름을 찬송해야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먼저 기뻐하지 못했다. 신이 틀리지 않는다는 믿음과 눈앞에 선 두 사람이 친형제라는 사실이 한 문장 안에 놓이지 않았다.
케일럽의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헤매다가 어느 한곳에서 멎었다. 의식이 끝나면 찾아가려 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난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놀라 크게 뜬 눈이 케일럽의 얼굴에서 맞잡힌 손으로, 다시 두 사람의 손목에 떠오른 붉은 선으로 내려갔다. 케일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안주머니 위로 반대손을 가져갔다. 손바닥 아래에 든 작은 상자의 모서리가 예복 위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케일럽이 앤드류의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떨어지는 순간, 피부 아래에 있던 붉은빛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실보다 가늘고 피보다 선명한 한 줄이 두 사람의 손목 사이에 팽팽하게 걸렸다.
케일럽이 손을 거두며 한 걸음 물러섰다.
붉은 실이 두 사람 사이에서 길어졌다. 빛으로 이루어진 가느다란 선인데도 케일럽의 손목이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반대손으로 손목을 움켜쥐고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실은 더 팽팽해질 뿐 끊어지지 않았다.
“아니야.”
케일럽이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대사제에게인지, 신에게인지, 손목을 조이는 빛에게인지.
케일럽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는 것을 본 순간 앤드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그 손을 붙잡았다. 팽팽하던 힘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두 사람 사이에 걸렸던 실이 맞잡은 손으로 감겨 들더니 손목을 한 바퀴 휘감았다. 붉은빛이 교차한 자리에서 저절로 고리를 만들고,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는데 매듭 하나가 단단히 조여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짧은 탄식이 터졌다.
앤드류는 케일럽을 자신의 등 뒤로 밀어 넣었다. 왕이 되기 전부터 몸에 밴 동작이었다. 케일럽에게 위험이 닿으면 먼저 그 앞을 막았고, 무엇을 막아야 하는지는 그다음에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가로막고 선 것은 칼도 화살도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왕의 반려가 나타나기를 기도하던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 얼굴들에 안도와 공포가 동시에 번지고 있었다. 나라가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나라를 살릴 사람이 왕의 친동생이라는 공포였다. 누군가는 신의 이름을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왕실 재상은 새하얗게 질린 채 두 형제를 바라보았다.
대사제가 무릎을 꿇었다.
오래된 지팡이가 돌바닥과 부딪치는 소리가 대신전 전체에 울렸다.
“신께서 왕의 반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말을 따라 축복을 외쳐야 할지, 신성모독을 목격한 사람처럼 눈을 돌려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선 채로 굳어 있었다. 얼마 뒤 한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나라가 살았다는 사실에 먼저 매달린 사람이었다. 그 뒤로 옷자락과 무릎이 돌바닥에 닿는 소리가 듬성듬성 이어졌다. 누구도 축하의 말을 입에 올리지는 못했다.
케일럽이 앤드류의 등 뒤에서 손을 당겼다. 조금 전까지는 언제든 놓을 수 있었던 손이었다. 앤드류는 이번에는 놓지 않았다. 힘을 주어 붙든 것도 아닌데, 손가락 사이에 감긴 붉은빛이 두 사람의 손을 같은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형.”
케일럽의 목소리는 아침에 왕관이 잘 어울린다고 말했을 때와 전혀 달랐다.
“이게 뭐야?”
앤드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침부터 그 손으로 케일럽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케일럽도 아무렇지 않게 그의 손목을 잡고 옷깃을 바로잡았다. 한 번도 이름 붙일 필요가 없었던 접촉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같은 손목 위에 다른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케일럽의 다른 손은 아직도 반지가 든 주머니를 누르고 있었다. 몇 시간 뒤면 한 여자에게 내밀었을 손이었다.
케일럽을 감은 붉은 매듭이 앤드류의 손목에도 똑같이 조여 있었다.
두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같은 피로 묶여 있었다.
신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