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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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판14의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경 쓰시는 분들께는 열람을 권장드리지 않습니다. 만약 이 문제로 독백 감상에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리베주한테 스포 없는 요약을 요청해주시길 바랍니다.
#파판14의 인게임 대사를 그대로 가져온 부분이 있습니다.
#부상, 유혈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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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킨은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마도 이렇겠거니- 하고 어렴풋한 추측만 해볼 수 있었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주로 한다고 하니 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사랑하고 있겠구나. 이렇게 피상적인 이해만 가능했다.

 기실 에르킨한테는 대부분의 이차적 감정이 지나치게 어렵다. 애정이란 무엇이며 수치심은 어떨 때 느껴야 적절하단 말인가. 심장이 기이할 정도로 두근거릴 때마다 주변 물건을 부수어 버릇하니 어떨 때는 그래선 안 된다고 하고 어떨 때는 그럴만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로 이상하다. 내가 느끼는 신체적 반응은 동일한데 내가 파악하지 못 하는 무언가에 따라 이름이 전부 다르게 붙여진다.

 파악이 어렵다. 구별이 어렵다. 그래도 에르킨은 각고의 노력을 들여 그것들을 학습했다. 듣자하니 자신이 안정을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모양이었고, 인간들은 이 모든 걸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는 듯 했다. 에르킨은 아버지가 자신을 안아줬을 때 느꼈던 온기가 좋았다. 어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 느꼈던 감촉이 좋았다. 그것을 영원히 느끼고 싶었기에 에르킨은 인간이 되고자 했다.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도 가끔씩 답답함을 느꼈다. 에르킨은 학문을 배우며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금세 질렸다. 타인한테 자애를 베푸는 즐거움을 배웠다. 그러나 마음이 오래도록 동하지는 않았다. 무언가가 부족했다. 심각히도 많은 것이 비어 있었고 에르킨은 그 정체를 깨닫지 못 했다.

 해소되지 못한 욕망은 어린 에르킨의 등 뒤에 달라붙어 한참동안 속삭였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달라질지도 몰라. 어딘가에는 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 정체 모를 답답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이상향이 있으리라 믿었다. 희망을 품고 에르킨은 가족의 품을 떠났다. 머나먼 동방 대륙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소망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다.

 자신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 채 지낸다.
 절망의 현상 그 자체를 마주할 때 리베리우스는 홀로 있었다. 지금껏 등을 밀어주고 길을 밝혀주었던 동료들은 리베리우스 본인에 의해 현장에서 이탈되었다. 많은 사건을 겪은 뒤 다다른 종착점에는 절망만이 눈에 보였고 존재라곤 리베리우스뿐이 없다.

 여기까지 당도했음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자신은 무얼 위해 싸워왔는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시간은 자신한테 어떤 의미가 되는가. 절망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슬픔은 무엇인가, 기쁨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일까. 마음이라는 건 뭘까.

 "모르겠어."

 먼 곳을 향해 중얼거렸다.

 "나는 전혀 모르겠단 말야."

 사람들은 리베리우스를 보며 저마다의 깨달음을 얻곤 했다. 보아라, 수없이 많은 절망 속에 짓눌려 있던 희망 한 조각 또한 리베리우스의 마음을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해 깨닫지 않았는가. 파랑새가 되어 마지막 남은 희망을 온 세계에 퍼뜨리면서 그것이 리베리우스 덕에 일어난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리베리우스는 실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네가 말하는 게 무언지 잘 알겠다며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말했다. 전에도, 이전에도, 한참 전부터 그랬듯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노라 쉬이도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게 된 다음에야 털어놓아 본다. 나는 너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결코 너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돌아갈 건가? 네가 영웅이 되는 세계로."
 "⋯⋯."

 ⋯⋯ 정정하겠다. 세상의 끝에 남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남아있었구나. 몰랐네, 제노스."

 리베리우스는 제노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 못 했다. 그냥 어느새⋯⋯ 홀로 남은 채 종언을 노래하는 자와 한 판 붙으려고 했더니 갑자기 하늘을 깨부수고 쳐들어와서는 이번 한 번만 도와주겠다고 건방진 선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솔직히 제노스의 도움 따위 필요 없었다. 그래서 리베리우스는 제노스가 없는 셈 쳤다. 평소처럼 귀찮은 짐 하나 떠안은 채 싸운다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뭐어, 발판 역할을 해준 건 고맙긴 하다. 한 꼬집만큼.

 "그래서⋯⋯ 보나마나 싸우자고 할 생각이지? 포기해줄래? 너도 알겠지만 내가 지금 많이 지친 상태거든⋯⋯. 너따위한테 할애할 힘이 없어. 여력이 있더라도 싸울 생각 없고."
 "⋯⋯ 벗이여."
 "안 싸울 거니까 알아서 돌아가. 여기서 평생 썩어주면 더 좋고."
 "에르킨."
 "안 싸운다고."
 "내 말을 들어라."
 "싫어."

 제노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리베리우스를 응시한다.

 "한 번만이라도 좋다. 영웅이 아닌 너로서⋯⋯ 리베리우스가 아닌, 에르킨으로서 들어다오."
 "⋯⋯."

 에르킨은 긍정의 뜻을 침묵으로써 내비춘다. 무기를 들지 않은 상태로, 제노스는 에르킨한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나씩 꺼내본다.

 "나는 아마도⋯⋯ 이대로 영생을 산다 해도 너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이상이니 명분이니, 타인이 규정한 영문도 모를 것들을 위해 살겠다는 건 공감할 수 없어."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평생동안 고민해봐도 너의 삶의 방식은 도저히 받아들일 만한 게 못 될 거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은 양보라는 걸 해봐도 나쁘지 않겠지. ⋯⋯ 그럴 생각으로 나는 이 곳에 왔다. 벗이여."

 에르킨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당황하면 안 된다, 저것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배신당한다. 그렇게 되내이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지만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알다시피 나는 친족도, 직위도, 부와 명예도 모두 버렸으니까. 네 앞에 있는 건 단지 제노스라는 인간 한 명일 뿐이다⋯⋯."
 "⋯⋯."
 "⋯ 허면 나는 너한테 무엇을 줄 수 있나. ⋯⋯ 알라미고에서 벌인 결전에서 나는 무엇에 환희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네가 비할 데 없는 강적이었다는 사실. 마지막 숨까지도 쥐어짜는 극한의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는 일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한테 지나칠 정도로 솔직했다.

 "그것이 나의 기쁨이자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희열일 테지."

 제일 화가 나는 것은 제노스의 말을 에르킨이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발이라도 잘못 딛으면 목숨을 잃어버릴 공간에서 에르킨이 느끼는 감정은 기쁨이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한계까지 생명을 쥐어짜내야 할 전투를 겪는다면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할 것이다. 에르킨은 그걸 알았다.

 "에르킨. 네 눈 앞의 사내를 보아라. 여기에 제국의 황태자는 없다. 에오르제아의 침략자도 아니며, 아이테리스에 가해지던 위협은 없어진지 오래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
 "이 곳에 타인이란 없다. 오로지 너와 나, 둘 뿐이다."

 에르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여 나는 요구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너와 다시 한번 싸우고 싶다. 응할 마음이 없다면 그대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도 좋다. 그것 또한 너의 선택이겠지⋯⋯."

 멍하니 제노스를 바라보던 에르킨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간다. 누구한테도 보여준 적 없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드러난다.

 "⋯⋯ 정말로⋯ 진심으로⋯⋯."

 제노스 말고는 이런 표정은 도저히 남한테 보여줄 수 없겠지. 그 사실이 퍽 유쾌하다.

 "너따위 그냥 죽여버리고 싶다."

 허, 하는 웃음소리가 난다. 둘 중 누가 낸 소리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승부를 내자. 나와 너의 생명으로⋯⋯ 수없이 많은 하늘의 별들을 모두 불태우자꾸나!"

 신이 나 어찌할 줄 모르는 저 상판대기를 뭉개버리고 싶다. 욕망의 실현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르킨이 도끼를 힘껏 던졌고 제노스는 낫으로 도끼를 쳐냈다. 부메랑처럼 날아온 도끼를 낚아채 그대로 원심력에 올라타 도끼를 휘두른다. 제노스의 목을 날려버리려 했다. 당연히, 제노스는 순순히 목을 내어주지 않았다. 낫과 도끼가 마찰하며 불꽃을 튀긴다.

 기합과 함께 낫을 쳐낸다. 몇 걸음을 물러난 제노스가 팔을 들어올리는 게 보였다. 에르킨의 눈동자가 낫의 각도를 빠르게 훑는다, 곧 전방으로 연속 공격이 크게 올 것이다. 스탭을 옆으로 빼내 미리 읽은 공격을 피한다.

 "약해빠졌어, 제노스!"

 목을 긁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 패턴 존나 쉬워! 자면서도 피하겠다!"
 "후, 나도 즐겁구나! 벗이여!"

 비어있는 옆구리를 노려 휘둘러진 도끼를 자리에서 뛰어오르는 것으로 피해버린다. 도끼날 위에 발을 딛고, 에르킨의 등 뒤에서 낫을 찍어내린다. 견갑골에 깊은 상처가 났음에도 에르킨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제노스가 올라탄 도끼를 그대로 바닥에 메친다. 이 곳이 평범한 지형이었다면 분명 지면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을 위력이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지면에 메다꽂힌 제노스의 시야가 크게 휘청인다. 그래도 아직, 싸울 수 있다.

 "한참 부족하다⋯⋯!"

 몇 합이 더 지나간다. 철가루가 휘날리고 피가 튀었으며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아직 더 할 수 있어⋯⋯!"

 에르킨이 살아있다. 제노스가 살아있다. 그것만으로 두 사람이 싸워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거리를 벌리려 하던 제노스의 손을 노리고 도끼를 던졌다. 도끼날은 손목을 깊게 베며 지나가 낫을 놓치게끔 했다. 당황할 틈이 없다, 제노스는 손에 잡히는 아무 무기나 들어 에르킨한테 휘둘렀다. 에르킨 또한 가까이에 있는 아무 거나 주워들었다. 낫 손잡이에 아직 남은 열기가 상당히 불쾌하다고 에르킨은 생각했다.

 제노스를 밀쳐내고 에르킨이 낫을 크게 휘두른다. 도끼술사의 방어가 쉽게 약해지는 지점을 에르킨은 잘 알았다. 헌데 신기하게도 제노스는 도끼를 든 초보가 공격을 쉽게 허용하는 허벅지를 방어하는 데에 성공했다. 심지어는 중간에 방향을 틀어 에르킨의 팔뚝을 도끼로 찍으려까지 하는 게 아닌가. 그걸 본 에르킨의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저 도끼를 능숙하게 다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었는데!

 "죽어!!"

 제노스의 복부에 낫이 깊게 박혔다. 토혈을 하며 제노스가 뒷걸음질을 치고, 에르킨은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주워든다. 추가타를 넣기 위해 도끼를 들어올리자 제노스가 웃음을 터뜨린다.

 "흐하하하⋯! 그래, 이런 게 바로 싸움이지!"

 자기 복부에 박힌 낫을 거세게 뽑아낸다. 그러자 검붉은 에테르가 폭풍처럼 제노스를 세차게 감쌌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사나운 흐름에 에르킨은 팔뚝으로 눈가를 보호하며 어떻게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찰나, 제노스가 검은 장막을 뚫고 달려드는 걸 보았다.

 후두둑. 살덩이와 뼛조각이 우수수 떨어진다. 에르킨의 세상 반쪽이 순식간에 소리를 잃었다. 노이즈가 뇌 속을 어지럽히고 유일하게 뚜렷한 것이 허벅지를 적시는 핏물의 뜨끈함밖에 없었다. 아프다. 떨어져나간 뿔의 단면이 불타는 것 같다.

 "이런, 고작 이 정도로 뻗어버렸나⋯⋯?"

 당장이라도 달려들 준비를 하며 제노스가 에르킨을 도발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눈을 굴려 살펴보니 제노스는 자신의 몸에 요마를 빙의시켜둔 상태였다. 그래서 이렇게 순식간에 스피드며 위력이 급작스레 증가한 거였다.

 뻗어버렸냐고?
 싸우지 못 하겠냐고?

 "개소리 하고 있네⋯ 야, 나 안 죽었다."

 전투의 짜릿함이 에르킨을 계속 서있게 했다. 서슬퍼렇게 빛나는 에르킨의 두 눈이 아직 투지를 불태운다.

 "두 팔 멀쩡히 잘 달려있으니까 덤벼."
 "후후, 그렇지⋯⋯! 이대로 끝나기엔 이르잖아, 벗이여!"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날과 날, 에테르와 에테르가 맞부딪쳐 경쾌한 마찰음을 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 한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아, 정말로.
 지금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마음 깊이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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